일본의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의 채색목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를 기억하는지요? 아주 유명한 그림입니다. 가츠시카는 후지산의 모습을 원경(遠景)으로 바라봤습니다. 바로 눈앞에서는 집채만한 파도가 사납게 으르렁대고 두 척의 배가 풍랑에 휩쓸려 흔들리고 있습니다. 배가 거의 뒤집힐 것 같은 급박한 상황입니다. 개미만한 크기로 묘사된 배 위의 사공들은 넋이 빠진 채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고 멀리에서, 머리에 흰 눈을 얹은 후지산이 그 모든 상황을 점잖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의 오른쪽 아래, 그 난리법석인 상황에서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후지산의 모습이 작게 묘사돼 있습니다. 마치 파도 위에 오연하게 떠 있는 한 조각 섬 같습니다.
이 그림은 호쿠사이가 남긴 약 1000장의 목판화 중에서도 특히 유명합니다. 계절에 따른 후지산의 풍경을 여러 각도에서 묘사하고 있는 채색 목판화 시리즈 <후지산 36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1831년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그림을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지요. ‘우키요’라는 말은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 말처럼 원래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의 풍속화를 뜻했는데, 점차 의미가 좁혀져서 채색목판화를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물론 ‘니시키에’(錦繪)라는 보다 정확한 용어도 있지만 우키요에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우키요에, 혹은 니시키에는 일본의 전통 문화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유럽에까지 알려지며 큰 인기를 끌었고, 오늘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우키요에 스타일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아흔 살로 세상을 떠난 화가 가츠시카는 자신의 우키요에가 어느 정도까지 유명세를 얻게 될 지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의 유명세는 에도시대의 일본 화가가 상상할 수 없었던 지점까지 나아갔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유럽, 특히 프랑스에는 마침내 ‘일류’(日流, Japonisme)라고 부를 만한 이국풍의 문화애호 바람이 불어 닥쳤고 그 중심에 가츠시카의 우키요에가 있었습니다. 특히 ‘가나가와의 큰 파도’는 당시의 일류를 대변하는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1862~1918)도 어느날 이 그림과 대면했을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봤는지, 그림에 대해 드뷔시가 어떤 소감을 밝혔는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인상적인 채색목판화는 드뷔시의 교향적 스케치 <바다>(La Mer)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9세기가 끝나갈 즈음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접했던 인도네시아의 전통음악 ‘가믈란’과 함께, 이국풍(異國風)이 마침내 드뷔시의 음악 속으로 상륙했던 겁니다.
물론 19세기 후반의 많은 음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드뷔시도 청년 시절에는 바그너에게 매혹됩니다. 하지만 그는 청년 시절을 벗어나면서 ‘바그너적인 것’과 결별의 수순을 밟습니다. 그것은 드뷔시 개인의 음악적 특성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유럽 대륙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음악적 독점에 균열이 가는 장면이기도 했지요.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의 문화적 특성으로 거론되는 회화성과 이국문화에 대한 개방성이 음악가 드뷔시를 통해 동시에 드러났던 셈입니다.
<바다>의 작곡 연도는 1903년부터 1905년까지입니다. 가츠시카의 판화 ‘카나가와의 큰 파도’처럼 드뷔시의 삶에서도 격랑이 일었던 시절입니다. 그중에서도 드뷔시와 사랑을 나눴던 세 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긴 어렵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드뷔시의 청년기는 무척 곤궁했습니다. ‘아르 누보’(새로운 예술)를 지향했던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은 너나없이 그랬을 겁니다. 보헤미안적 삶을 동경했던 그들에게 예술을 향한 열정과 궁핍은 동전의 양면을 이뤘고,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낭만적 연애였을 겁니다.
드뷔시 곁에도 가브리엘 듀퐁이라는 동거녀가 있었습니다. 10년 가까이 함께 지내다가 1898년에 헤어졌는데, 결별의 사유는 가난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물론 남녀의 결별이 오로지 가난 때문이었다고 보긴 어렵지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가난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파생시킵니다. 인간관계의 많은 갈등과 다툼이 가난 때문에 생기지요. 드뷔시와 듀퐁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드뷔시는 관현악곡 ‘야상곡’을 거의 마무리하면서 ‘인상주의’의 영역으로 깊숙히 들어서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듀퐁과 헤어지고 이듬해에 만난 릴리 텍시에와 법적인 부부 관계를 맺은 후에도 드뷔시의 여성 편력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1903년에는 은행가 바르닥의 아내 엠마와 도피행각을 벌였고, ‘버림받은’ 아내 릴리는 권총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지요.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당시 프랑스 문화계에 커다란 스캔들로 떠올랐습니다. 남녀상열지사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소재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드뷔시가 어느덧 주목받는 음악가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파리 뒷골목을 함께 누볐던 과거의 동료들, 여전히 ‘보헤미안’의 삶을 살고 있던 친구들조차도 드뷔시를 손가락질했습니다. 그 삿대질 속에는 인간적 비난과 음악에 대한 비판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렇게 드뷔시를 비난했던 사람들 중에는 예컨대 에릭 사티(1866~1925)도 있었습니다.
관현악곡 <바다>는 바로 그런 시기에 태어났지요. 드뷔시는 치정(癡情)의 열풍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음악가로서의 명성이 점차 확고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바다>를 완성하던 1905년에 엠마와의 사이에서 딸 슈슈(Chouchou)를 얻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의 드뷔시는 격랑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았던 행운아였을 뿐 아니라 어느덧 40대에 접어든 그의 창작적 에너지는 하이라이트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가 펼쳐낸 ‘음악적 인상주의’는 외부세계의 질적인 고유성을 허물어뜨렸다는 점에서 ‘현대적’이지요. 이를테면 우리가 드뷔시의 음악에서 발견하는 것은 ‘풍경’이라는 이름의 객관적 외부가 마침내 자아(自我) 속으로 흡수돼 재구성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뷔시는 <바다>의 작곡에 착수할 무렵, 열 살쯤 손위인 작곡가 앙드레 메사제(Andre Messag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지요. “바다가 부르고뉴의 비탈진 언덕을 어떻게 씻어내릴 수 있겠냐고 당신은 말하겠지요. (중략) 그러나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객관적) 현실보다 나의 감각에 선명합니다.” 이후에도 그는 본인의 음악적 회화성에 대한 언급을 수차례 남깁니다. “자연과 상상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 또는 “바다의 술렁거림,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곡선, 잎사귀를 스치는 바람소리, 새 울음소리.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다양한 인상을 전해줍니다. (중략) 기억 하나가 우리들 밖에서 펼쳐져서 음악으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해 펴낸 책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 드뷔시가 1892년부터 1894년 사이에 작곡했던 <목신에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프랑스 현대음악의 여명”으로 설명했던 적이 있지요. 사실 이 곡에 그런 의미를 부여한 이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1925~)입니다. 저는 졸저에서 그분의 견해를 다만 인용하고 있을 뿐이지요. 어쨌든 드뷔시는 그로부터 10년쯤 후에, ‘관현악을 위한 3개의 교향적 소묘’라고 이름붙인 <바다>에 이르러 모더니즘의 전망을 한층 멀리까지 확장합니다. 특히 그는 이 곡에서 풍경의 ‘한 컷’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에 집중하지요. 1악장은 ‘바다 위의 새벽부터 정오까지’, 2악장은 ‘파도의 희롱’, 3악장은 ‘바람과 바다의 대화’라는 이름을 내걸었습니다. 드뷔시는 “바다의 술렁거림,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곡선, 잎사귀를 스치는 바람소리, 새들의 울음소리”를 ‘우연성의 모자이크’로 보여줍니다. 그렇게 바다의 시간은 고정된 물리적 법칙을 벗어나 ‘나’의 주체적 인상 속에서 자유자재로 흘러갑니다. 그것이 바로 <바다>가 20세기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르네스트 앙세르메(Ernest Ansermet),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1957년/Decca
인터넷 매장에서 드뷔시의 <바다>를 검색하면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반들이 주로 검색된다. 물론 그 음반들도 들을 만하지만 앙세르메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데카의 녹음을 1순위로 권한다. 여러 지휘자들의 드뷔시 연주를 함께 수록하고 있는 편집 음반보다는 앙세르메와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단독 음반을 고르는 것이 낫다. 본문에서 언급한 가츠시카의 목판화가 표지에 수록돼 있는 음반이다. 드뷔시 음악의 프랑스적인 감각, 몽롱함과 색채감 등을 잘 살려내고 있는 호연이다. 드뷔시의 다른 관현악 걸작들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야상곡> <봄> 등이 함께 담겼다.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1993년/DG
현대음악의 거장 불레즈는 40대였던 1966년에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도 <바다>를 녹음했다. 이 연주도 호평을 받는다. 오늘 추천하는 1993년의 녹음에 비하자면 한결 뜨거운 열정이 넘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앙세르메의 해석과 좀더 선명하게 대비를 이룰 수 있는 녹음은 역시 1993년의 DG 음반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연주가 다소 건조하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앙세르메가 19세기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음악의 회화성을 구현하는 것과 달리, 불레즈는 드뷔시의 음악을 좀더 20세기 쪽으로 밀착시킨다. 애매한 표현 없는 정교한 연주다. 드뷔시의 음악를 정확한 언어로 설명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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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앙ㅋ
2015.02.16
클래식사랑
2014.11.12
후대의 영화 OST 작곡자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