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는 제 가슴을 울렁이는 열정 그 자체예요.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자신감이기도 하고요.”
모국어인 한국어를 포함, 4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30대 초반의 임운희 씨. 그녀는 현재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영어 강의를 하고, 틈틈이 중국어 통역사로도 일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에서 6개월을 체류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급의 일본어 실력을 자랑한다. 인사말 몇 마디로 ‘몇 개 국어 달인’이라 과장하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그녀는 단순한 언어의 달인이 아닌 ‘언어예찬론자’다. 하나의 외국어는 하나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마법의 열쇠라고 여긴다. 가끔 조용한 방에 앉아 큰 소리로 외국어 원서를 읽을 때면 황홀한 기분에 젖어든다. 이국적인 울림, 번뜩이는 표현들. 낯선 땅으로 당장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각각의 외국어는 그녀 인생을 지켜본 증인 같은 존재다. 심장에도 기억이 있다고 했던가? 그녀에겐 외국어가 꼭 그렇다. 각각의 외국어에는 서로 다른 추억의 기억이 자리한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저질렀던 소소한 실수들, 중국 친구들을 만나 허물었던 편견의 담, 철없이 즐거웠던 일본에서의 한 때, 필리핀의 살인적인 더위와 유럽의 살인적인 물가. 그 밖에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스스로와 만들었던 추억들이 한 무더기다.
그녀는 하나의 외국어를 익힐 때마다 자신만의 길을 넓혀가는 기분이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언어를 마스터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들의 인정이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어 시작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삶을 바꾸게 될지는 그녀도 몰랐다.
“저를 계속 성장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꿈꾸게 하는 일, 새로운 혜안과 통찰력을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일. 임운희 씨에게는 그 일이 새로운 외국어와 문화를 배우는 일이었다.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아
치열했던 노력의 기억을 가진 여자들은 대체로 행복한 듯 보인다. 노력의 결과를 떠나, 자신의 삶을 죽도록 사랑하고 끌어안은 기억이 있는 여자들은 대체로 반짝인다. 임운희 씨의 첫인상이 꼭 그랬다.
저는 저 자신을 많이 아끼고 사랑해요. 그래서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여자가 되고 싶어요.
눈빛이 꼭 그렇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진솔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내 예상이 정확히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20대의 그녀는 방황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했고, 작고 여렸지만 자신 안에 깃든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청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첫 열정의 대상은 영어였다. 대학 1학년 때 캐나다에 잠시 다녀온 것이 유학 전부였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영어에 모든 것을 걸었다. 말 그대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전부를 영어에 투자했다. 그녀는 말한다. 한국은 생각보다 영어를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학원수업과 좋은 교재를 활용하면 유학 못지않게 영어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어쨌든 당시의 공부를 떠올리면 지금도 기가 질릴 정도다. 어학은 그렇게 공부해봤자 소용없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자신이 직접 해봐서 안 되는 것과 남들이 안 된다기에 처음부터 안 하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다시는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없을 만큼 뜨겁게 공부하기. 그것이 그녀의 모토였다. 사실 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영어강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다른 평범한 여대생들과 마찬가지로 취업을 고민하며 하루에도 수십 통의 이력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막연히 금융권 취업을 동경하며 증권투자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당시 영어는 학점과 취업을 떠나 그녀의 심장을 뒤흔든 즐거움 그 자체였을 뿐이다.
하지만 목적지가 없으니 불안감은 컸다. 이것저것 손을 대며 노력은 하고 있으나 이정표를 잃으니 자주 흔들렸다.중국행을 떠올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영어만큼이나 다른 것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절실했던 것이다. 간단한 인사말만 가능한 중국어 실력으로 그녀는 겁 없이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중국어를 이렇게 알차게, 오래 써먹게 될 줄은. 영어에 이어 또 다른 열정의 대상이 되어주며 시야를 넓혀줄 줄은.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나아가 배운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벗겨 내 줄 줄은.
중국에서 1년을 보내고 뒤이어 곧바로 일본으로 떠났다. 기왕이면 동양권의 언어 하나를 더 배워두고 싶었다. 영어, 중국어에 이어 일본어까지 구사한다면 전 세계 어디든 자유로운 활보가 가능할 것 같았다. 언제나 문화와 언어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탈지식인’을 꿈꿨었는데 조금 근접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열정과 에너지는 놀랍기만 하다. 온몸 구석구석에 공부를 향한 의지가 불타올랐던 것 같다. 사실 당시엔 어학을 공부라 여기기보다는 즐겁고 신 나는 놀이처럼 여긴 것 같다.
일본에서의 6개월을 보내고 서울에 돌아온 뒤부터 그녀는 본격적인 공부인생을 시작했다. 일단 남들에 휩싸여 마음에도 없는 직장생활을 하느니 강점을 살려 영어강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다. 스스로 익힌 외국어 노하우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었고,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눈 뜨면 그날 하루가 기대되는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그 일이 외국어를 사용하는 일임을 지구를 반 바퀴쯤 돌아 깨달은 것이다. 물론 마흔을 넘겨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 수업료치고는 꽤 괜찮은 결과였다고 자위한다.
그녀의 공부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정작 본인은 20대를 회상하며 ‘죽도록 공부해도 절대 죽진 않아요.’ 너스레를 떨지만 듣는 사람으로선 놀랍기만 하다. 고시생처럼 두문불출 공부만 해서 놀라운 게 아니라 공부를 향한 열정이 이 세상 누구보다 뜨거워서 놀랍다. 그녀는 남들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든 외국어를 3가지나 동시다발적으로 익히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노하우를 덤으로 얻었다.
목표, 시간, 용기- 삼중주 완성하기
자고로 외국어는 삼박자를 제대로 갖춰야 원활한 진입이 가능하다. 목표와 시간과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목표는 당연히 해당 외국어 실력에 대한 목표를 말한다. 막연히 ‘올해 안에 영어 끝내기’라고 하지 말고 토익 700점이라는 구체적인 방향성을 가지라는 거다.
시간은 일단 두 가지 개념이다.
첫째, 시간 없다는 핑계를 댈 시간에 시간을 만들기.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타임플랜’을 작성해왔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한 시간 단위로 쪼개어 완벽히 계획하고 통제하고 있다. 바쁜 현대인들은 누구나 시간이 없다. 당신만 없는 게 절대로 아니다. 타임플랜을 작성하면 좋은 이유는 자투리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시간을 분석해서 시간을 벌어다 준다고 해야 할까? 임운희 씨는 이동 중 차 안에서 외국어를 청취한다. SNS로 외국인 친구들과 실시간 회화연습을 하고, 평소에는 EBS 라디오를 활용해 공짜 외국어 수업도 듣는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자투리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로 시간을 확보하지 않아도 하루에 단어 20~30개는 충분히 암기할 수 있다.
둘째, 시간의 개념을 무너뜨려야 한다. 어찌 보면 앞의 말과 상반되는 얘기일 수도 있다. 사실 외국어는 ‘완성’의 개념이 없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언어는 잊어버리게 되고, 해마다 달마다 새로운 단어, 표현법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아예 시간을 염두에 두지 말고 평생 공부할 생각으로 마음을 비우라는 이야기다. 외국어와 아주 긴긴 연애를 하듯 그렇게 말이다.
용기란 실수를 인정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함을 키우라는 거다. 그녀는 외국어를 배우는 시간만큼은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쓴다. 단어를 틀리고, 발음이 어색하고, 문법이 뒤틀려도 신 나게 떠드는 거다. 그 과정이 없이는 발전도 없다고 확신한다. 아이가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처럼, 단어부터 하나씩 사용하다가 문장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다 보면 어느새 말이 완성된다. 따지고 보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과 닮았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다. 실수하고 넘어지며 고쳐가는 과정을 거쳐 나에게 적합한 공부법을 터득한 뒤 노력하는 것. 인생 역시 비슷하지 않나?
막연히 ‘외국어를 사용하며 일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여대생은 강사생활 입문 7년 후 영어강사라면 누구나 꿈꾼다는 메가스터디 강사가 되었다. 영어책 세 권을 공동집필하고 현재는 활발히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고 있다. 최근엔 ‘재능기부’의 하나로 30대 여자들의 공부를 돕고 싶어 ‘엄마표 영어공부’ 수업을 만들었다. 커가는 아이들의 영어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동네 주부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만든 수업이다. 나눌 수 있는 재능이 있다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그녀는 지금 많이 행복하다.
* 김애리 작가의 칼럼이 『여자에게 공부가 필요할 때』 책으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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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리
천 권의 책에 인생의 길을 물었던 김애리. 그녀는 거창한 결심을 이루기 위해서라기보다, 견디기 위해 책을 읽었다. 우울증에 시달릴 만큼 예민하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에서 안정된 생활을 쫓던 그녀에게,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이놈의 ‘삶’을 견디는 일은 다 커서 젓가락질을 다시 배우는 일마냥 멋쩍고 창피했다. 이토록 소심한 여자가 청춘을 견디고, 서른을 견디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독서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며불며 책을 읽었고, 사랑 역시 책으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이 되기 전에 천 권의 책을 읽었다. 청춘이라는 악몽 같은 시간을 오직 책으로 버텨낸 그녀의 열정은 2009년 겨울 서정문학상에 단편소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이 당선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며 이후 『책에 미친 청춘』, 『십대, 책에서 길을 묻다』, 『아까운 책 2012』(공저) 등을 펴냈다. 현재 언론진흥재단, 김영사 웹진 등에 칼럼을 연재하며 독서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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