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단이 <소서노>에 이어 또 하나의 창작가무극 <바람의 나라―무휼>을 5월 11일부터 20일까지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올립니다. 고구려 건국 초기 왕가의 이야기를 다룬 김진의 만화가 원작인 <바람의 나라―무휼>은 지난 2006년에 초연돼 한국뮤지컬대상에서 안무상과 기술상 등을 휩쓸며 마니아층을 형성했는데요. 2007년과 2009년에 이어 5년 만에 관객들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아니, 당연한 일인가요?) 이번에도 주인공 무휼에 초연 이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영빈 씨가 캐스팅됐습니다. 그래서 만나러 갔지요. 연습실이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개인적으로는 2008년 뮤지컬 <컴퍼니> 이후 인터뷰로 만나는 자리라 그 사이 배우로서 많은 변신을 거듭한 그가 궁금했는데요.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고영빈 씨는 세월이 비켜갔는지 오랜만에 보는데도 정말 그대로군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도 요즘엔 나가면 다 제 나이로 봐요(웃음).”
2006년 초연 이후 4번째. 예전에 연출가 이지나 씨를 만났을 때 고영빈 씨를 총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웃음), 무휼에 독점 캐스팅된 소감이 어떤지요?
“감사하죠. <바람의 나라―무휼>은 일본 시키에서 단원생활을 마무리하고 만났던 컴백 작이었어요. 굉장히 폭발적인 반응을 주셔서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기도 해요. 또 다시 무휼 옷을 입고 연습하니까 배우가 한 캐릭터를 오랜 세월과 함께 숙성시켜서 무대에 올릴 수 있다는 게 영광으로 생각되더라고요. 몸이 움직이는 한, 역할에 폐가 되지 않는 한 ‘무휼은 내 것’이라는 생각으로 임하려고 해요.”
이번에도 단독 콜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초연 때부터 원 캐스트인 만큼 ‘무휼=고영빈’이라는 공식이 부담이기도 할 텐데요.
“엄청난 부담이에요. 그런데 그 부담을 깨주신 게 연출님이었어요. 이지나 선생님이 ‘부담스러운 것은 무언가를 지키고 유지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이다. 연기자가 무대에서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도 배우 자체에서 깊이가 나오는 시점이 있는데, 너는 이미 나이가 들었고 이제 그 시점에 도달한 것 같으니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또 다른 숙제를 주셨어요. 덕분에 연습하면서 부담은 사라졌고, 지금은 조금 더 깊이 있고 세월이 묻어나고 무대에서 그만큼 안정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숙제인 것 같아요.”
초연부터 무휼을 맡아왔으니 작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습니다. 5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바람의 나라―무휼>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캐스트에 변화가 있어요. 오랜 세월 저와 호흡을 맞췄던 상대역이 처음으로 바뀌었고, 새로 서울예술단에 들어온 단원들도 역할을 맡았고요. 사실 이 작품은 처음에 난해하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뭔지 모를 끌림에 마니아층이 만들어진 경우인데, 개인적으로는 5년 만에 다시 접할 관객들이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해요. 그동안 국내에서 공연되는 작품들도 다양해졌고, 관객들도 많은 무대를 보면서 성장해온 것이잖아요. 그래서 이 시점에서 <바람의 나라―무휼>을 만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궁금해요.”
<바람의 나라―무휼>은 시대극이면서 특이하게 ‘가무극’이라는 타이틀이 붙습니다. 배우 입장에서 일반 뮤지컬과 다른 점이 있나요?
“훈련과정이 완전히 달라요. 보통 뮤지컬은 음악에 대한 숙지가 끝나면 대본을 읽으면서 캐릭터와 작품을 분석하고, 그 다음 안무를 익히는 방식으로 진행돼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무휼은 노래는 물론이고 대사가 거의 없어요. 대부분 주변 상황을 훑고 다니는 인물이라서 마인드 컨트롤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필요해요. 대사와 노래가 적은 대신 무휼의 눈빛과 손짓, 발걸음 하나하나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서 있는 자세, 강직한 움직임, 시선 등에 대한 세심한 연습이 필요하죠. 스스로 그 인물이 되지 않고서는 자연스럽게 표현되지 않으니까.”
엠블랙의 지오 씨가 아들 호동 역으로 함께 무대에 섭니다. 아직 그렇게 장성한 아들이 있을 나이는 아닙니다만(웃음), 지오 씨의 경우 <서편제>를 비롯해 요즘 뮤지컬 무대에서 각광받고 있는데 함께 작업해보니 어떤가요?
“제가 이제 그런 나이가 됐어요(웃음). 지오를 처음 본 건 <광화문연가> 일본 투어 때였는데, 같은 무대에 서보지는 못했어요. 준비가 안 돼 있거나 너무 바쁘거나, 그래서 전체 분위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아이돌도 간혹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지오는 일단 연습에 참여하는 자세가 굉장히 성실하고 기본적인 기량들을 갖추고 있어요. 그러니까 계속 캐스팅되는 것이겠죠. 스스로 뮤지컬에 대한 관심도 많고 욕심도 있고, 똑똑해서 알려주면 바로 받아들이고 보완해요. 불편함 하나 없는 신인 뮤지컬배우 같아요. 그래서 가수로서도 그렇지만 뮤지컬배우로서의 행보도 기대되는 친구예요.”
TV 화면으로 봐왔던 탤런트나 가수들이 무대로 많이 온 만큼, 뮤지컬배우들의 브라운관 점유도 늘고 있습니다. <장옥정, 사랑에 살다> 등 고영빈 씨의 활동도 많았는데, 어땠나요?
“저는 브라운관에 크게 비중을 두고 있지는 않아요. 이런 표현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기회가 많지 않았고 어울리는 분야가 아니라고 여겨서 시도해볼 생각도 안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연기 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매체에서 일하는 분들을 알게 되잖아요. 그렇게 기회가 닿았는데 굉장히 재밌더라고요. 놀이터가 바뀐 느낌이랄까? 같은 드라마를 하면서도 마주치지 않는 배우들이 더 많아서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시스템이 피곤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공연할 때보다 편했던 것 같아요.”
원래 철저히 준비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스타일이지 않았나요?
“물론 결과물을 봤을 때의 아쉬움은 엄청났죠. 시스템이 편했고 방송할 때는 케어해주는 친구도 있어서 육체적으로 편했던 것이지, 한동안은 제가 나오는 장면을 안 봤어요. 내가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이 안 봤으면 좋겠더라고요. 그런데 저도 그 화면 안에서 변해가더군요. 후반으로 갈 때는 얼굴의 근육도 풀리고, 편한 모습도 나오고. 역시 많은 공부가 필요했죠.”
2010년 미국 뉴욕으로 훌쩍 떠난 뒤 1년 만에 돌아와 다시 무대에 선 작품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였습니다. 이후 <라카지> <마마 돈 크라이> <인당수 사랑가> <미드나잇 블루> 등 상당히 특색 있는 작품들을 하셨어요. 고정된 이미지에서 탈피했다고 할까요?
“일단 배역의 연령 폭이 넓어졌죠.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이후에 성숙해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전에는 나이가 있는데도 청년 같은 이미지여서 뭔가 무게감이 있거나 로맨스를 벗어난 역할을 맡기기에 부족했나 봐요. 그런데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에서 자연스럽게 나이가 배어나오니까 이후 다양한 인물로 불러주셨어요. 저를 망가뜨리려는 분이 없었을 뿐(웃음), 저는 늘 해왔던 댄디하고 멋있고 왕자 같은 인물 외의 것에 목말라 있었거든요.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다 보니 무휼에 와서도 달라져요. 예전에 무휼이 어떤 이미지에 갇혀 있었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사람 같고 다양한 감정 표현이 있을 것 같아요.”
일본으로 미국으로 훌쩍 잘 떠나시는데, 조만간 또 다른 계획이 있나요?
“저는 늘 가고 싶어요(웃음). 싫증을 잘 내는지 역맛살인지 모르겠는데, 이사도 자주 다니거든요. 1~2년에 한 번씩은. 그렇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기운을 받고 항상 저를 다독여줘야 하는 스타일이에요.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제가 지쳐있고 힘들어하고 무너지려고 할 때 다독여줘야 하는데, 그걸 위해서 환경도 바꿔보고 심할 때는 외국에 나가서 시야도 넓히고. 뭔가 계기와 발동이 걸려야 또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팬들도 많이 걱정하죠. ‘이제 어디 안 가는 거죠?’라며(웃음).”
40대가 되면서 연기 폭이 확실히 넓어졌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배우 고영빈’이 갖는 이미지 역시 지켜주길 바랄 것 같은데요. 앞으로 어떤 배우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나요?
“목표가 있어요. 저는 멋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인품이 멋있고, 항상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사람. 머리가 하얘지고 주름이 생기고 몸이 늙는 것은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나이 들었는데도 멋있다’라는 말을 꼭 듣고 싶어요. 세월에 나를 맡기는 게 아니라 좀 다르게 나이 먹고 싶고 배우로서 멋있게 늙고 싶어요. 그래서 나이 들면서 새로운 시도들을 더 많이 하지 않을까 싶고, 더 많이 공부하고 관리하고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아니 이렇게 멋있고 결단력 있고 부드러운 남자가 왜 여전히 결혼은 ‘안’ 하느냐고 물었더니 “결혼도 발동이 걸리면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누가 저 같은 사람을 맞추고 살겠어요. 제가 걱정이에요.”라며 웃습니다. 2년마다 이사하고 5년 주기로 훌쩍 외국으로 떠나고 40대에도 청년 같은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 배우로서는 정말 멋진데 말이죠! 아마 멋지게 나이 들고 싶다는 그의 바람도 충분히 실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랜만에 만난 고영빈 씨에게서는 확실히 더 깊은 멋과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가 다시 연기할 무휼도 기대가 되네요. 고영빈 씨도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바람의 나라―무휼>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관련 기사]
- <보니 앤 클라이드> 에녹, 이 남자에 주목하자
- 김선영, 옥주현에게 초록마녀 빗자루 넘겨받아
- <헤드윅> 조승우, 박건형 이은 캐스트는?
- 그들이 만난 순간, 모든 게 시작됐다 <보니 앤 클라이드>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solar70
2014.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