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리뷰 [나이듦을 읽다]
여느 때보다 전 세대적으로 '나이듦'에 관심이 많은 지금, 책을 경유해 다양한 시점과 각도로 나이듦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재활의학과 의사이자 러너인 정세희 교수, 죽음의 렌즈로 사회를 들여다보는 송병기 의료인류학자, 노년과 질병, 몸, 돌봄 등을 여성주의 관점으로 연구하는 김영옥 작가와 함께 나이듦을 읽어 봅니다.
기사 보기
1/6 말년성 개념을 지극히 범속하게 만들기 -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김영옥)
2/6 ‘죽어감(dying)’에 대한 정밀한 지도가 필요하다 -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 (송병기)
3/6 편안함 속에서 빠르게 늙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 『편안함의 습격』 (정세희)
*12월 22일까지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한 해 마라톤 농사는 보통 11월에 끝난다. 11월은 바스락 건조한 날씨에다 적당히 싸늘한 기온으로 달리기에 무척 좋다. 그래서 해마다 많은 마라톤 대회가 10월과 11월 사이에 열린다.
올해 나의 마라톤 농사도 11월 초 JTBC 서울 마라톤(올해는 11월 3일에 열렸다)을 정점으로 끝이 났다. 물론 그 후로도 하프 마라톤 대회가 몇 개 더 있었지만 11월이면 자연스럽게 몸도 마음도 한 해 농사 마무리에 들어간다.
12월에 러너들은 둘로 나뉜다. 바로 내년 마라톤 준비에 돌입하는 러너와 달리기 휴지기에 들어가는 러너로. 추위에 심하게 취약한 나같은 인간의 의지는, 12월부터 늘 시험대에 오른다. 밤은 길어져 창밖은 여전히 컴컴하고, 창틈을 통해 한기가 느껴진다. 당차게 이불을 걷겠다는 굳은 의지는 멈칫하고 이부자리에서 꽤 오래 뭉그적거리고 있다. 기상령과 현관령을 간신히 넘었어도 (대관령 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어나기’와 ‘현관 나서기’에 성공했어도) 달리는 내내 귀, 뺨, 손, 발이 추위에 시달려 아우성치고, 땀에 젖은 채 귀가하는 길마저 꽤나 고되다. 따뜻하고 안온한 실내의 유혹은 겨우내 실로 어마어마하다.
인류는 대대로 배고픔, 식량 부족, 추위, 더위, 거친 비바람, 눈보라, 천둥번개, 천적 등 각종 생존 위협과 스트레스에 노출된 채 살아왔다. 살아남고 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인류는 이런 위험들로부터 도망치고 지나치게 위험한 결정은 피하게끔 진화되었다. 그래서 인간이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편안함이란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한다. 생존 위협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섭씨 22도 전후로 조절되는 환경에서 비바람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되고 배달 앱을 통해 불과 몇 발짝만 걸으면 감칠맛 나는 고칼로리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환경은 인류 전체 역사 상 0.004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직업적 위선자’라고 칭하는 『편안함의 습격』 저자 마이클 이스터는 33일간의 북극 원정을 나선다. 마이클 이스터는 꽤 유명한 잡지의 건강 저널리스트였지만 동시에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했다. 부계로 내려오는 폭음 가족력도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알코올 중독자로서의 엇나간 삶이 충격 요법이 되어 그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바로 실천에 옮긴다.
이 책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실험이 소개된다(이 연구 결과는 실제로 아주 유명한 과학 학술지인 『Science』에도 실렸다1). 사람들에게 아주 험악한 표정부터 아주 온화한 표정까지 800개의 표정을 하나씩 보여주었다. ‘위협적’이라고 보이는 얼굴을 골라내는 것이 실험 참가자들이 할 일이었다. 200번째 얼굴을 보여줄 순서가 되자, 연구책임자인 브라운대의 데이빗 레버리 박사는 실험 참가자들 모르게 조금식 ‘덜 위협적’인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다음 실험으로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의학연구계획서 240개를 검토해서 연구계획이 ‘윤리적’인지 ‘비윤리적’인지를 판단하게 했다. 연구의 중간쯤부터는 ‘덜 비윤리적’인 연구계획서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위협적인 얼굴과 온화한 얼굴의 구분이 쉬웠고, 윤리적인 연구 계획과 비윤리적인 연구 계획의 구분이 쉬웠다. 하지만 실험이 진행되면서 연구자의 의도에 따라 이런 흑백 구분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표정도, 연구계획도 흑백이 아니라 다양한 회색이었다. 그 다양한 음영 사이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기준을 조절한다.
위협적인 얼굴이 드물어지자 피실험자들은 중립적인 얼굴까지 위협적인 얼굴로 보기 시작했다. 비윤리적인 연구계획서가 줄어드니 피실험자들은 이번에는 중립적인 연구계획서마저 비윤리적이라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레버리 박사는 “문제 발생 확률에 따른 개념의 변화”라고 정의했는데, 다시 말하면 ‘문제가 드물게 발생할수록 문제라고 여기는 판단의 기준이 점점 낮아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이제까지의 모든 경험을 기억해서 그 기억을 토대로 절대적인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아는 몇 가지 중에서 상대적인 비교를 내리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것이 뇌가 에너지를 훨씬 적게 쓰고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대적 판단이 반복되면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점점 덜 만족하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바위를 타고 올라야 했던 세상에 계단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계단이 주는 월등한 편의성에 크게 만족했다. 그런데 에스컬레이터가 출현하자 아무도 계단을 편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지하철 역에서 에스컬레이터도 아니고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향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이런 ’편안함에 의한 잠식’ 현상 때문에 편안함에 대한 기준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동시에 하염없이 높아져만 가며, 과거의 편안함은 불평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의 ‘컴포트존’은 계속 좁아만 가는 것이다.
현대인은 완벽하게 냉난방이 조절되는 실내에서 지낸다.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도전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현대 사회에서 그나마 육체적 도전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최적의 온습도로 냉난방이 조절되는 헬스장에서 ‘힘들게 운동’하는 것일 정도이니 말이다. 이런 ‘편안함 잠식’ 현상은 현대에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많은 현대인들이 겪는 비만, 당뇨병, 심장질환, 암, 우울증, 불안, 공황 장애다.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이른 ‘노화’를 겪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도전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생의 의미와 가치, 자신이 지닌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한 인식, 회복력을 스스로 키우는 경험, 몰입. 우리가 잊고 지내던 이러한 경험을 저자는 제안한다. 또 스마트폰과 유튜브와 TV가 앗아간 ‘따분함의 경험’도 되찾기를 제안한다.
많은 현대인이 더없이 편안하고 안전한 현대 사회에서 도리어 삶의 의미와 목적을 느끼지 못하고 공허해한다. 현대인은, 특히 도시에 사는 현대인은 불만투성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나약한 인간이 된 현대 인류가 더 건강하게 살아가고 더 건강하게 나이들 방법은 저자 데이빗 레버리가 북극 오지에서 지낸 하루하루의 생생한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편안함은 어떻게 우리에게 위협이 되었는지, 편안함이라고 누렸던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몸과 정신을 얼마나 나이 들게 하는지를, 책 ‘편안함의 습격’을 통해 새롭게 인식하기 바란다.
1 Levari, D. E., Gilbert, D. T., Wilson, T. D., Sievers, B., Amodio, D. M., & Wheatley, T. (2018). Prevalence-induced concept change in human judgment. Science, 360(6396), 1465-1467.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편안함의 습격
출판사 | 수오서재
[예스리커버] 길 위의 뇌
출판사 | 한스미디어
정세희
2001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의학석사 및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오리건 헬스 앤 사이언스 유니버시티 파킨슨센터 방문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 의과대학 재활의학교실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재활의학과 전문의로 2007년부터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재활의학과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뇌신경질환과 소아질환을 가진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음악, 미술 그리고 글은 좋아하지만 체육도 좋아하는 줄은 모르고 살다가 전공의 시절 우연히 달리기 시작한 후로 20년 넘게 달리고 있다. 뇌를 치료하는 재활의학과 의사가 된 지도 20년이 넘었다. 뇌를 보다 보니, 그리고 달리다 보니 달리기가 그저 운동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30회 이상의 풀코스 마라톤을 달렸고, 최고기록은 2022년 시카고마라톤에서 세운 3시간 38분 23초다. 평생 건강하게 달리는 것이 모토다.

![[서점 직원의 선택] 서점 매니저가 추천하는 책](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28-db2868f9.jpg)
![[인터뷰] 아침달 서윤후 김정현 “『겨울어 사전』 때문에 겨울이 기다려져요”](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27-61e9439a.jpg)

![[작지만 선명한] 포도송이 같은 연결을 만드는, 포도밭출판사의 책](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26-463a0738.jpg)
![[인터뷰] 유성호 “흡연은 암에게로 가서 와락 안기는 것”](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25-c943ebb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