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라는 글로 시작하는 책이 있습니다. 읽는 것만으로 손발이 따듯해지는 것을 경험케 하는 이 책의 제목은 『겨울어 사전』. 겨울이면 좀체 어깨를 펴지 못하고, 소화되지 못한 위장을 주먹으로 퉁퉁 치느라 정신이 없는 이들 품에 부랴부랴 안겨주고 싶은 책입니다. 『겨울어 사전』은 148개의 겨울 단어가 수록된 이야기 사전인데요. 지난여름 『여름어 사전』을 먼저 만난 독자분들이 계신다면, 책의 제목만으로 반가운 마음을 밝히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새로운 1년마다 함께하는 계절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포착해 우리의 여름과 겨울을 살피게 하는 이 두 권의 책은 ‘아침달 편집부’가 썼습니다. 정확히는 아침달 편집부와 친구들이 썼지요. 지난여름부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여름어 사전』과 예약 판매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 『겨울어 사전』을 만든 아침달 서윤후 편집자와 김정현 디자이너는 “같이 만든다는 감각”을 공유합니다. 책을 만드는 과정은 분명 협업이지만, 편집과 디자인 영역만큼 개별적이고도 외로운 업무는 없을 텐데요. 두 사람에게 “남은” 이 공통의 “경험”은 『겨울어 사전』 탄생을 넉넉히 축복하는 함박눈을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이 겨울의 순간순간을 언어화”해낸 『겨울어 사전』으로, 처음 만나는 겨울 이야기를 까먹으며 따듯한 겨울나기를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머물러 있던 겨울 풍경을 돌보게 하는 자리
『겨울어 사전』 출간을 축하드려요. 책 제목을 읽자마자 어떤 책인지 쉽게 그릴 수 있다면, 그 책은 정말 잘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놀라운 기획에 대해 여쭙지 않을 수 없는데요. 누군가의 겨울, 나아가 우리의 겨울을 담기 위한 아름다운 노력은 어떻게 출발하게 된 것인지요?
서윤후 시작은 『여름어 사전』 작업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지난해 8월 편집부 기획회의 때, 제안했던 기획이에요. 다들 좋아해주셨던 기획이었고, 덕분에 바로 작업에 착수했어요. 가장 첫 번째 순서는 편집부가 각자 쓰고 싶은 단어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연말까지 원고 집필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 후에 저자분들께 청탁을 하고, 북클럽 독자 원고 모집도 받아 차곡차곡 수록했습니다. 속도를 내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선보일 수 있겠다 싶어서 작업에 박차를 가했고요. 이 책은 제 옆에 계신 김정현 과장님이 디자인을 담당해주셨는데요. 일정을 잘 맞춰주신 덕분에 『여름어 사전』이 좋은 시기에 독자분들께 잘 알려질 수 있었어요. 중요한 타이틀이었던 만큼 표지 회의 과정이 꽤 길어지기도 했는데, 만드는 과정은 참 순조로웠어요.
김정현 그러게요. 이상할 정도로 순탄했어요.
서윤후 그렇게 출간된 『여름어 사전』이 예상했던 것보다 독자분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저희가 대처를 못 할 정도로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름이 끝나갈 무렵 『겨울어 사전』 출간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럼 그때 처음으로 『겨울어 사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신 거예요?
서윤후 『여름어 사전』을 만들면서 『겨울어 사전』이 자연스럽게 아른거리긴 했었는데요. 실제로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망설여졌던 것 같아요. 후속작으로 만드는 게 내키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획만 연속될 뿐 담길 내용은 사실 전혀 다를 것 같았어요. 계절마다 각각의 위상이 존재하니까요. 한 번 해본 작업이었던 만큼, 실무적으로도 어렵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정말 자연스럽게 『겨울어 사전』을 만들고 있었고, 그 과정이 무척 즐거웠어요.
진정한 의미의 사전은 아니지만, 그 형식을 따른다는 측면에서 기존 책 만드는 것과는 확연히 다를 것 같아요. 작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서윤후 제일 재밌었던 순간은 각자 품고 있던 겨울 단어를 잔뜩 가져와 리스트업 해볼 때였어요.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단어에 대한 단상들을 가볍게 나누면서 쓰고 싶은 것을 떠올릴 때가 가장 좋았어요. 중복되는 단어는 서로 양보하거나 함께 쓰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고요. 문제는 정작 원고를 쓰고 보니 그때 고른 단어들과 다른 것을 더 많이 쓴다는 것이었는데, 그 지점이 재밌었어요. 시간에 의해 단어도 끊임없이 이동하고 움직이는구나. 그 순간 사로잡았던 단어들도 기억에 의해, 현실에 의해 움직이며 오고 가는 것을 느끼는 게 참 신기했어요.
김정현 처음에 받은 리스트업을 토대로 일러스트를 준비했는데, 그 단어 목록이 막 바뀌어 있더라고요.(웃음)
느슨한 집필 방식이 마치 즉흥 퍼포먼스를 한다는 측면에서 현대미술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자 스스로 주제를 정했지만 그 방향으로 쓰지 않고 새로운 단어를 생성해 이야기를 만든다는 측면에서요.
서윤후 저자들 중에 원고를 못 주신 분들도 있었어요. 끝내 되게 아쉬워하셨죠. 그런 한편 『겨울어 사전』은 특히 독자 참여를 크게 늘린 작업이기도 했는데요. 문학동네에서 주관하는 독파 클럽분들, 아침달 북클럽분들 중 여러분이 참여하셨고, 열여섯 편의 원고를 받게 됐어요. 그리고 김과장님 글도 한 편 있는데…
김정현 (웃음) 왜 글을 쓰게 됐냐면, 『겨울어 사전』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지 표명을 했던 만큼 성의를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본문 집필에 부담을 줄여드리고 싶었달까요. 그렇다고 해도 딱 한 페이지의 분량이었지만, 그런 도움이라도 보태고 싶었어요.

『여름어 사전』과 나란히 태어난 『겨울어 사전』
왜 계절어 사전 작업을 더 하고 싶으셨어요?
김정현 『여름어 사전』을 만들 때 좀 즐거웠거든요. 원고를 읽는 게 특히 좋았는데, 여름에 대한 저마다의 생각을 보는 것이 재밌었어요. 그래서 『여름어 사전』에만 그치기에는 이 콘셉트의 콘텐츠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죠. 기왕이면 여름의 반대편인 『겨울어 사전』이 나왔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사실 편집 디자인하기에 사전은 고된 작업일 것 같아요. 약물 등 삽입해야 할 디자인 요소가 너무 많잖아요. 그리고 글마다 나란히 놓이는 이미지들을 찾아 삽입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을 테고요.
김정현 별로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제가 이 기획서를 받자마자 딱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거든요. 빈티지 마켓에서 건진 새 도감인데, 그게 되게 오래된 책이에요. 그 책의 본문 디자인 요소로 특유의 프레임 같은 것들이 떠올랐고, 이 작업을 통해 재해석해보고 싶었어요. 덕분에 작업은 무척 순탄하게 풀렸고, 오히려 제가 좀 맥시멀리스트여서 불필요한 요소를 너무 많이 넣는 바람에 덜어내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단어와 함께 삽입한 그림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은 않았어요. 저희 디자인팀이 가지고 있는 데이터, 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오래된 이미지들을 활용했고요. 그대로 사용하기엔 알맞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편집이 가능한 경우는 뉘앙스를 맞춰 재작업을 했어요.
서윤후 표지 레터링은 직접 하신 거예요.
와!
김정현 사실 첫 표지 시안은 깔끔하고 여백 있는 느낌으로 디자인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아침달다운 책이었어요. 감성적이었고요. 그러다 표지 방향을 전환하게 된 건, 결국 제목과 콘텐츠 자체가 너무 잘 맞았기 때문인데요. ‘제목이 두드러져 보였으면 좋겠’다는 내부 의견과 서울국제도서전 타게팅이라는 포인트에 집중해 재작업을 하게 된 것이죠. 이 작업 자체도 굉장히 재밌었어요. 실물 책이 눈에 잘 띌 수 있게 제목을 과감하게 넣기로 하고는 레터링 작업에 돌입했는데요. 기존 본문 서체에 장식미를 가미하는 방향을 택했어요. 『여름어 사전』의 경우엔 여름에 자주 볼 수 있는 덩굴 식물 같은 느낌으로 작업하려고 했다면, 『겨울어 사전』은 ‘징글벨'이 콘셉트예요. 제목을 보자마자 좀 더 즐거운 겨울 연말의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작업한 거죠. 처음엔 ‘겨울 바람’ 콘셉트였는데, 아무래도 추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포근해 보이는 지금의 모양으로 표지가 완성될 수 있었어요.
표지 자체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겨울을 상징하는 오브제(트리), 레터링, 그리고 컬러, 이렇게 딱 세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변주하느냐에 따라 책 느낌이 굉장히 달라질 수 있고, 덕분에 동네서점 에디션을 만들 때 활용도가 좋았던 것 같아요. 특히 책이 PVC 커버를 입고 있기 때문에 제목과 오브제 사이즈를 달리하고, 스티커 증정을 통해 독자분들께서 직접 꾸미는 표지를 만들어드릴 수 있게 됐어요.
디자인 아이디어는 ‘사전’이라는 콘셉트로부터 온 것이지요?
김정현 맞아요. 애초에 편집자님이 기획서에서부터 써두신 디자인 콘셉트였어요.
서윤후 제게 사전이라고 하면 PVC 커버가 가장 먼저 떠올랐거든요. 책상에서 낮잠을 잘 때, 사전을 베개 삼아 엎드렸다가 일어나면서 쫙 소리가 나는 그 포인트가 중요하잖아요.(웃음) 물론 이 아이디어를 내놓고도 고민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환경적 측면에서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제작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도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정말로 사전다운 장정으로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것이기도 해서 밀고 나가게 됐어요.
김정현 사전이라는 콘셉트를 실현하기 위해 판형 디자인에도 다양한 시도를 해봤어요. 그러다 지금의 판형을 제안하게 된 까닭은 이 좋은 글들이 넉넉하게 읽히길 원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책도 잘 펴지게 했죠.
서윤후 『겨울어 사전』 작업을 하면서는 밀어붙이려고 했던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었는데요. 반투명 PVC 커버였어요.
김정현 눈이 내리는 느낌을 주고 싶어서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막상 테스트를 해보니 아쉽더라고요. 생각보다 예쁘지도 않았고, 제목도 잘 안 보였어요.

“『겨울어 사전』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책”
사실 표지 이야기를 한다면, 출간 전 표지 투표 에피소드를 빼둘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 아침달 공식 계정(@achimdal.books)으로 두 개의 시안을 공개했었죠. 일명 ‘민트 초코’ 표지와 ‘겨울밤’ 표지로요. 저도 참여했었답니다. 그런데 어쩌다 투표까지 진행하게 된 거예요?
김정현 끝내 의견이 합치되지 못했거든요. 내부에서도 그 의견이 완전히 절반으로 갈렸어요. 그래서 독자분들께 의견을 구하기로 했죠. 이렇게까지 바이럴이 많이 될 줄은 그땐 몰랐고요.
서윤후 표지를 선공개하거나 투표에 부치는 방식이, 출간 전 책의 얼굴을 미리 공개한다는 부담 때문에 저어하는 편이었거든요. 그런데 『여름어 사전』이라는 전작이 있었고, 오히려 이 투표를 통해 『겨울어 사전』 출간 소식을 자연히 알린다는 취지에 공감하게 되면서 기꺼이 투표를 게시했어요.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투표를 열었는데, 의외였어요. 정말로 박빙일 줄 알았거든요. 제 기대와는 달리 두 표지 후보는 압도적인 표 차이가 났고, 그 결과 지금의 겨울밤 표지를 입게 됐어요.
두 분의 의견은 어땠어요?
서윤후 저희가 완전히 갈렸거든요. 저는 민트 초코, 과장님은 겨울밤.
김정현 제가 이 표지를 내부에서 설득할 때는, 『여름어 사전』 표지와의 연속성이 있다는 걸 강조했어요. 낮과 밤이라면서요.(웃음)
서윤후 김과장님의 디자인에 목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 취향으로 민트 초코를 골랐지만, 겨울밤에 담은 김과장님의 목소리도 잘 들렸기에, 기꺼이 투표를 제안할 수 있었어요. 다시 봐도 참 예쁘죠?
정말 큰 사랑을 받은 『여름어 사전』의 자매책 『겨울어 사전』도 벌써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어요. 예약 판매에서 벌써 증쇄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토록 독자들에게 열렬히 환영받는 책을 출간하는 마음은 어떠하신지요.
서윤후 (이곳에서) 편집자 생활을 하면서 ‘같이 만든다’는 감각을 자주 느끼고 있어요.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편집자만이 짊어지게 되는 부담 같은 것이 있는데, 이 책을 만들면서는 정말로 숭고하게 다 같이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경험이 무척 좋고, 그 감각을 독자분들도 읽어주시는 것 같아서 기뻐요. 무엇보다 저는 겨울을 굉장히 싫어해요. 그런데 이 책 덕분에 겨울이 기다려지더라고요. 그것만으로도 저에겐 무척 큰 변화예요.
김정현 제가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느끼는 만족이란 스스로 얻는 감각으로 끝날 때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그것도 매번 그렇지도 않고요. 이번 작업을 통해 큰 관심과 사랑, 칭찬을 받으니 행복하고, 정말 좋았어요. 저 자신에게도 무척 유의미한 성과고요. 그리고 작업하면서 글을 읽고, 뉘앙스를 읽어내면서 어떤 단상을 보게 되는데, 제 경우는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더위가 너무 힘들어서요. 그런데 여름이 좀 살 만한 거예요. 『여름어 사전』을 보면서 그 감흥이 너무 좋았고, 그래서 『겨울어 사전』 작업도 너무 하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특히나 이토록 순탄한 과정이 주는 감각과 더불어 함께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크게 받아서 이 경험이 제게 많은 걸 남긴 것 같아요.
이 책의 저자는 ‘아침달 편집부’입니다. 출판사 편집부 이름으로 책을 출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또 한편 부럽기도 합니다. 이런 팀워크를 가진 편집부가 또 있을까 싶어요. 같은 마음으로 이 책을 쓴 동료들을 직접 소개해주셔요.
서윤후 말씀해주신 것처럼 저희 편집부는 모든 편집자들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에요. 글을 쓰는 일과 편집자 일을 병행하는 사람들은 많고, 이걸 잘 구분해서 회사 생활을 하는 것은 몹시 중요하죠. 제가 이곳의 일원으로 있어 보니, 쓰고 읽는 삶을 서로 모두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것이 무척 중요한 어떤 동력이 될 때가 있어요. 여기서는 저희가 쓰는 글이 귀하게 여김 받고, 설령 잘 쓰지 못하더라도 존중받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여러분이 하는 일들은 참 좋은 것입니다’ 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하고 있는 거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북클럽을 운영하면서 모두 닉네임을 써요. 저는 넝쿨이고, 정채영 편집자는 능소화, 이기리 편집자는 낙서, 대표님은 유실이에요. 『여름어 사전』부터 『겨울어 사전』까지 책에 저자 이름과 닉네임을 혼용한 이유는 이 책의 주인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특정한 이름이 두드러져서 이 책이 그 사람의 색감으로 물들지 않고, 단어의 간격처럼 공평하게 나뉘어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했어요. 지금 와서 다시 읽어봐도, 유실, 낙서, 능소화, 넝쿨은 제각기 그 닉네임 정체성이 가진 개성으로 원고를 썼다는 생각이 들어요. 읽어보시면 아실 거예요. 보니까 『여름어 사전』 후기에 “내 취향은 누구야” 하는 반응들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겨울어 사전』은 이렇게 쓰고 읽는 삶을 귀히 여기는 편집부와 그런 편집부를 믿고 원고를 주신 귀한 작가들, 독자들이 함께 쓴 책이라고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전 목록의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했을 테죠. 그렇지 않으면 한 명이 자음 하나를 차지해 쓰는 것도 가능했을 것 같고요.
서윤후 어느 부분은 정말 연속된 한 사람의 원고가 나오기도 해요.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빼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너무 많지만 않다면요. 반대로 자음별로 빈도수를 파악해 추가로 원고를 더 받는 식으로 하는 후반 작업도 진행했어요. 『겨울어 사전』을 만드는 데 있어서 특별한 기준은 없었고, 『여름어 사전』보다 수록 단어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었어요.
김정현 결과적으로는 아홉 개 적은 148개 단어를 수록하게 됐는데, 페이지는 더 많아졌어요.
서윤후 기역에서부터 히읗까지 목록을 보면, 확실히 비어 있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런 걸 억지로 균일하게 맞추려고는 하지 않았어요. 단어별로 어떤 자격이나 의미를 찾기에는 원고까지 읽어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정말 뚱딴지같은 단어처럼 보여도 글을 읽고 나면 ‘이건 겨울어일 수밖에 없어’ 싶은 게 많았어요.
김정현 전 ‘지우개’라는 글이 그랬어요. 지우개가 왜 겨울어지? 했는데 읽어보니까 지울수록 둥그러지는 게 완벽하게 겨울인 거예요.
서윤후 ‘수족냉증’이라는 단어는 두 저자가 썼어요. 각기 다른 글 두 편인데 “손이 왜 이렇게 차?”라는 문장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그런 우연이 참 신기하고 놀라웠어요.

당신이 새로 쓸 『겨울어 사전』
사전 목록에서 예상치 않게 빠졌고, 또 추가된 겨울어 이야기가 있다면요.
서윤후 양보하다가 빠진 단어로 귤이 있어요. 겨울의 대표 과일인데, 어쩌다 보니 못 쓰고 지나갔어요.
김정현 마지막에 쓰고야 만 단어도 있어요.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원고, 마찬가지로 책의 제일 끝에 실린 단어는 바로 ‘희망’이었어요. 『겨울어 사전』의 마지막 단어로서, 독자분들이 책의 끝에 이르러 이 겨울을 반짝반짝하게 느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작업을 마무리한 게 기억 나요.
서윤후 끝이 좋으면 좋다고 하잖아요.(웃음) 『여름어 사전』은 휴가로 끝나요.
되게 중요한 포인트네요. 원래 사전의 끝은 중요하지 않잖아요.
서윤후 정말 그래요. 『여름어 사전』과 『겨울어 사전』은 끝을 향해 읽어가요. 우리가 보내는 계절처럼요.
각 단어별로 글을 모을 때, 저자분들께 구체적으로 제시한 매뉴얼이 있었나요?
서윤후 다른 건 특별히 없었는데, 분량만은 명확히 했어요. 저자가 될 분들께 모두 단어 하나를 선택해 300자 내외로 글 한 편을 써주십사 청했죠. 분량을 고지했지만 지키지 않는 분들도 계시거든요.(웃음) 그런 한편, 독자분들은 모두 이 분량을 철저히 지켜주셔서 오히려 원고를 취합할 때 책이 너무 얇아지는 게 아닐까 우려되기도 했어요.
그리고 만드는 과정에 대해 하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표지 뒷면 문구에 관한 것이에요. 『여름어 사전』 표지 뒷면 문구는 독자분 원고에서 발췌한 것이었는데요. 이번 『겨울어 사전』 표지 뒷면 문구도 마찬가지로 독자분 원고에서 선택됐어요. 놀랍게도 같은 분의 글이에요.
김정현 표지 뒷면을 흔히 디자인 용어로 표4 파트라고 이야기해요. 편집자님께서 표4 문구 후보를 전해주셨는데, 각 문장마다 누가 썼는지는 모르게 하셨죠. 내부 투표 결과를 통해 지금의 문구가 채택되었는데, 두 권 모두 같은 분의 글로 마무리되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에요.
그러면 넝쿨님이 가장 먼저 쓴 겨울어는 무엇이었어요?
서윤후 저는 아마도 기역부터 썼던 것 같아요. 그럼 ‘겨울에 작아지는 사람들의 모임’을 제일 먼저 썼을 텐데요. 계절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작은 공동체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을 담은 글이에요. 제가 겨울을 너무 힘들어하니까 ‘이런 이름을 가진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거든요. 이 모임의 일원들은 만나지 않고 그냥 겨울이 너무 싫다는 것만을 같이 나누는 사람들이에요.(웃음) 그리고 『여름어 사전』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김정현 여름 사랑단! 그 글도 정말 좋아했는데, 이번 책에서도 ‘겨울에 작아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글을 최애로 꼽아요. “여름의 순간들을 모아 겨울 안감으로 깁는 사람들”이라는 대목을 정말 좋아하고,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나 감탄해요.
『겨울어 사전』에서 특별히 아끼는 단어, 혹은 이야기가 있다면 한두 편씩 꼽아주시겠어요? 선택해주신 이유도 더불어 여쭙습니다.
김정현 저는 ‘푹하다’를 고르고 싶어요. 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잘 몰랐던 단어였어요. 푹하다는 말이 ‘푹신푹신하다’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겨울이지만 따뜻한 날씨를 말할 때 푹하다고 하는 거더라고요. ‘겨울인데도 따뜻하다’라는 말이 제게 남은 거예요. 앞으로도 잘 쓸 것 같아요.
서윤후 담당 편집자로서 하나를 꼽는 게 좀 어렵긴 하지만, 지금 당장 생각나는 원고는 ‘눈사람’이에요. 제가 이 책을 기획하면서 가장 원했던 형태의 글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무언가를 정확히 설명하면서도 사전적 의미는 살짝 벗어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그래요. 눈사람들이 모여서 밤새 자신들을 발로 찬 사람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무언가를 도모하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풍성하기에 『겨울어 사전』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글이에요.
“열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들려주지 않는 책, 그러나 단어를 두드리면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쏟아지는” 『겨울어 사전』이 어떤 분들께 가닿기를 바라시는지요.
김정현 “요즘 인생 노잼이야"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그 친구 얘기론 삶이 너무 단순한 패턴으로 흘러가니까 순간순간을 잘 놓친다고 해요. 그렇다면 지금 이 겨울의 순간순간을 언어화해서 볼 수 있게 한 『겨울어 사전』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윤후 누군가 간직하고 있던 단어는 물음표가 없는 질문들 같아요. 사전의 단어를 읽으면서 스스로 대답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이 넉넉히 닿았으면 좋겠어요.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염은영
읽고 쓰고, 엮고 매만집니다. 만든 책으로 『그만두길 잘한 것들의 목록』,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표기식
사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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