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의 병실에 방문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만 한 번에 한 명씩 마스크와 방역복을 착용한 채 방문이 가능했다. 그마저도 세상을 떠도는 병세가 완강해질수록 축소되어 하루에 한 번이 되거나 일정 기간은 아예 친족도 방문이 불가능했다. ‘격리’라는 단어가 이토록 수없이 사용될 줄은 몰랐다. 그것은 살아오면서 자주 사용할 일이 없는 단어였다. 단절과 분리는 우리가 우리로 존재하기 위해 피해 왔던 관념이 아니었나. 그러나 지금은, 오직 단절하고 분리하는 편이 우리에게서 우리를 지키는 일이 되었다. 코로나 시대였다. 외할아버지의 임종은 친족 중 누구도 곁에 있을 수 없어서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서늘하고 차가운 감촉을 동반했다. 부디, 의식이 없으셨기를. 빈 병실에서 가족의 모습을 찾거나 이름을 부르지는 않으셨기를. 그 시기의 장례는 일괄적으로 24시간 내 화장이 강요되었다. 모두에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
불행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일어나면 그건 불행이 아니게 될까. 불행이라는 건 다수에게 분배함으로써 희석될 수 있는 걸까. 2020년, 이 시절이 이토록 길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처음엔 우한 폐렴이라고 불렸던 병이 한 달이 지나고 반년 가까이 전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세계를 향한 우리의 상상력은 불안한 쪽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미지의 전염병으로 인구를 감축하려는 거대한 음모라든가, 기술 발전을 향한 인류의 통제 불능한 욕망으로 인해 초래된 재앙이라든가, 혹은 그저 자연이나 신 같은 초현실적인 주체가 사악하게 살아온 인류에게 내리는 징벌이 아닐까 하는 상상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우리는 늘 그렇듯 담담하게 적응했지만, 당시에는 어떤 안개 같은 공포감이 세계의 모든 도시에 낮고 짙게 깔렸다. 크든 작든 격리를 위한 단절의 경험은 상흔처럼 사람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겼다.
이 년 정도 거세게 지속된 격리의 시절 동안, 역설적이게도 나는 기묘한 평온함을 함께 겪었다. 인간의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접촉과 교류로부터 분리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인간관계에서 겪어야 했던 많은 의문부호들이 저절로 사라지거나 작아졌다. 당시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우선 집을 나서서 회사라는 공동 공간에 처하지 않게 되자 나는 내가 아침마다 타인과 마주치기 위해 적잖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점심쯤 찾아오던 편두통도 눈에 띄게 빈도가 줄었다. 출퇴근 체크용 프로그램에 출근 상태를 시간 맞춰 찍어두고, 처음으로 신용카드 할부를 먹여 샀던 마샬 스피커로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흥얼거리며 업무를 보다가 잠깐씩 누워 쉬고 다시 일어나 집중하면 모난 일도 어딘가 부드럽게 흘러갔다. 화상 회의를 시작하자 회의 중에 기침이 나오거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생리현상에 대한 부담감도 느끼지 않았다. 마이크를 켜지 않으면 수음이 되지 않으니까. 조용한 사무실에서는 쓸 수 없는 기계식 키보드를 크게 또각거리며 업무 메일을 작성했다. 실제로 유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유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퇴근 시각이 되면 메신저에 인사를 남기고 로그아웃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든, 감정을 내보이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타인의 감정이 멋대로 흘러 들어오지 않아서 기분이 온전했다. 천성이 활발하지 않고 곧잘 예민하거나 내향적인 탓에 내게 이 격리 기간은 오히려 나도 사회와 공존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모든 건 통신으로 간접적인 교류가 가능한, 완전하고 완벽한 단절과 분리가 아니기에 가능한 평온이었다.
당시 WHO는 사람들에게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혼자서 비디오 게임이라도 할 것을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권유했다. 온라인 게임으로 간접적인 교류와 소통을 하며 격리로 인한 외로움이나 소외감을 경감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제안한 것이다. 나는 게임을 바라보는 세간의 인식에 분명 어느 정도 오해가 있다고 여긴다. 특히 한국에서는 게임을 저급하거나 불량한 매체로 여기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마치 옛날 학교 앞 문방구에서 과연 식약처 승인 같은 걸 받긴 했는지 의심스럽게 팔던 불량 식품인 양. 우선 통칭하는 ‘게임’은 일종의 문화예술 매체를 칭하는 상위 대분류에 가깝다. 게임이라는 분류 안에는 오락실에서 동전을 넣고 하던 아케이드 게임부터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하는 수준의 제작비가 투여되어 영화보다 더욱 영화 같은 AAA급 그래픽 게임, 그리고 사행성을 내포하며 실제 돈을 걸고 불법에 근접하며 도박에 가까운 것과, 테이블에서 물리적인 판과 말을 가지고 주사위를 굴려 하는 보드게임까지, 그 다양하고 각각이 전혀 다른 모든 유희적 수단을 ‘게임’이라고 통칭하고 있다. 실제로 한때 전 세계 IT기업들이 큰돈을 투자하며 매진하던 ‘메타버스’도 온라인 게임을 즐겨하던 이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개념이었다. 이미 이십 년 전부터 개인이 가상공간에서 하나의 캐릭터를 자신의 페르소나 삼아 조종하며 타인의 캐릭터와 조응하는 온라인 게임이야말로 곧 그들이 말하는 메타버스와 다름없었기에. 나는 게임을 영상과 음악과 더불어 공감각적 체험이 집약된 종합예술 매체로 여긴다. 그리고 일본의 게임 디렉터 코지마 히데오 감독의 AAA급 게임 <데스 스트랜딩> 역시 코로나 시대의 단절과 분리를 사유하고 관통할 때 빼먹지 말아야 할 중요한 시대적 작품이라고 여긴다.

영화의 문법과 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독특한 미장센과 실제 배우 외형을 그대로 모형 하여 캐릭터를 만드는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답게, (그는 실제로 게임보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했고, 박찬욱 감독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의 그것처럼 작품의 상징과 이야기의 흐름이 가지는 의미가 다른 게임들보다도 중요한 지점이 있다. 따라서 내러티브의 반전과 비밀을 여기서 전부 열어 밝힐 수는 없겠다. ‘데스 스트랜딩(Death Stranding)’이라는 표현은 주로 해양생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고래나 돌고래 같은 대형 해양 포유류가 해변에 집단으로 좌초하여 죽은 채 발견되는 현상을 말한다. 게임 <데스 스트랜딩>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먼 미래의 어느 날, 고도로 발달했던 인류의 문명은 괴현상으로 인해 멸망했다. 지구에는 ‘타임폴’이라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광물을 제외한 인간과 식물과 동물,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인공물과 물질은 비에 닿으면 시간이 가속화되어 급속도로 노화되거나 부식되어 소멸한다. 고작 몇 분 노출되는 것으로 수십 년 이상을 늙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죽으면 몇 시간 이내에 사체에서 ‘BT’라는 유령 같은 괴물이 발생하는데, 이 BT와 살아있는 인간이 접촉하면 그 자리에 폭탄이 터지듯 폭발이 일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 지상은 더 이상 인류가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고, 여럿이 모여 생활할수록 생존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살아남은 인류는 지하에 각자 쉘터를 만들어 소규모로 거의 갇힌 채 생활하게 된다. 다행히 구세대 PC통신 같은 통신수단이 존재하여 SNS로 타인과 교류하지만,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직접 조달하는 건 쉽지 않으므로 배달을 통해 필요 물자를 조달받는다. 작품의 주인공 ‘샘 포터’는 그런 쉘터와 쉘터 사이를 지상에서 타임폴과 BT를 피해 오가는 배달부다. 플레이어는 샘 포터가 되어, 고립되어 따로 떨어져 생활하는 인물들의 의뢰를 받고 여기서부터 한참 떨어진 저기까지 혼자서 어떻게든 배달을 완수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어떤 게임이든, 게임이 사람에게 유희로 작동하는 핵심적인 원리는 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그 스트레스를 극복하게 하여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낭떠러지를 만들고 점프 버튼을 제때 누르지 못하면 게임오버, 그러나 성공하면 낭떠러지를 극복하며 다음으로 나아가는 희열을 얻는 원리다. <데스 스트랜딩>은 이 지점에서 조금 특이하다. 보통의 게임이라면 플레이어가 적을 해결하도록 적절한 수단을 준다. 그게 칼이든 총이든 마법이든. 그러나 샘 포터에게는 BT를 해결할 수단이 없다. 설정상 샘 포터는 애초에 전투 능력이 없는 그저 배달부이므로. 타임폴이 내리기 시작하면 근처 바위틈이나 나무 밑으로 빠르게 달려 비가 그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괴물을 만나면 웅크린 자세로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돌아가야 한다. 등에 짐을 한가득 짊어지고서,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막과 협곡과 설원을 지나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주는 감정은 고독감이다. 아무도 없이,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기 위해 홀로 걸어가는 고독. 무한정 걸어가지 못하고 중간중간 쉬어주도록 캐릭터에게 제약을 걸어두었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서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쉬다 보면, 게임은 서정적이거나 몽환적인 OST를 자동으로 재생한다. 풍경은 아름다워서 서글프다. 행여나 걷는 도중 조작 실수로 중심을 잃고 넘어져서 등에 짊어졌던 짐이 망가지거나 저 아래로 굴러가기라도 하면 울고 싶어진다. 그러다 보면 문득 쓸쓸해진다. 게임을 하며 쓸쓸해지다니. 사람이 보고 싶어진다. 이 물건을 전해야 할 사람이 부디 그곳에 있기를.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이 특유의 게임성 덕분에 <데스 스트랜딩>은 호불호가 강한 게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게임 발매 반년 후,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자 게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데스 스트랜딩>은 코로나 시대의 은유처럼 작용했다. 격리된 사회. 단절된 생활. 그러나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연결되려는 사람의 마음 같은 것들. 어디선가 코지마 히데오는 이 작품을 두고 이렇게 인터뷰했다. 요즘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너무나 쉬워져서 편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비방하거나 혐오하는 일도 쉬워진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고. <데스 스트랜딩>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사람과의 연결이 긍정적인 일로 전해지기를 바란다고.
무엇보다도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직접 ‘되어보는’ 경험은 게임이라는 매체가 유독 잘 해내는 일이다. <데스 스트랜딩>의 핵심은 연결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처지가 아닌, 연결을 위해 능동적으로 자신의 고독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처지로 플레이어를 몰입시키는 데에 있다. 아마도 편지의 시대에서는 그러했을 것이다. 짧은 안부를 전하는 일에도 오랜 기다림이 필요했던 시대에 사람은 몇 번이고 말을 고르고 마음을 닦았을지 모른다. 쉬운 마음도 쉽지 않게 전해야 했던 시절을 문득 상상한다. 그때, 그런 말은 차마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 말을 꼭 전해야 했는데. 늘 그렇듯, 우리는 너무 빠르고 담담하게 모든 사랑과 모든 폭력에 적응해 버린 건 아닐까. 스마트폰에 저장된 이젠 이름과 번호뿐인 이들을 살펴본다. 그들이 어디서든지 행복을 닮은 평온을 살고 있기를 빌어본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데스 스트랜딩 아트북
출판사 | 시공아트
최현우
201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당선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우리 없이 빛난 아침』과 산문집 『나의 아름다움과 너의 아름다움이 다를지언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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