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체로 유적지에 뭐가 좀 없을수록 감탄하는 편이다. 붐빌 줄 알고 왔는데 이렇게나 사람이 없다니. 유적과 유물에 관하여 아무런 설명도 써 붙이지 않았다니. 그리고…… 울타리가 없다니!
울타리가 없으면 누구나 바로 옆에 다가가 만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다른 사물들과 어우러진 채 놓여 있는 유적지를 만나게 되면 어쩐지 더 조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울타리가 없다며 바싹 몸을 붙이고 만져대다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들뜬 탓에 저지른 작은 실수 때문에 하루아침에 울타리가 생겨 버릴지도 모르는 탓이다. 한번 울타리가 생긴 유적지는 결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울타리 없는 유적지를 만나게 되면 이 문장을 잘 붙잡고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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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에는 기원전이라고 말하기도 머쓱할 만큼 먼 옛날, 그러니까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이 거닐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문장만을 안고 고성으로 향할 때에는 머릿속에 이런 장면이 들어 있었다. 공룡 발자국이 찍힌 영역 전체를 철제 울타리가 두르고 있고 발자국 둘레는 주변 땅과 한눈에 구별이 가능하도록 형광색 페인트가 색칠되어 있다. 울타리 바깥쪽으로는 한문 병기가 되어 있는 설명문이 우뚝.
그런데 나는 유적지에 도착하고도 도착한 줄을 몰랐다. 바위와 바다뿐이었다. 한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방금 찍힌 것처럼 방치된 공룡 발자국 행렬을 발견하였다. 울타리도 설명문도 없었기에 나는 내 발을 공룡 발자국 위에 포개 볼 수도 있었다. 발자국 안에 손가락을 넣어 공룡의 발바닥이 닿았을 접합면을 만져 볼 수도 있었다. 바위 절벽 아래로는 파도가 쳤다. 파도가 여기까지 덮칠 때도 있을 텐데 그럼 2억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침식되지 않고 발자국이 살아남았다는 것?
공룡 발자국 안에 바닷물이 고여 있다.
이것이 발자국임을 알려 주는 화살표나 페인트는 없었지만 바닷물이 들이쳤다 빠져나간 것인지 발자국 안에 물이 고여 있던 덕분에 가까이 가니 알아보기가 어렵지 않았다. 걷는 자세가 바른 공룡이었는지 발자국 배치가 정갈하고 일정했다. (발자국이 보다 잘 나온 사진도 있는데, 고성 방문 전 들렀던 양봉장(양봉을 취미로 하고 있다)에서 미간을 벌에 쏘인 탓에 얼굴이 퉁퉁 부어 그 사진을 쓰기가 어렵게 되었다.) 고성 화석 산지에 남아 있는 발자국 중 대부분은 초식 공룡의 것이라고 하는데, 발자국 모양이 둥글고 투박한 것이 느리게 걸어 다니며 잔디 한번 잘 먹었을 것 같다.
2억 년 넘는 세월이 이미 발자국의 강인함을 증명해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으나 나는 어떤 보호도 없이 바닷물과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발자국이 자꾸만 위태로워 보였다. 저거 울타리라도 둘러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발자국마다 유리 뚜껑을 좀 덮어 두거나. 다 깎여 나가고 나면 아까워서 어떡하나……. 고성군은 발자국을 뒤덮는 굴과 따개비를 주기적으로 걷어 내는 작업을 벌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정녕 충분한 거야? 걱정이 그곳에 발을 오래 붙잡아 두었고 나는 함께 간 친구와 괜찮겠지? 괜찮겠지? 괜찮겠지?를 몇 번씩이나 반복한 끝에 발자국 근처 해변을 더 거닐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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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돌해변을 가득 메운 돌탑들.
공룡 발자국 산지와 인접한 자갈 해변에서 이상한 장면을 마주쳤다. 돌탑이 해변에 가득했던 것이다. 바다에 다다르려면 돌탑 몇은 쓰러트려야 할 것 같았는데, 누군가 쌓는 내내 소원을 빌었을 돌탑을 쓰러트린다면은 몸 어딘가에 저주가 깃들 것만 같았다. 바다까지 걸어 볼 엄두는 물론 내지 못하였고 해변 자갈을 밟기에도 조심스러워 (모서리 없는 둥근 돌이 잘못 밟히다 튀어 돌탑을 쓰러트리는 일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자갈이 시작되는 부분 바깥에 서서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여기 엄청나게 많은 소원들이…… 위태로운 모습으로…… 그러나 바닷물 바닷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서 있구나…… 주인 없이도 잘 서 있는 돌탑들…….
만약 해변 끝에서부터 끝까지 탑들을 아무렇게나 즈려밟으며 달려 본다면 기분이 어떨까. 수백 개의 저주가 내 몸에 한 번에 깃든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누군가 부리나케 뛰어와 나를 제지하려나. 그럼 그건 누굴까. 경찰일 수는 없을 테고 해변 관리자? 또 다른 여행객? 그런데 무슨 명분으로…….
고요한 풍경을 보면 이런저런 파괴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데, 생각이야 얼마든지 가능한 데다 아직은 다행히도 생각이 행동으로 튀어나온 적이 없지만, 언젠가 머릿속과 바깥의 경계가 옅어지는 날이 와 진짜로 저질러 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는 느낌.
2억 년 전 공룡이 만든 발자국에도, 소원을 품은 사람들이 쌓았을 돌탑들에도 모두 울타리가 없다. 울타리가 없지만 공룡 발자국도 돌탑들도 같은 곳에 여전히 잘 눕거나 서 있다. 그럼에도 고성군 덕명리의 공기 중에 어딘가 일시적인, 임시의, 찰나의, 한때의 느낌이 맴도는 것은 왜일까. 공룡의 무게와 소원의 무게감 덕분에 일단 버티고는 있지만, 모든 게 잠정적인 곳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재미난 사실이 있다. 유네스코 회원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희망하는 자국의 유산을 미리 목록화해 두는데, 이 목록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고성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가 포함된 ‘남해안 일대 공룡화석지’는 이 목록에 2001년 이름을 올리고는 아직까지 같은 자리에 잠정적으로 머무는 중이다. 분명 잠깐 있다가 일어난다고 한 것 같은데, 아직은 떠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잠정이 영원이 되는 순간이 언젠가 올까. 나는 영영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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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현
2023년 문학 웹진 《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걷고 뛰고 달리고 나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