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다.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다. 맨날 독서실에서 만화 보고 이상한 노래 들으면서 공부라곤 거의 하질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근데 당연하지 못하게 공부 때문에 맘고생을 심하게 했다. 돌이켜보면 바보냐? 그렇게 처놀고 공부 안 했으니까 못했던 게 당연하지, 싶은데 그 당시에는 엄청나게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아예 공부에서 손 떼고 살았으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았을 텐데 남들 다 간다는 대학을 나도 가야 했으니 공부를 하긴 했다. 근데 대학을 가려면 정해진 시험을 봐야 했고 좋은 대학을 가려면 그 시험을 엄청 잘 봐야 했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 봐야 하는 시험은 이런 식이다. 80분 동안 50문제 풀기(2013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 기준). 애초에 풀이 시간이 정해져 있는 듣기나 빠르게 풀 수 있는 어휘 어법 문제를 제외하고 문학과 비문학 영역으로 가면 한 지문당 5분 내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게 내 맘고생의 근원인데 어린 나는 늘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글을 5분 만에 읽고 무슨 소리인지 이해해야 하는 거지? 5분이 아니라 10분을 주면 대부분이 그 글을 정확하게 읽고 요지를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글을 읽어야 하냔 말이다? 어차피 인생 너무 긴데 천천히 좀 읽으면 안 되나? 글 빨리 읽는 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라고? 어떤 글이든 5분 만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데? 5분 만에 이해한 사람이랑 10분 만에 이해한 사람이랑 무슨 차이가 있길래? 그런데 그걸 잘하면 향후 미래를 좌우할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니? 모두가 그딴 거 잘하려고 몇 년을 이러고 있는 거야 지금? 나는 그 당시 신해욱 시인의 시집 『생물성』과 김사과, 은희경 소설가의 소설을 좋아했으나 이는 그해 수능에 절대 나올 리 없는 것들이었으며(몇 해 전 은희경 선생님의 『새의 선물』이 모의고사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웠다) 결과적으로 나는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이었다. 시험에 나오는 걸 공부하지 않으면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것과 일절 관계없는 만화편집자가 되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시간에 만화책 한 장을 더 볼걸… 하는 생각을 하며. 그렇지만 이날 입때까지 정신적으로 쫓기는 상황에 시달릴 때면 다시 고등학생이 되어 시험 보는 악몽을 꾼다. 꿈에서 깨고 나면 더 이상 짧은 시간 안에 무자비한 양의 문제를 푸는 짓 따위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현실에 안도한다.
그런데 이런 나, 입시 만화를 상당히 좋아한다.
입시 만화의 묘미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청소년들이 다방면으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꿈과 희망의 주인이자 주역인 10대 청소년들이 그딴 거 나몰라라 하고 하나의 목표, 그것도 대학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속적 목표를 향해 지나치게 건강한 육신으로 모든 공력을 투입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부조리함에 막 안타까운 웃음이 나온다. 농구를 주제로 한 스포츠 웹툰이자 체대 입시의 사정을 그린 『가비지 타임』에 성준수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농구로 대학을 가야 하는데 실적이 안 나와 농구부가 있는 부산의 고등학교까지 전학을 갔는데 거기서도 약체 팀에 속해 고전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말 그대로 ‘입시 악귀’가 들린 고등학교 3학년 그 자체다. 명문 농구부에서 활약하는 조재석이라는 캐릭터도 작두 타면 손에 공이 닿는 대로 3점 슛이 터지지만 그의 어머니는 “우리 재석이 4cm만 더 크게 해달라”고 빌곤 한다.
소름 끼치는 통제광 엄마 아래 자식 이기는 부모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딸의 팽팽한 두뇌 싸움을 그린 『똑 닮은 딸』에서 소명이가 과학고 입시에 떨어졌을 때, 하물며 그 애의 잘못 아닌 잘못으로 떨어진 것을 보고 안쓰러운데 솔직히 웃음이 나왔다. 여기에다가 같은 학교를 준비한 친구는 붙고 심지어 나보다 못했던 애도 우연히 대박이 나서 붙었는데, 본인은 고작 하루 컨디션 조절에 삐끗했거나 하는 이유로 떨어지면 정신이 덜 자란 아이들은 더욱 크게 무너진다. 그렇다, 입시는 망해야 제맛이다. 만화에서는 더더욱. 열심히 노력한 인물이 원하던 것에 닿지 못해 그 낙차가 커질수록 재밌으니까. “강렬히 원할수록 필패하는 아이러니. 그 말도 안 되는 비합리의 현장에 미성숙한 아이들을 집어넣고 어떻게 각자도생해 살아남는지 지켜보기.” 이토록 추악한 어른의 취미… 한국 교육의 악질적인 문제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성의 실패가 문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성준수, 조재석, 길소명과 비교할 수 없이) 망해놓고도 지금의 내게도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듯이 입시 만화가 정말로 가려고 하는 길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보자.
『블루 피리어드』는 뭘 해도 평균 이상은 해내어 인생을 ‘Easy 모드’로 살던 야구치 야토라가 처음으로 미술과 그림의 매력에 빠져 일본 최고의 미대인 도쿄예술대학의 입시를 치르고 예술과 자아를 찾는 대학생활을 그린 만화다. 소년만화의 열혈이 담긴 미대 입시물이라고 해야 할까, 야토라는 남들보다 훨씬 늦게 미대 입시를 시작했지만 특유의 감각과 재능으로 도쿄예대 입시생들과 어깨를 겨누며 나아간다. 우리 정말 열심히 하자! 응응, 최선을 다하는 거야! 하며 그림을 향한 사랑과 순수로 똘똘 뭉친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지자마자 다음날, 1차 합격 발표가 나고 그중에 절반 이상이 입시 학원에서 사라진다. 하루아침에 말이다. 대학에서 뽑는 사람은 적고 거기에 가고 싶은 학생들은 많기에 이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미대 입시는 일반적으로 대학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을 낳는다. 그림 그리는 것을 안 좋아하는데 미대를 가려고 하는 아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주변에서 제법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것으로 대학까지 가려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턴 그게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야토라는 생각한다. “좋아한다면서 그것밖에 못하냐는 말을 들을까 봐”……
그림을 그려서 대학을 가는 일도 일반 입시처럼 부조리한 것은 비슷한 것 같다. 일단 시간 내에 그림을 그려야 하고, 때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대비할 수 없었던 문제를 당일 현장에서 바로 소화해야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어떤 정물을 똑같이 묘사하는 것과 향후 독창적인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에 얼마나 심오한 연관성이 있길래 모두가 똑같은 걸 그려 평가받아야 하는가? (물론 내가 몰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수도 있다.) 한국도 특정 대학이나 학과를 가기 위해 몇 해나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들이 있는데 그런 학생들의 경우에는 더욱 씁쓸하다. 입시엔 워낙에 변수가 많고 그해의 출제자나 대학의 방침에 따라 달라지니 어떤 해엔 합격 직전 떨어졌는데 올해는 1차에서 떨어질 때도 있고, 자신 있는 문제가 나오면 능란히 그려낼 수 있지만 당일 컨디션이나 멘탈 관리를 못 하면 실력과 관계없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 또다시 다음 1년을 준비해야 한다. 아직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말이다.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혹은 정말로 아직도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아서. 그러는 동안 무언가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변질되고 있다는 걸 느끼는 것만큼 슬픈 게 어디 있을까.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 순서대로 대학 가는 게 아닌 현실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어떻게 그려 나가야 할까. 그것이 유독 내가 미대 입시물에 끌리는 이유인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도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하며 평가를 받고 있고, 내가 만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와 아무 관계없이 나의 몸값이 결정되는 직장인의 응당한 숙명 속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마음이 크게 꺾일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작품이 인기를 얻거나 좋은 매출을 올리는 것은 사실 나 혼자 어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도 하다. 그때, 야토라와 같은 입시 학원을 다니는 하시다 하루카라는 캐릭터가 이런 말을 했다. “예대 시험이라는 건 올해 합격했어도 내년엔 붙을지 어떨지 몰라. 그러니까 즐겁게 그리는 게 이득이지.” 그런 그는 도쿄예대 입시에 실패하고 2지망의 학교로 진학한다.
나는 이해득실과 손익 계산에 약한 편이다. (그나마 언어는 풀기라고 했지 수리 영역은 시험지 받자마자 잤다.) 어떻게 하면 이득이 될지, 뭘 하면 손해를 피할 수 있는지 면밀히 파악해 행동하는 게 어렵다. 그래서 좋아하는 걸 일로 하게 됐다. SNS에서 그런 이야기를 봤다. 게임을 좋아하면 게임을 하면 되는데 왜 게임 개발자가 되려고 하냐고. 이걸 보고 처음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맞다. 게임을 좋아하면 게임을 아주 많이 하면 된다. 그림을 좋아하면 전시회를 가고 작품을 구매하면 되지, 왜 그림을 그리려고 할까? 만화를 좋아하면 만화를 보면 되는데 왜 만화를 그리는 것도 아니고 만화책을 만드려 할까?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즐거우니까. 좋아하는 것에 나를 투입시키는 게, 내가 기여되는 게 즐거우니까. 즐거우면 힘들어도, 손해를 입어도, 망해버려도, 그래도 좀 괜찮으니까. 그러니 실패했지만 이득을 얻은 그 아이의 말을 나는 딱 하나의 유일무이한 명령어로 삼기로 했다. “즐겁게 하는 게 이득.” 애초에 만화는 즐겁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거란 말이지? 마지막으로 이 만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 야쿠모가 한 말까지 하나 더 새겨본다. “우리는 누가 더 고생해서 작품을 만드는지 경쟁하는 게 아니잖아?”
인생을 좌우하는 줄만 알았던 일생일대의 시험을 망친 지도 한참이 지났다. 이제는 그 시험을 망쳤다는 사실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이렇다 할 인생은 아니지만 솔직히 좋은 대학 나왔어도 지금보다 더 잘살고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왜냐하면 시험에선 해방됐지만 그 후의 인생은 모두가 평등하게 항상 시험 치는 기분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때로는 좋아하는 마음까지도 시험에 드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 하여 추악한 어른이 왜 자꾸 애들 대학 가는 데 관심 가지며 입시 만화에 기웃거리냐면, 그것이 좋아하는 대상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이들의 절박하지만 동시에 간절한 사랑 고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그래, 어쩌면 “명왕성처럼 타원을 그리며 오래오래 달리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신해욱 『생물성』 중 「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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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인
만화 편집자. 출판사 스위밍꿀에서 에세이 『펀치: 어떤 만화 편집자 이야기』(2024)를 냈다. 집 가서 만화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