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야흐로 '연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연일 기상천외한 연애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모두가 이상형 월드컵에 열광한다. 연애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은 압박, 마치 모두가 ‘연애 시험장’에 입장해 있는 듯한 풍경은 이제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연애가 무엇이고 또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공원의 자연처럼 관리되는 시대에, 이들의 무도한 이야기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의 말’ 중에서)
이는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 전경린이 소설 『얼룩진 여름』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초판 출간으로부터 24년 만에 새롭게 완성한 이 소설은 사랑이 지닌 파멸적 아름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작가는 왜 24년의 긴 시간을 거쳐 이 작품을 새롭게 완성했을까. 연애가 하나의 스펙이 되어버린 지금, 진정한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전경린 작가와 나눈 일곱 개의 문답을 통해 그 답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뎌 보자.
이번에 새롭게 『얼룩진 여름』을 펴내셨습니다. (짝짝짝!) 이 책은 2001년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란 제목으로 처음 출간한 후, 2005년 『유리로 만든 배』로 한 번 개정한 것을 다시 한번 출간하는 것이지요. 초판 출간에서 이번 복간까지는 24년이 걸린 셈인데요. 이 작품을 새롭게 복간한 작가님의 소회가 궁금합니다.
24년은 긴 시간이지요. 유전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바뀐다는 뜻이지요. 이번에 재출간 책을 내면서 24년이 흐르는 동안,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무엇이 계속되고 무엇이 사라지고 또 새로워졌는지 생각했어요. 여전한 점은, 나는 아직도 눈앞에 드러나 있는 관습적이고 규범적이고 보편적인 사회 질서와 일반적인 언어의 틀을 식상해 하고 그 질서의 바깥에서 길을 모색한다는 거예요. 이 소설은 젊음의 한가운데서 나왔으니 그런 특징이 더욱 선명하지요.
처음 작가님께 저자교용 원고를 드릴 때의 일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에는 저자교에서 무리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던 작가님께서 보내주신 저자교를 살펴보았는데… 웬걸 신작 소설의 초교를 보신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을 다시 살펴주셨더라고요. 단순히 문장을 다듬는 것을 넘어 본문의 내용과 그 구성에도 커다란 변화를 더했고요. 결과적으로 40쪽 이상의 분량을 도려내는 과감한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작업을 대하는 작가님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 본문에 큰 변화를 주신 계기나 주안점을 두신 분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젊었을 때 나는 꽤 치열했어요. 다른 작가들이 피하고 금기시하는 부분을 나는 언어로 표현한다는 일종의 도전 의식이 있었지요. 저자교를 받고 도입부를 읽었을 때, 마치 혈기 왕성한 여동생이 쓴 소설 같았어요. 젊었을 때의 나란 지금의 내게 그런 존재지요. 신랄하고 자극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튀는 표현들도 거침없이 했고, 하고 싶은 주장도 많아서 이야기 바깥으로 돌출되기도 하고요.
지금의 나는, 오직 소설 자체를 위해 저자교를 보려 했어요.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이 이야기를 위해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과감하게 덜어내 소설의 라인을 간명하게 살린다, 였어요. 그 과정에서 자연히 구성까지 재조정하게 되었고요.
소설의 첫 시작이 무척이나 강렬했습니다.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스물다섯 살이란 여자들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희망을 잃는 나이다.”(9쪽)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요.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은령의 나이가 스물다섯이기도 하고요. 어떤 배경에서 스물다섯이란 나이를 주목하셨는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스물다섯 살을 여자가 처음으로 현실 사회에 진입하는 나이로 봤어요. 사회란 변화가 느린 곳이라 지난 세대의 온갖 관습과 관념이 쌓인 퇴적물 자체이고, 본질은 손익과 효율성을 따지며 장사하는 곳이지요. 무엇보다 타인들의 세계고요. 은령은 독립하려고 여러 번 취직했지만 자리 잡는 데 실패하고,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양부의 집에 계속 얹혀 지내기는 불편하고, 또 만나는 남자는 있지만 인습적인 결혼을 단념하면서 희망을 잃지요.
저는 작가님의 작품에서 음악을 활용하시는 것이 참 재밌더라고요. 올해 초 출간한 『자기만의 집』에서 인디 록 밴드의 노래까지 언급하시는 것이 놀라웠고요. 이번 소설에서도 팝송부터 클래식, 그리고 동물원의 「유리로 만든 배」까지 활용하시지요. 작품을 쓰실 때 음악을 활용하시는 이유나 배경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음악은 인물의 심리와 상황을 드러내고 이야기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전하지요. 또 삶에서 그렇듯이,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문득 현실과 연결되어 나오기도 하고요. 이 작품을 쓰던 무렵 우연히 동물원의 노래를 들었는데, ‘난 유리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네’라는 가사가 은령의 이야기를 그대로 표현한다고 느꼈어요.
“요즘처럼 사랑이 공원의 자연처럼 관리되는 시대에 이들의 무도덕한 이야기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328쪽) 이번에 새롭게 쓴 ‘작가의 말’에서 이 문장을 보고 정말 허벅지를 짝! 하고 쳤습니다. 이 소설을 관통하면서, 이 책을 새롭게 읽을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너무나 명료한 문장이라서요. 동시에 사랑보다는 욕망과 균열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지요. 이 부분을 조금 더 부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경험이든, 그렇게 하거나 하지 않기를 자신이 선택한 거라면, 나쁜 경험은 없다고 생각해요. 얻은 것과 포기한 것을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는 한 경험 자체의 가치는 중립적이지요. 삶은 눈에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이 함께 엮어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니까요. 사랑 역시 진정성이 있다면 새로운 세상과 자신을 만나게 되고 때론 파국에 이른다 해도 창조적인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욕망과 균열은 결핍과 혼란에서 비롯되지만, 한편 자신을 가두는 교착상태를 돌파하고 나가는 힘이기도 해요.
작가님을 수식하는 표현 중에 “대한민국에서 연애소설을 가장 잘 쓰는 작가”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연애소설’의 사전적 정의는 “사랑을 주제로 하는 소설”이더라고요. 과연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 소설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면서도, 작가님의 소설을 이야기할 때 연애와 사랑이 빠지지 않는 나름의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가님에게, 그리고 작가님의 소설에 있어 ‘사랑’이라는 주제는 어떤 의미인지 짧게라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줄리아 크리스테바 식으로 말하자면 내 글쓰기는, 육체가 언어 속으로 직접 흘러 들어가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심장에서 바로 나온 글쓰기라든가, 정념적이라든가, 연애소설을 잘 쓴다고 한 것 같아요. 제 소설에서 사랑은 현실에 갇히지 않고, 하나의 존재로 굳어지지도 않고 스스로 변해가려는 실존적 욕망이에요.
요즘 정말 많은 연애 프로그램이 각종 미디어에서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합니다. ‘연애 강요하는 사회’라는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이요. 모두가 연애와 사랑에 목을 매고, 또 기꺼이 그러길 바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이토록 연애와 사랑에 모두가 굶주린 이때, 이 책을 새롭게 읽을 독자들에게, 또 저마다의 ‘사랑’으로 고단할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 시대처럼 연애와 사랑이 지지를 받는 때가 있었나 싶어요. 그 저변에는 4포 세대, 5포 세대가 일으킨 연애 태업에 대한 우려와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이 크지요.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물질적인 사회에서 그만큼 사랑을 하기 어렵다는 방증이고요.
대표적인 인기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 좋은 직장과 경제력을 갖춘 30대 중후반의 미혼들이 주로 등장해요.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먼저 자리를 잡고 결혼한다는 전략과 조건과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딜레마가 재미있어요. 좋은 자격을 갖추려면 연애 대상과 낭만적인 사랑의 시기와 가임기를 놓치게 되는 문제도 그렇고요.
사랑은, 자신이라는 한 인간의 개성과 상황과 능력대로, 자기에게 맞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상형이나 남 보기에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잘 맞는 사람과 사랑하게 되지요. 연인은 때로는 관습과 인습에 맞서며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세계를 지키려는 인식과 용기가 있어야 하고요. 그래서 ‘선남선녀’가 아니라도, 또 어떤 종류의 사랑이라도 잘 맞는 커플은 어디서나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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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여름
출판사 | 다산책방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