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온전히 자기 이야기를 할 시작점에 이르기까지
존재 깊은 곳에, 외로움을 가진 사이러스의 이야기는 언제 시작되는가? 누가 그 시작점에 있는가? 소설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그동안 진행되어온 이야기 전체를 뒤집어버리는 반전의 힘으로 한국을 강타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지지 않는 반전이 있다.
글 : 정혜윤
202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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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카베 악바르 저/강동혁 역 | 은행나무


혹시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라는 소설 읽은 사람? 이것은 사랑 이야기인가, 반독재 투쟁 이야기인가. 물론 오스카 와오는 반독재 투쟁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하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탐욕스러운 독재자가 자기 마음대로 끌어안고 싶어 하는 여자였기 때문에 우리는 반독재를 강렬하게 원하게 된다. ‘와치맨’을 인용하는 끝 대사. ‘더 크고 더 따뜻한 세상을 위하여’ 였던가! 하여간 그런 대사가 책의 마지막에 있는데 나는 그 페이지를 거의 눈물을 흘리며 읽었고 그 말은 어떤 독재 타도 구호보다 더 심금을 울렸다. 그 무렵에는 웃기고 실속 없고 마블에 빠져 있고 <반지의 제왕>에서나 나올 법한 요정어를 쓰는 뚱보 오사카 와오가 내 눈에는 다른 어떤 소설 속 주인공보다 매력적이었고 입맞춤과 독재 타도 만큼이나 장난기와 유머와, 재치로 나를 사로잡은 주노 디아스가 언제 또 소설을 낼까 눈 빠지게 기다리게 되었다.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읽은 지 수년의 세월이 흘러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카베 악바르의 『순교자!』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그런데 뭔가 익숙한 냄새가 느껴졌다. 뭐지? 앗, 오스카 와오의 향기가 아닌가. 읽자마자 다시 한번 온갖 말을 되는대로 늘어놓고 웃기고 실속 없고 앞가림 못하는 불안정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를 읽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밀려왔다. 우리의 주인공 이름은 사이러스 샴스. 물론 소설 초반부터 그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키가 190센티미터가 넘는 덩치가 큰 어른이다. 그 몸 안에는 깜짝 놀란 채 언제나 슬픔과 외로움과 우울의 짙은 구름 아래 있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다. 이 어린아이가 쉴새 없이 튀어나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끌고 가려 한다. 다행히 덩치 큰 어른 안에는 덩치 큰 어른도 있을 것이다. 이 어른이 언제 몸 밖으로 빠져나오느냐는 것이 이 소설의 관건이다. 소설의 초반에는 이런 대화들이 이어진다.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요. (난 중요해지고 싶어요.

다른 사람도 다 그래. 더 깊은 걸 말해야지.

난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품요.

(소설의 초반은 라디오 헤드의 creep을 배경음악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 네가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뭐야? 너를 다른 모든 사람과 실제로 다르게 만드는 게 뭐냐고.

난 죽고 싶어요.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엄마는 다른 사람 300명과 죽음을 나눠야 했어요. 우리 아빠는 웬 기업형 농장에서 수십 년 동안 닭똥을 치운 끝에 이름 모를 사람으로 죽었고요. 난 내 인생이, 내 죽음이 그보다는 의미가 있었으면 해요.

순교자가 되고 싶은 거야?

비슷해요.

사이러스. 넌 더러워진 네 옷조차 직접 못 빨잖아. (내가 가슴에 폭탄을 묶고 카페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너 자신의 좆같이 비대한 자아만 아니면 됐지. 중요한 건 그것뿐이라고.

 

아직은 이야기가 아닌 이런 대화들이 언제 제대로 된 이야기가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그의 인생을 누구의 인생과도 다르게 만드는 커다란 일이 있긴 있었다. 사이러스는 이란의 전 국민이 날씬한 몸, 더 나은 직장을 원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임신과 출산으로 기진맥진해진 사이러스의 엄마 로야는 ‘이라크를 상대로 싸우는 이란군에서 복무한 이후로 건강이 나빠진 오빠 아라시와 일주일을 함께 보내려’ 두바이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로야는 정말 오랜만에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되찾았다. 로야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와 상관없이 로야가 탄 비행기는 이륙 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 해군 함정에 의해 격추되었다. 비행기에는 어린이가 66명 타고 있었다. 67명일 수 있었다. 만약 로야가 사이러스를 데리고 탔더라면. 아내가 죽고 한 달 뒤 그의 남편이자 사이러스의 아빠 알리는 결혼사진을 가방에 넣고 아이와 함께 이란을 떠나버렸다. 간 곳은 미국. 양계장. 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책에서 배웠다. 그러나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밖에 없다면 그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미 중서부의 백인들이 보는 아무리 잘생겨도 못생겨 보이는 이란인 중 한 명에 불과한 사이러스. ‘순교’는 그가 피해 갈 수 없는 단어였다. 그는 순교자!의 영혼을, 순교자의 어린 시절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순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아라시 삼촌이다. 전쟁 중 그의 임무가 있었다. 수백명의 이란 사람이 전쟁터에서 죽어갈 때 조용히 비밀리에 긴 검은색 망토를 입고 말을 탄 채 손전등을 비추며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천사처럼 보여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존엄과 확신을 품고 죽게 해주고, 자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혼미한 채 죽어가는 남자들은 말을 탄 아라시를, 빛 받은 후드를 쓴 그의 모습을 보고 다름 아닌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거나 열두 번째 이맘(메시아)이 그들을 위해 돌아왔다고 믿게 될 터였다.’ 죽어가는 이란 남자 수백 명에 그는 말에 탄 아라시가 마지막으로 본 대상이었다. 그 말은 아라시가 수백 명이 죽어가는 것을 봤다는 뜻이었다. 아라시는 악마와 천사와 병사를 보기 시작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하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이다.

 

사이러스가 이 죽음과 비극을 가지고 하는 일은 대체로 술과 약에 취해 있거나 넋두리 늘어놓기다. 사이러스에게는 분노와 자기 연민이 있고, 떨칠 수 없는 자기혐오도 있다. 온통 감정뿐이다. 존재 깊은 곳에, 외로움을 가진 사이러스의 이야기는 언제 시작되는가? 누가 그 시작점에 있는가? 부모와의 진정한 조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소설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다. 반전도 있다. 그동안 진행되어온 이야기 전체를 뒤집어버리는 반전의 힘으로 한국을 강타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지지 않는 반전이 있다.

 

오스카 와오는 사랑 이야기이면서 반독재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이러스는 순교 이야기면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이러스는 온전히 자기 이야기를 할 시작점을 갖게 되었다. 사이러스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세상에 있다. 그는 살아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제 사이러스가 누군가에게 그 일을 해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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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