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곰팡이에 맞서 아등바등 분투하는 것을 아는 지인들은 나에게 권고했다. 다 버리고 그 집에서 나오라고. 미련 없이 다 버리고, 집을 새로 구하고, 맨몸으로 처음부터 다시 살라고. 본인이 겪는 사건이 아니어서 속 편하게 던지는 말이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염려하기 때문에 해주는 다정한 말이었다.
다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책, 옷, 집기... 그것에 들인 돈이 아까워서였을까. 나는 책이 아까운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수십 권 수백 권의 책을 한꺼번에 버린 적이 여러 차례 있다. 삶의 한 단계를 깔끔하게 마감하며 마치 나비가 번데기 허물을 벗어 던지듯 버리기도 하고. 기형도의 시구처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과 작별해야만 했을 때, 미욱한 몽매 속에 무작정 구입한 책들을 친구 차에 실어 중고서점에 가차 없이 팔아 치웠고. 삶이 지나치게 버겁다고 여겨질 때, 그 무게를 물리적으로 경감하려고 내 소유물 중 가장 무거운 것인 책을 덜어내곤 했다.
나는 옷이 아까운가. 옷에 대해서라면 마음 깊이 그렇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신춘문예 시상식에서 입었으나 흰 곰팡이가 핀 검은 실크 드레스, 그리고 몇몇 다른 옷들. 그것들은 그저 실용적인 사물이 아니라, 나조차 정확히 모르는 내 자아 이미지와 무의식적 욕망과 결부된 무엇, 내 상상적 신체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오래 기른 머리카락을 자르듯, 자율적 의지가 샘솟는 순간 단숨에 가볍게 버림으로써 해방될 수 있어도, 예기치 않은 파괴자 때문에 썩고 더럽혀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옷을 버리는 것은 과거로부터 오래 간직한 나와 찢어져 헤어지는 것, 그리고 미래에 되고 싶은 나와 멀어져 포기하는 것이었다. 옷에 곰팡이가 피었다는 것은 그렇게 시간 속에 형성된 겹겹의 내 이미지의 피부가 얽고 짓물렀다는 것이었다. 곰팡이가 하얗게 돋은 옷을 들추면서 나는 헐벗음이라기보다 내장까지 쓰라리고 뒤틀림을 느꼈다.
살려야 한다. 살리고 싶다. 살릴 것이다. 오염된 것을 내 생활권에서 제거함으로써 가짜 해방을 누리느니, 그것을 어떻게든 떠안고 살려냄으로써 내게 닥친 우발적 사건의 무게를 견디고 싶었다. 내가 살린 것들이 지속할 시간 덕에 나도 살고 싶었다.
더 철저해질 필요가 있었다. 침실에서 가구와 옷을 다 들어내고 방을 텅 비웠다. 아예 벽지부터 소독하기로 했다. 청소 도구를 사러 외출하는 길의 하늘에 오랜만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떴다. 창문, 창틀, 벽지를 알콜로 닦고, 제습기로 말리고, 가구를 다시 배치했다. 며칠에 걸쳐. 오염된 집에서 드디어 위생적인 멸균실이 확보되었다. 이 방은 자는 시간에만 사용할 것이며, 곰팡이 포자가 들어오지 않게 언제나 밀폐되어 있을 것이며, 여기서부터 점차 멸균의 공간을 늘려나갈 것이다.
*
습습한 이슬비와 폭우가 번갈아 내렸다. 침실을 소독하는 동안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서재 청소를 재개해야 했다. 침실을 청소하느라 요가를 그만둔 며칠 사이에 서재 책꽂이에 놓아둔 아이패드의 가죽 커버에 곰팡이 무리가 동글동글 돋아난 것을 발견하고 소름이 끼쳤다. 집에서 멸균실 하나를 만드는 동안 다른 공간에서는 곰팡이가 더욱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맥이 풀렸지만 주저앉을 시간이 없었다. 눈물을 닦고 서둘러야 했다.
어떤 참혹한 광경에도 눈 감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책꽂이를 훑어보았다. 영어권 책 선반을 지나 독일어와 프랑스어 책을 꽂은 선반을 점검했다. 오염과 훼손의 정도가 얼마나 심할지 몰라 심장이 어지럽게 뛰는 와중, 우습게도 출판사마다 피해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간파했다. 독일 주어캄프의 감색 표지 철학서들은 내지가 누렇게 바래고 습기에 부풀어 통통해졌을지라도 의외로 균류에는 강한 듯 깨끗했다. 그렇게 벤야민 독일어판 전집, 칸트의 Kritik der Urteilskraft, 헤겔의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이 살아남았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살구색 표지 책들과 폴리오 문고본도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 PUF 출판사의 책들에는 책등을 따라 푸른 곰팡이가 예쁘게 피어 있었다. 이로써 이 출판사에서 나온 푸코, 라플랑슈, 칸트 불역본이 재활용 쓰레기 더미로 축출당했다. 선반들을 빠르게 점검하면서 나는 점점 무감하고 냉혹해졌고, 책들을 무더기로 묶어 버리는 데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다. 곰팡이와 나 사이의 거리두기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고, 곰팡이에 감염된 것들을 기계적으로 제거, 축출, 격리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한국어 책꽂이를 점검할 차례가 되었다.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총서 전체에 교교한 녹회색 곰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목도했다. 이처럼 아름다운 색의 곰팡이는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고대 청동 기물의 녹 같았다. 감탄이 나오며 고요한 관조의 욕구가 우러나오는 지경이었다. 이 책들만큼은 절대 버리고 싶지 않았다. 제안들에서 책이 한 권씩 출간될 때마다 편집자 N.은 번역자와의 토크를 기획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참석해서 번역자의 말을 책 안에 받아 적었기 때문이다. 이 책들을 버린다면 그 시간의 현장성과 어디에서도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말들이 다 버려지는 것과 같았다.

인터넷에서 곰팡이에 오염된 책 복구법을 검색하니, 일본 도서관의 사서들은 에탄올 75% 희석액을 거즈에 적셔 책을 닦아낸다고 했다. 나도 이 방법을 사용하여 제안들 총서의 책을 조심스럽게 살려보려 했다, 그러나 수입지로 만들었다는 책 표지뿐만 아니라 손가락이 닿지 않는 책등 안쪽의 오염이 너무나 심해 다른 사물들과 함께 그대로 방 안에 둘 수 없었다. 결국 살리기를 포기하고 버리며 펑펑 눈물을 흘렸다. N.도 내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나는 N.에게 곰팡이로부터 살아남은 갈리마르 살구색 모리스 블랑쇼 수십 권을 우리의 우정 어린 시간을 증표하는 선물로 보냈다. 생존한 것 역시 미련 없이 떠나보낸 것이다. 더 안전한 공간에서 더 오래 살아 있기를 바라며.
나는 결국 온전히 무감하거나 냉혹할 수 없었다. 심하게 손상된 책들을 묶어 버릴 때 심장에 칼금이 그어지는 듯했다.
*
장마가 끝났다는데도 비가 계속 내렸다. 9월이 찾아오고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건만 곰팡이 청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태풍이 연이어 왔다. 비가 끊임없이 주룩주룩하는데 소독의 속도는 한없이 느려서 곰팡이의 증식이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곰팡이에 오염된 책만 골라 버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서가에 숨통을 틔워주어야 했다. 나는 손상되지 않은 책들도 무작위로 골라 버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오염된 책들이 아직 깨끗한 주변의 책들에도 균을 전염시켰기 때문이다. 라캉의 세미나 책들을 다 버렸다. 서가 한 줄이 통째로 비워지며 내 인생의 한 시절이 삭제되었다. 독일 철학서도 다 버렸다. 어차피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들이었다. 헤겔 미학강의는 J.에게 보냈다. 지인들에게 내가 소장한 펭귄 문고본 중 갖고 싶은 것을 물어보고 택배로 보냈다. 작가들에게 받은 서명본도 거의 다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그들도 내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 알아서 나중에 내 생활이 복구되면 책을 다시 선물해 주겠다고 했다.
많은 것을 버렸다. 무조건 비워야 했다. 격리의 빈 공간을 만들어야 아직 살아 있는 것들을 비로소 살릴 수 있었다. 나 역시 다시 살려면 그래야 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윤경희
문학평론가. 비교문학 연구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산문집 『그림자와 새벽』과 『분더카머』를 쓰고, 앤 카슨의 『녹스』를 비롯하여 그림책과 그래픽노블 여러 권을 번역했다.
![[김혜리 칼럼] 일종의 직업병](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11/20251126-21ebf7a7.jpg)
![[리뷰] 다시 중첩되고 또 멀어지는, 몸들의 이야기](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8/20250814-423bae4d.jpg)
![[구구X리타] 책에게 예의](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7/20250722-d483e3be.jpg)
![[취미 발견 프로젝트] 함께라서 더 행복한 봄의 한복판에서](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4/20250428-2a252fb9.jpg)
![[리뷰] 우뚝 선 존재로서](https://image.yes24.com/images/chyes24/article/cover/2025/03/20250314-8f0cacf6.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