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사랑하기
서로가 서로인 것이 고통인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삶임을, 이해한다는 것. 박선우 작가의 장편 소설 『어둠 뚫기』를 읽어 봅니다.
글 : 한소범(한국일보 기자)
202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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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뚫기』

박선우 저 | 문학동네


몇 해 전 엄마에게 결국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나는 내 삶이 나 이후로 더 이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그날따라 내 말투가 결연했던 탓일까, 엄마는 내가 정말로 그럴 생각이란 걸 실감했는지 평소처럼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불쌍해.”

 

내가 나인 것은 항상 나에게 문제가 됐다. 하지만 더 복잡한 문제는, 엄마 역시 내가 단지 나인 것으로 인해 고통받았다는 것이다. “불쌍하다”는 말의 주체가 나인지, 아니면 엄마 자신인지 모호한 것도 그 이유였다. 이 고통의 유일한 공평함이라면 나 역시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가 바로 나의 엄마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애증이라는 말은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발명된 단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영원히 괴롭히고 사랑한다. 누가 아니겠는가? 소설 『어둠 뚫기』의 엄마와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작년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박선우 작가의 장편소설로, 출판 편집자이자 소설가이며 소설을 통해 커밍아웃을 한 남성 동성애자인 화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마라는 존재를 이해해보려 애쓰는 이야기다. 동시에, 자기혐오라는 어둠을 뚫고 나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인 ‘나’ 역시 자신이 자신이기 때문에 겪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그가 “과연 내가 남자가 맞는”지 자문하는 남자라는 점이다. ‘나’는 남자이지만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로서 응당 수행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역할놀이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남중, 남고, 군대, 회사 같은 남초 집단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가담하지 못할 때, ‘나’는 “내가 그들과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남자들에게 위협받고 남자들에게 멸시”당하는 동시에, “벌을 주듯이 그들과 섹스”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도 벌을 내린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37년 일평생을 함께 살아왔음에도 한사코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부정하는 엄마라는 존재다. 엄마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는 것으로 두 번에 걸친 ‘나’의 커밍아웃을 철저히 외면한다. 우울증에 대해서도 “감수성 과잉이나 의지박약, 철딱서니 없는 응석”쯤으로 치부한다. 엄마는 어린시절 동급생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정확히는 ‘꼴린다’고) 고백한 ‘나’를 어두운 방 안에 밀어넣은 뒤 문을 닫아버렸고, ‘나’의 우울증 약을 매번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놓는 방식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들을 눈 앞에서 치워버린다. 

 

엄마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면 내가 나인 문제는 좀 달랐을까? 나는 나를 덜 미워했을까? 그건 상처 입은 자식들이 늘 품게 되는 질문이다. “우리 안의 상처들이 오롯이 엄마의 잘못으로 생긴 게 아님을 알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지만, 그래서 엄마를 안쓰럽게 여기는 순간들도 더러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원망은 (...) 결코 해소할 수는 없”다. 고단한 생활의 무게에 지쳐 분을 참지 못하고 ‘나’와 형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라고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너무 복잡해서, ‘나’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만약에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와 엄마 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다. 그리고 이해는, 그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얼마나 닮은꼴인지 깨닫는 순간 연민과 공감의 다리가 놓이며 비로소 가능해진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찍 결혼한 엄마, 아버지가 비극적인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두 아들을 길러야 했던 엄마, 평생 미싱사로 일하느라 손이 굽어진 엄마,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엄마, 코로나로 실직한 엄마. 그리고 오래전 어느 날, 삶이 너무 버거워 연탄을 이용해 다 함께 죽으려다 어린 형제 코 밑에서 부는 뜨거운 숨 때문에 계속 살기로 마음먹은 엄마. 

 

내가 죽고 싶은 만큼이나 엄마도 죽고 싶었으리라는 것, 그럼에도 엄마는 죽지 않았다는 것. 그건 나로 하여금 “슬픔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야 한다. 누구나 그렇다”는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종래에는 “있는 그대로의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다짐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노력이 애초의 갈등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주진 않을 것이다. 엄마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될 순 없고 한국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풍경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둠을 뚫기 위해 꼭 아침이 와야만 하는 것은 아니듯이, 한밤중 “곳곳에 창백한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가로등”이나 “가로등 빛을 머금고 활짝 피어난 백목련”만으로도 우리는 희미한 빛을 상상할 수 있다. 그 빛에 기대어 계속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빛을 가리키는 것도, 다름 아닌 엄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기’라는 유구한 미션은 나와 엄마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엄마에게 나는 불쌍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고, 물론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다. 그러다 또 어느 날, 전화를 끊기 전에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 죽기살기로 그러지 말자.” 마찬가지로 주어는 모호하지만 나는 그게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하는 말임을 안다. 서로가 서로인 것이 고통인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삶임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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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뚫기

<박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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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한국일보 기자)

199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국문학과 영상학을 전공했다. 발표된 적 없는 소설과 상영되지 않은 영화를 쓰고 만들었다. 2016년부터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