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날] 우리는 유령국가다
함께 읽는 여자들 ③ - 아홉의 연대자들. 함께 읽으며 완벽하게 결핍된 관계를 맺고 헤어지는 일에 관하여, 그러니까 함께 『딕테』를 읽는다는 것.
글 : 김지승
2025.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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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엄주


2025 여성의 날 특집 – 딕테를 읽는 여자들

딕테 모임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진행 중입니다. 딕테를 읽으며 텍스트 너머로 연결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나아가 함께 읽는 여성들이 함께여서 도착할 수 있는 낯설고 먼 곳의 풍경도 담았습니다.



“마침내 이곳에 왔다. (…) 나는 여성이라는 위대한 존재를 보고 있다. 그 여성의 공간과 모든 아시아 사회의 무게를 짊어진 여성을. 어쩌면 과한 일반화일까?[1]

  

몸은 경계다. 그 자체로 그렇다. 이 경계를 살피는 일로 읽기가 시작되려고 한다. 그 직전에 고백이 있다. 이것은 나를 위한 작품 같다, 설명할 수 없지만 내가 쓴 것처럼 느껴진다, 왜 우는지 모르면서 울게 된다, 내가 하고자 했던 또는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여기에 있고… 이 공통의 환대와 애정에도 계보가 생길 만큼 시간이 흘렀다. 1982년 이래 『딕테』를 앞에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고백의 계승자가 되었을까. 때로 누군가의 고백은 반투명한 밤에 초 단위로 신경을 잡아채는 불안에 관한 것 같기도 했다. 경계가 물에 녹길 바라면서도 두려운 누군가는 자기애적 공감의 자리에 우선 서기도 했지만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딕테』는 이동하는 몸의 장소, 퍼포먼스의 공간. 읽기가 시작되면 누구도 한 자리에 가만할 수 없었다.

 

읽기가 여러 번, 다르게 반복되었다. 번역본 출간 이후 처음에는 관심 있는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비정기적으로 읽고 새로 구한 자료를 나누는 식이었다. ‘메두사의 웃음으로’라는 여성적 글쓰기/읽기 워크숍을 진행하고부터는 『딕테』의 한두 장(주로 칼리오페 서사시와 에라토 연애시)을 매번 소개했다. 절판 상황이 장기화되고 있었다. 거의 매일 그의 이름을 검색했다. 엄연한 부재가 한두 문장, 때로는 긴 논문 한 편으로 증명되는 순간이 슬프면서도 좋았다. 그는 점점 더 부재하면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가 1979년 한국에서 쓴 편지를 읽게 된 날, 나는 문장의 ‘여성’이었을지 모를 79년의 엄마와 이모와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들 모두가 넉넉하게 들어올 공간이 서서히 열리는 감각과 그가 잠깐 망설이며 덧붙였을 “어쩌면 과한 일반화일까?”에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 엇갈려 흘렀다. 일 년에 두 번 10주씩 테레사 학경 차의 다른 작품들과의 상호매체성을 중심으로 읽는 시도가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건 나와 또 다른 여자들 안에서 엇갈려 흐르는 그 무엇들 때문이었다.

 

‘시차’도 그 중 하나였다. 읽기 구성원의 수와 전공, 장르, 읽기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딕테』가 절판되고 10년쯤 지나고부터다. 공교롭게도 2016년 트럼프 당선이 미국 예술계에 실험성과 정치성에 관한 고민을 다시금 불러일으킨 상황과 맞물린다. 현실 참여와 미적 실험성, 양쪽 모두를 구현하는 작가와 작품이 긴급하게 호출되면서 테레사 학경 차와 『딕테』가 “다시” 주목받게 된다. 미국발 재호명이 한국의 급변하는 페미니즘과 만나고, 코로나 이후 유럽과 미국, 아시아 각지에서 모임 참여가 가능해지면서 『딕테』의 시차는 현실적 감각이 되었다. 줌 화면 앞에 모인 이들은 서로의 ‘시차’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고통을 공유하면서 절박함 자체보다 너무 절박하지 않으려 애씀을 서로에게 들켰다. 들키고 나서는 『딕테』에 등장하는 그 무수한 ‘she’가 누구인지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여기 함께 있으면서 도무지 없는, 늘 복수인 ‘she’의 국가. 이 ‘유령국가’[2]의 주권자는 고통을 들키는 자이자 엿보는 자였다.

 

오역을 무릅쓰고 ‘she’는 ‘우리’로 옮겨졌다. 굳이 무릅쓰는 일이 번역이고 기억이어서 우리는 텅 빈 페이지를 그냥 넘기지 못했다. 『딕테』에는 오른쪽 페이지를 완전히 비워두는 장이 세 곳 있다. 엘리테레 서정시 장의 손자국 이미지 옆, 테르프시코레 합창 무용 장의 마지막 단어 ‘echo’ 다음, 마지막 장 폴림니아 성시 장에서 소녀가 약을 가지고 집에 도착해 창호지문 너머에 가물거리는 촛불의 그림자를 보는 다음 페이지. 영문본이 이런 식으로 텅 빔의 물성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에 비해 번역본은 폴림니아 성시 장을 제외하면 페이지 배치를 바꿔 오른쪽 페이지를 채워놓는다. 레이아웃과 페이지네이션 역시 번역의 영역이라면 채움으로써 결락된 번역인 셈이다. 비움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엘리테레 서정시 장의 손바닥 그림과는 정반대다. 엘 카스티요 동굴에 남아 있는 수많은 손자국 중 하나에 시각적 균열과 시간성이 더해진 이 이미지는 당시 여성 예술가들의 서명일 가능성이 높다. 동굴 벽에 손을 대고 그 위로 산화철 가루를 후, 분 다음 손을 떼면 벽에 묻은 산화철이 손 모양의 경계를 따라 남는다. 네거티브 필름처럼 하얗게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그 손은 여성의 공간이고 기억이며 쓰기이다. 비움과 채움의 관계성으로 드러나는, 부재함으로 존재가 증명되는 수많은 존재들의 서명. 더구나 왼손의 서명. 

 

그 빈자리에 자기 손을 넣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늘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자주 거기에 손을 댄다. 그러고 나면 잠시 가득 찬 부재가, 기억을 위한 자리로 변한다. 함께 읽는다는 건 공동의 기억을 구축하는 일이다. 그 과정의 육체적 기입과 물질성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딕테』를 읽는 내내 엄청난 피로감을 느낀다. 무병(巫病)이나 히스테리에 가까운 체험이다. 수동적인 증상으로서가 아니라 여성의 언어를 몸의 증상으로 표출하는 실천으로서의 히스테리. 히스테리의 수행은 불연속적인 위장과 은폐로 이루어진다. 권력의 감시를 피해 여성이 기억과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용이하다. 『딕테』 전체에서 이 위장과 은폐의 수행은 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덮기, 씌우기, 입히기, 주형하기, 가리기, 막치기, 모호하기”라는 동명사의 수행 뿐 아니라 변장, 은닉, 가면, 베일, 구름, 그늘, 일식, 비밀 등이 여성의 시적 도구이자 타자의 공간을 재확보하려는 시도로 제시되는 순간마다 위장된 진실이 뜨거워졌다. 

 

위장된 진실의 열기 속에 ‘she’가 증식하고 있다. 자꾸 ‘우리’로 오역되면서, 마치 어떤 우연과 오해와 실수로 유령 기의가 기표에 빙의된 ‘유령어(ghostword)’[3]처럼. 착오와 오해, 오인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는 늘 우리와 닮아 있다. 잠시 어떤 의미를 가지지만 결국 결핍과 결여로 돌아온다. 우리는 그렇다고, 우리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 있다. 슬픔이나 고통보다 그 오래된 기진함을 이해받고 싶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둔 기억이 내게 있다. 어쩌면 ‘she’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몇 번째 ‘she’? 그건 알 수 없지만 아픈 엄마를 위해 약을 구해오다가 우물가에 도착한, 마지막 장의 어린 딸 같은 ‘she’다. 너무 피곤하고 목이 마른 딸. 엄마를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언제나 배신당하고 말았던 딸들의 딸. 그의 깊고 검은 마음이 우물가의 여자가 건네는 환대에 울렁거린다. 엄마 몫으로 아홉 개의 약을 건넨 여자는 열 번째 약을 어린 딸의 몫으로 따로 챙겨주며 할 일을 일러준다. 

“멈추지 말고 기억하라(make no stops and remember)”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 딸은 폭력적으로 옮겨진 자에서 기억을 옮기는 자, 열 번째 ‘she’가 된다. 금이 가고 깨진 사발로 기억을 이식하는 여자. 상실된 기억을 기억하는 여자들.

 

 유관순과 이화학당 친구들. 차는 사진을 편집해 아홉만을 남겼다.

  

여자들이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닫으면 유관순과 이화학당 친구들이 사진 속에서 이곳, 이 시간을 보고 있다. 아홉, 아홉의 연대자다. 아홉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수, “완벽한 결핍의 수”이다. 한 개인의 기억에서 연대와 중첩의 기억으로 읽기는 끝이 난다. 우리는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는 완벽하게 결핍된 관계를 맺고 헤어진다. 의미가 없거나 잘못 의미된 채로. 함께 원 하나를 그렸다는 안도감과 고단함에 한숨을 쉬기도 한다. 한숨이 여기 있던 것을 조금 멀리 옮겨놓는다. 한숨은 그런 것이다. 잠깐. 그러고는 천천히 다시 비워지는 타자의 자리. 사라 아메드의 말처럼 “우리가 함께 소리 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듣고 있”어서 우리의 목소리가 점점 커질 수 있는 거라면 우리의 결여는 우리의 생존도구가 된다. 

 

그렇게 의미의 의미가 비워지는 장소, 우리는 유령국가다. 

 

 


 

[1] 1979년 테레사 학경 차가 미완성 영화 <몽골에서 온 하얀 먼지> 촬영차 18년만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친구 민용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

[2] 주 3번 참조

[3] 한국어에서 유령어는 ‘사전에 실려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어려운 단어’를 지칭한다. 이와는 다르게 『딕테』 탈리아 희극 장에서 유령어로 번역된 ‘ghostword’는 어떤 우연과 실수, 오해나 혼란을 이유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단어가 권위 있는 사전이나 자료에 등재된 경우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원래 없던 의미가 부여되는 하나의 현상이다. 흥미롭게도 유령어(ghostword)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연달아 제시된 ‘유령국가(phantomnation)’다. 원래 유령(phantom)과 국가(nation) 사이에 하이픈이 있는 단어로 다수의 유령, 나라를 이룰 정도로 많은 유령을 의미하던 것이 실수로 하이픈이 누락되면서 유령어(ghostword)가 되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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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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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w

2025.03.06

함께 원 하나를 그릴 수 있어서 she안으로 들어가볼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메두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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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eun328

2025.03.06

작가님을 통해 딕테를 접하고 유영한지 10년정도 되었네요. 너무나 아름다운 글로 여성의 날 선물을 차오르게 받은 듯 해요.. 늘 자리에서 글을 쓰고, 서로를 듣게끔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귀를 기울입니다. 메두사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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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저/<김경년> 역

출판사 | 문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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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승

문학, 문화이론,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여성적 글쓰기와 다양한 여성 서사를 주제로 독립 연구를 진행해왔다. 현재 장르간 협업과 강의, 글쓰기를 병행 중이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