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박서보예술상을 수상한 작가 엄정순이 그림책 『코끼리를 만지면』을 냈다. 비엔날레 수상 작가의 그림책이니 유려한 그림이 실렸겠다 싶지만, 책은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조금 특별한 아이들이다. 『코끼리를 만지면』은 시각 장애 아이들이 예술가들과 함께 코끼리를 상상하고, 만져 보고, 표현해 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박한 그림으로 시작한 책은 책장을 넘길수록 경이롭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놀라운 작품으로 이어진다.
엄정순 작가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까? 작가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어떻게 이런 독특한 책을 내게 되셨을까요? 출간 소감도 궁금합니다.
저는 지난 20여 년 간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를 해왔는데, 모든 과정들이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에 자료를 기록하고 작품을 보존하는 아카이빙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꾸준히 아카이빙을 해 왔는데, 그것을 출판사에서 눈여겨보시고 그림책으로 만들 것을 제안해 왔어요. 제 프로젝트의 결과물들로 만드는 그림책이라 기존의 그림책과는 조금 형식이 다르지요. 학생들과 함께한 작업들이 멋진 그림책으로 만들어져 감사하고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그림책이라고 생각해요.
『코끼리를 만지면』은 작가님이 10년 넘게 해오신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어떤 것인지요?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는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예술가로서 제가 오래 품어온 질문에서 시작되었어요. 열반경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는 그 이야기 역시 과연 본다는 게 무엇인지를 묻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 인류의 오래된 이야기를 예술 프로젝트로 만들어 봤지요.
열반경의 이야기는 자기 생각만 주장하며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인간의 우매함을 꾸짖는 교훈을 담고 있지요. 반면에 저는 지상에서 가장 큰 동물인 코끼리는 과연 어떤 동물인지 시각 장애 아이들과 함께 탐색해 보고 그 경험을 예술로 표현해 보는 프로젝트로 만들었습니다.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박차고 나온 뒤 무작정 맹학교를 찾아가 미술 수업을 시작하셨지요. 시각 예술가가 시각 장애 학생들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작가로서 품었던 ‘본다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그렇다면 ‘안 보인다는 건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도 자연스레 이어졌어요. 그 질문에 집중했기 때문에, 시각 장애에 대한 선입견은 별로 없이 미술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 안 보이는 세계에 대해 관념적으로 접근하다 실제로 같이 해 보니 보이지 않는 이들과의 작업이 가진 의미와 가능성을 많이 깨닫게 되었어요.
『코끼리를 만지면』에 등장한 작품은 모두 아이들과 예술가의 협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렇게 협업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지요?
기본적으로 협업은 서로의 차이를 연결해서 새로움을 찾는 혁신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저에게도 시각 장애는 미지의 세계입니다. 저는 그 세계를 배우는 바로 방법이 협업이라고 생각했어요. 문제를 나누는 것이 문제 해결 방법이란 말처럼요.
제 프로젝트들을 아우르는 이름은 ‘우리들의 눈(Another Way of Seeing)’입니다. 보는 눈과 보지 못하는 눈 모두가 우리들의 눈이란 뜻이지요. 영어 이름은 시각 예술과 시각 장애라는 다른 문화가 만났을 때 탄생 가능한 ‘또 다른 눈’을 찾아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시각 장애를 가진 학생들과의 협업을 어떻게 하는지 선례가 없었기에 많은 실험을 하면서 환경을 만들어 갔어요. 그 과정 자체가 세상을 보는 또다른 방법(Another way of seeing)이었습니다.
『코끼리를 만지면』을 보면 창의성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작가님은 창의성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창의성에 대해 정의 내리기는 쉽지 않지만, 창의성에 도달하는 많은 길 중 하나는 생명이 있는 실체를 만나는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이 프로젝트에서 살아 있는 코끼리와 아이들을 만나게 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시각 장애 아이들이 미술을 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 필요한지 여전히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각 장애 학생들과 오랫동안 미술 수업을 해 오셨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미술은 누구나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행위인데, 시각 장애인이 미술을 하는 것에 대해 새삼스레 놀라워하는 것은 아마 미술은 시각 예술이라고 배웠기 때문일 거예요.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그런 편견으로 인해 시각 장애인들은 이미지를 배우고 표현하는 기회가 적었지요. 그러나 일단 기회가 주어지자 그들도 이미지 표현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들의 표현력이 또 하나의 예술적, 학문적 자극이 된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었지요. 미술 시간은 삶과 이어지는 이미지를 배우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예술가로서 이미지 시대에 시각 장애 학생들이 이미지를 경험하는 기회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작가님의 작품 중에도 『코 없는 코끼리』가 유명하지요. 작가님께 코끼리는 어떤 의미일지요?
『코 없는 코끼리』는 600여 년 전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코끼리의 서사가 배경이 된 작품입니다. 낯선 동물이란 희귀성을 권력의 상징으로 이용하는 정치 외교적 역사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지요. 한반도 첫 번째 코끼리는 그런 목적으로 희생된 동물 디아스포라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코 없는 코끼리』 작품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코끼리에게 가장 중요한 권력인 코가 사라지면 더 이상 코끼리가 아닌 것인가?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이 사라진 후 우리의 눈은 무엇을 향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코 없는 코끼리』 작품을 본 모든 관객들은 그것을 코끼리라고 단박에 알아봅니다. 전형적인 코끼리 형태가 아님에도요.
저에게 코끼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 당연하다 생각한 것들을 다시 질문하는 작업의 메타포입니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