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여행 작가들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을까요? '여행'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주제로 듣는 이야기.
“불교가 국교라 살상이 금지되었다면 너는 벌레도 안 죽여?”
“나에게 그다지 큰 피해를 주지도 않는 생명체를 꼭 죽일 필요는 없지.”
“자연을 아껴도 그렇지 터널이 없는 게 말이 돼? 이렇게 산을 한참동안 돌아가야 하잖아.”
“우리는 조금씩 불편하면 되지만 자연은 계속 불편할 테니까.”
“흡연이 금지된 나라는 태어나서 처음이야.”
“건강을 지키지 못하면 다른 건 지킬 필요가 없잖아.”
부탄의 베테랑 여행 가이드 ‘다와’와 함께한 일주일은 문답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오지랖을 떨며 우문을 던지면 다와는 언제나 밝게 웃으며 현답을 건넸다. 다와의 주옥같은 대답을 들을 때면 그가 득도한 신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끊임없이 철없는 질문을 던진 건 그만큼 부탄의 문화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여행한 나라 중 문화적 독창성으로 따진다면 2등과의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큰 1등이었다. 아주 모범적인 괴짜라고나 할까? 세상에나 마상에나 양보와 배려가 일상인 덕에 신호등이 단 한 개도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으며 낚시와 사냥을 비롯해 도축과 벌목(!) 등 생명을 해하는 모든 행위가 금지된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국민의 건강을 위해 흡연도 법으로 금지시켰단다. 더욱이 국민의 삶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은 돈이 아니라 행복이 되어야 한다며 전 세계가 오로지 경제적 통계 GDP(국내총생산)로 국가의 등급을 매길 때 GNH(Gross National Happiness, 국민행복지수)를 고안해 국가 정책의 기초로 만든 것이 부탄이다. 부탄이 ‘행복의 나라’라 불리는 건 과장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오로지 자유 배낭여행만 추구했던 내가 가이드와 동행하고 있는 이유도 GNH 때문이다. 무분별한 관광이 시작되면 잘 보존되고 있는 국가의 문화와 환경이 훼손되기 마련인데 이 역시 거시적으론 국민 행복의 해가 된다는 명목 하에 부탄은 개별 여행이 금지된 국가다. 고로 매일 환경 부담금조로 돈을 지불하며 국가 공인 가이드와 여정을 함께해야 한다. 국민의 행복을 위해 관광 수익까지 포기하다니 기가 막힐 정도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나라이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유람보단 다와와 수다를 떠는 것이 내겐 더 흥미로웠다. 물론 부탄의 풍광이 별로라는 뜻은 아니다. 해발 900미터 높이의 절벽 끝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탁상 곰파’ 사원은 지금껏 100여 개국을 떠돌며 마주한 종교 건축물 중 최고로 인상적이었다. 각 도시마다 품고 있는 ‘종’(Dzong)도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종은 해당 도시의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관장하는 부탄만의 고유한 건축물로 꼼꼼하게 새겨진 전통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다. 정말 운 좋게 만난, 1년에 딱 3일만 열린다는 부탄 최대의 축제인 ‘체추 축제’도 매력 만점이었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뒤부터 다와는 부지런히 자신의 나라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명소들로 나를 안내했다. 유창한 영어로 상세한 안내와 통역도 잊지 않았다. 잠자는 시간을 빼곤 늘 길 위에서 붙어있었기에 짧은 시간 동안 정도 많이 들었다. 일주일이 어떻게 갔는 지도 모를 만치 풍성한 여정을 마친 뒤 다와와 나는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이번엔 만남이 아닌 이별의 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농담을 섞어가며 하하호호 수다를 떨다가 문득 헤어질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지난 일주일간 그랬듯 마지막 우문을 다와에게 던졌다. 마지막 숙제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질문이었다.
“부탄에서 화를 내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이 없어. 모두가 늘 친절하고 따뜻했어. 소문대로 부탄은 행복의 나라처럼 느껴져. 그래서 너도 정말 행복해?”
어쩌면 부정의 답변을 듣고 싶기도 했다. 한국에서 ‘행복’은 제법 뜬구름 같은 이야기라 ‘부탄 사람도 다 똑같지. 행복해지려고 아등바등이야.’ 류의 대답이 나오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와의 대답은 역시 나의 예상치를 한참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행복은 스스로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만으론 행복해지기 어려워.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어.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노력한다면 행복은 자연스레 따라오지.”
짧은 한 마디였지만 강렬했다. 그 말을 들으니 왜 부탄 사람들이 서로에게 친절하고 상냥한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보통 행복을 받는 주체로 자신 스스로를 생각한다. ‘나는 뭘 해야 행복할까?’,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엄마는 뭘 하면 행복해할까?’, ‘저 친구는 어떤 순간이 가장 즐거울까?’라고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당장 나의 즐거움이 우선일뿐 가까운 존재에게 웃음을 안기기 위해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다와의 몇 마디는 묵직했다. 미세한 부끄러움이 들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가거든 주변 사람들을 많이 웃게 만들어 봐. 가족을 행복하게 해줄 방법을 먼저 찾아봐. 그럼 너는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거야.”
다와가 현명하게 대화를 종결시켰다. 곱씹어보니 당연한 얘기였다. 앞으로 행복의 주체는 내가 아닌 모두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와는 끝까지 현답의 장인이었다. 그와 가볍게 포옹을 나누며 부탄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부탄에서 얻은 게 많아서일까 아니면 다시 오기 힘들 거란 생각이 들어서일까. 보통 한 나라를 떠날 땐 시원섭섭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는데 부탄을 떠날 땐 섭섭하고 아쉽다는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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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여행 작가)
20년간 100여 개국 약 700개 도시를 여행한 베테랑 여행자다. EBS <세계테마기행>, <한국기행>, <한국의 둘레길>, KBS <아침마당>,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외 다수의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각국의 관광청과 협업하는 등 흥미로운 이력을 가졌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한 '이달의 걷기길', '아름다운 자전거길' 선정에 참여했고 론리 플래닛 코리아, 한국공항공사 사보 등 80여 개 매체에 글을 기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