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도 빛 한 조각 들지 않을 것처럼 어두운 방. 두꺼운 암막 커튼을 등진 한 여성이 천천히 걸어와 문을 잠근다. 그렇게 시작되는 노래를 배경으로 각자의 고립에 놓인 이들의 모습이 차례로 그려진다. 이상할 정도로 텅 빈 지하철 칸에 혼자 앉아 있던 여자는 사람으로 가득 붐비는 다음 칸을 창문 너머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물 자국이 난 곰 인형을 끌어안고 나만의 공간에 갇힌 여자를 지나 다음은 철망 앞에서 한참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 여자다. 스모그처럼 낮게 깔리던 신시사이저 연주 위로 곧 비트가 더해지고, 다리 위에 서 있던 여자는 후드를 뒤집어쓰곤 무언가 결심했다는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다. 그리고 노래가 흐른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 내 안의 들려오는 / 목소리를 따라갈래 / 그래도 I choose me / 날 믿어볼 수밖에 I bet on me
그룹 있지가 미니 앨범
이제는 4세대 케이팝의 중심에 자리 잡은 '나'는 사실 있지의 출발에 많은 빚을 진 단어다. 이들의 데뷔곡 '달라달라'(2019)는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처음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통통 튀어 오르는, '나'로 만든 파스텔 스프링 같은 노래였다. '달라달라' 속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내가 처음 만난 '나'는 4년 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케이팝이라는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려 무럭무럭 자라 누구보다 튼튼한 몸통과 무성한 가지를 만들었다. '나'를 내세우지 않는 여성 그룹이 오히려 드물어진 지금을 생각하면 곡의 시작에서 끝까지 난 특별하다고,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고, 내 맘대로 살 거라고 폭발하듯 여성 그룹이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정말이지 전생만 같다. '남'과 다른 '나'에 주목한다는 태생적 한계가 주는 아쉬움은 개성 넘치는 있지 멤버들의 매력과 무대 장악력으로 점차 희미해져 갔다. 마음과 목소리를 모아 나를 노래하기 시작한 동 세대 여성 그룹의 변화도 이들의 '나' 선언에 큰 힘을 보탰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사이 마피아 게임에도 들어갔다가, 스니커도 갈아 신었다가, 그냥 너의 느낌을 믿으라는 권유도 해보던 있지가 다시 자신들의 원류와도 같은 '나'로 돌아온 건 무척 반가운 일이다. 'BET ON ME' 속에 존재하는 건 나와 나를 제외한 온 세상, 그 둘뿐이다. 내 주위로 둥글게 그어진 선 밖은 온통 캄캄하다. 내가 그었는지 세상이 그었는지 모를 그 선 밖의 세상을 생각하면 아직은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언제부터 혼자였는지도 모를, 어쩌면 처음부터 혼자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릿속에 흐릿한 빛이 비친다. 저 멀리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호기심이 두려움을 앞지르는 순간, '펑' 하고 신호탄이 울린다. 내가 나를 택했다고, 나에게 한 번 걸어보겠다고, 어차피 떨어질 용기 없이 절대로 날 수 없는 것 아니겠냐고. 내딛는 발에 실린 무게가 그 언제보다 묵직하다.
이러한 변화가 어딘가 익숙하다면, 아마 트와이스의 'Feel Special'이 떠올랐을 가능성이 크다. 'Feel Special'은 데뷔 후 줄곧 노래 너머의 누군가에게 목마른 사랑의 시그널을 보내던 트와이스가 비로소 '지금'을 나누고 있는 '우리'로 시선을 돌린 노래다. 노래는 트와이스가 당시 주로 어필하던 팬층을 넘어 좀 더 넓고 보편적인 이야기에 공감하고 싶어 하는 다양한 음악 팬에게까지 가 닿았다. 공교롭게도 있지의 'BET ON ME'는 트와이스의 'Feel Special'은 닮은 부분이 많다. 우선 두 그룹 모두 JYP 엔터테인먼트 소속이고 각각 데뷔 5년 차에 발표한 곡이다. 이외에도 작사가가 기획사 대표인 박진영으로 같은데, 멤버들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했다는 비하인드도 동일하다. 유쾌 상쾌 통쾌 그 자체였던 각 팀 대표곡과 달리 서정성을 진하게 녹여냈다는 점도 흡사하다. 비록 타이틀 곡은 아니지만 'BET ON ME'가 그룹 트와이스의 후반전을 탄탄하게 뒷받침해 준 'Feel Special'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보는 이유다. 우선 시작이 좋다. 있지가 'BET ON ME'로 찾은 나는 고생스러운 적응기가 필요 없는 다시 찾은 나이기 때문이다. '기죽지 마 / 절대로 고개를 들고 / 네 꿈을 좇아(달라달라)' 소리 높여 외치던 바로 그 '나' 말이다. 한동안 잊고 있던 있지의 '나'는 여전히 그 자리였다. '나'를 바라보는 시점만 완전히 바꾼 채, 있지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몸도 호흡도 무척이나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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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