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대중문화 > 김윤하의 전설이 될 거야
혼자서도 잘해요 : 에스파 'SPICY'
또 다른 세계로
초월적 세계관은 <MY WORLD>에서는 오로지 글리치(glitch)로써만 존재한다. 이 독특한 정전기가 우습지만은 않게 보이는 건 앨범의 첫 곡 'Welcome To MY World (Feat. nævis)' 같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가기 위한 가교 역할을 하는 잘 짜인 트랙의 공이 크다. (2023.05.25)
2023년 상반기 케이팝 신을 가장 떠들썩하게 만든 이슈는 SM 엔터테인먼트를 둘러싸고 벌어진 카카오와 하이브의 경영권 분쟁이었다. 아직 한 달이 남았고 하루걸러 하루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케이팝 마을이지만, 아마 이보다 거센 폭풍을 몰고 올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얽히고설킨 세 기업의 주가와 케이팝의 미래,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 놓인 SM과 '케이팝의 아버지'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의 평판까지 하늘과 땅 사이를 여러 차례 오가게 만들었던 해프닝은 결국 진통 끝에 카카오가 경영권을, 하이브가 플랫폼을 취하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천문학적인 숫자와 눈에 보이지 않는 이권 다툼까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음에도 이 정도면 평화로운 마무리가 아닌가 한숨 돌리는 그곳에 여덟 명, 아니 네 명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룹 에스파다.
그룹에서 솔로까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씬에서 손꼽히게 다채로운 카탈로그를 보유하고 있는 SM에서도 에스파는 유독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2020년 11월 데뷔로 SM 현역 그룹 가운데 가장 막내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은 그러나 음악과 콘셉트에 있어서만은 SM의 분홍빛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순수 혈통의 위치를 누구보다 확실하게 꿰찬 이들이었다.
데뷔 당시부터 큰 화제였던 케이팝과 메타버스의 적극적인 결합은, 겉으로 보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엔터테인먼트의 발 빠른 움직임으로 보였다. 그러나 에스파의 내부는 실은 지금까지 SM을 통해 데뷔한 그 어떤 그룹보다 치밀하게 레이블이 추구해 온 세계관을 이행하기 위한 스케줄 표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동안 H.O.T, 동방신기, 엑소 등 보이 그룹이 이어오던 SM 특유의 심오하고 철학적인 SMP 형식은 '네오'로 거주지를 옮긴 NCT가 아닌 에스파로 전이되었다. 데뷔 싱글 'Black Mamba'에서 최근작 'Girls'까지 작사, 작곡, 편곡에 살아 있는 SM 음악의 역사 그 자체인 유영진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십 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S.E.S.의 'Dreams Come True(1998)' 뮤직비디오나 H.O.T.의 '평화의 시대’(2000)'를 연상시키는 SM 특유의 SF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미지는 에스파에 이르러 2020년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세기말을 의식한 레트로의 인기가 좀처럼 식을 줄 모르는 세상 속에서 에스파는 자신들이 뿌리를 둔 SM 레트로의 공식을 누구보다 충실하게 이행했다.
<MY WORLD>는 그렇게 태생부터 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레거시와 자기장이 갑작스레 사라진 자리에 자신들만의 색을 채워 넣어야 하는 얄궂은 운명을 타고난 앨범이었다. 여기에 앞서 서술한 소속 레이블 문제로 인해 꼬리표처럼 붙은 포스트 — 이수만, 포스트 — 유영진 시대에 대한 각종 호기심이 덤으로 얹혔다. 어떻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 대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케이팝에서는 이미 닳고 닳은 이미지로 알려진 아메리칸 하이틴이 에스파의 (적어도 이번에는 사라진) '광야'를 대신 채웠다. 여기에 데뷔 후 2년 반 동안 그룹이 쌓아온 세계관과 성장한 실력이 에스파만의 엣지를 더했다. 아바타, 나비스, 블랙 맘바, 싱크 등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물음표 얼굴에 쉬지 않고 공격받았던 에스파의 초월적 세계관은 <MY WORLD>에서는 오로지 글리치(glitch)로써만 존재한다. 이 독특한 정전기가 우습지만은 않게 보이는 건 앨범의 첫 곡 'Welcome To MY World (Feat. nævis)' 같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으로 가기 위한 가교 역할을 하는 잘 짜인 트랙의 공이 크다. 타이틀 곡 'SPICY'는 어떤가. 많은 이들이 우려한 유영진의 난 자리는 SM 발매 곡에서 자주 만나오던 단골 작가들의 손 아래 레이블과 그룹 색깔을 잘 조합한 능숙한 결과물로 채워졌다. 아는 맛이지만 새로운 맛이 느껴지는 데 멤버들의 공이 크다는 점도 주목하고 싶다. 짧지 않은 시간 시공을 초월하는 콘셉트에 매몰되어 있던 멤버들은 후렴구 멜로디에서 물씬 풍기는 뜨거운 여름 공기와 함께 한 사람씩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비로소 에스파가 홀로 섰다. 이제야 문을 연 이들의 새로운 세계가 전보다 더 궁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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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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