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르세라핌과 용서받지 않을 공식
은 르세라핌의 비관습적인 지향점이 어떻게 음악적으로 구체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지난 1년간 발매한 두 장의 미니 앨범에서 몇 곡을 가져와 재수록한 것이 5곡인데, 그중 인트로-인털류드 성격인 트랙이 두 곡이나 된다.
글ㆍ사진 미묘(대중음악평론가)
2023.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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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 평론가 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칼럼이 격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최신 이슈부터 앨범 패키지에 담긴 이야기까지 지금 케이팝의 다채로움을 전합니다.



르세라핌의 첫 스튜디오 풀렝스 앨범인 에 관하여, 한 멜론 사용자는 방시혁 하이브 의장을 향해 이런 댓글을 남겼다.

"제발. 르세라핌은 보이그룹이 아니다. 걸그룹이다."

이 앨범과 르세라핌의 지향점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는 정곡을 드러내주는 말이다. 르세라핌은, 시각에 따라, 보이-걸로 양분되던 케이팝 시장의 관습을 비트는 면들을 보여왔다. 단적으로, 구체적인 목표 지점을 제시하지는 않으면서 '아무튼 위로 오르겠다'는 포부를 쏟아내는 것은 보이그룹에 한정된 클리셰이기도 했다. 'ANTIFRAGILE' 같은 곡의 태도와 목소리는 분명 뒷짐을 지고 허리를 숙이며 상쾌하게 미소짓는 걸그룹처럼 보이지는 않는, 시장에서는 '비호감'으로 여길 만한 것들을 과감히 채택하고 있기도 했다. 물론 '근본 없음'이 유일한 근본인 케이팝 세계다. 이때 '관습에의 도전'은, 팔리지 않기에 관습 밖에 있던 것들을 어떻게 팔릴 수 있도록 하는가다.

은 르세라핌의 비관습적인 지향점이 어떻게 음악적으로 구체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지난 1년간 발매한 두 장의 미니 앨범에서 몇 곡을 가져와 재수록한 것이 5곡인데, 그중 인트로-인털류드 성격인 트랙이 두 곡이나 된다. 'The World Is My Oyster'와 'The Hydra'가 그것이다. 내레이션으로 자못 웅장한 메시지들을 읊는 이 트랙들은 분명 매우 인상적이지만, 케이팝 퍼포먼스가 이뤄지는 '노래'의 구조를 내던진 인스트루멘탈에 가까운 곡들이다. 이들과 기존의 히트곡들, 그리고 또 하나의 인털류드인 'Burn The Bridge'까지 거쳐 8번 트랙에서야 타이틀 'UNFORGIVEN(feat. Nile Rodgers)'가 등장한다. 익숙한 히트곡들이 주는 안정적인 흥분과 규칙적으로 삽입되는 인털류드들은 제법 긴 이야기를 요약적으로 담아내며 이번 에피소드의 본론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보여준다.

그렇게 끌어올린 긴장이 9번 트랙부터 두 종류로 나뉘는 새로운 챕터로 넘어간다. 상쾌하고 씩씩하고 다정한 트랙들은 "모험이 너와 나를 부르니까", "거짓말이었던 rules" 같이 통념적으로 '보이그룹적'이라 할 수도 있을 르세라핌 서사를 눈에 띄게 담고 있다. 전작들도 이따금씩 갑자기 달콤해지고 다정해지는 대목들이 다소 의아함을 주기는 했다. '이것 또한 르세라핌의 자연스러운 입체성 중 하나!'라고 주장하지 않고는, 르세라핌의 새로움이라는 상자 안에 아주 설득력 있게 담기는 데에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사를 통해 좀 더 명시적으로 연결점을 마련한 'No-Return(Into the unknown)'이나 '피어나(Between you, me and the lamppost)'는 훨씬 자연스러운 흐름을 그려낸다.

또한 그 사이사이에서, 10번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와 마지막 'Fire in the belly'가 암약하며 지난 인털류드들과 타이틀곡들의 음악적 유전자들을 봉합한다. 대중음악 서브컬처의 공격성과 묵직한 음울함, 패셔너블한 유려함이, 독기 어린 날카로움과 난폭함 속에 드문드문 깔리는 '페미닌'이라는 조합으로 르세라핌의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그것은 판타지이기보다는 현대적인 공간에서, 절절하게보다는 '고급스러운' 질감으로 이뤄진다. 그러니 르세라핌이 일견 보이그룹을 참조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갱단이나 (판타지적 의미의) 중세 전사, 해적 같은 형태로 구현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타이틀 'UNFORGIVEN'을 음원만으로 감상할 때는 프리코러스가 의외로 나긋나긋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이런 대목이 종종 매우 감성적으로 연출되기도 하는 건 후렴으로 이어지는 감정선의 진폭을 위해서다. 그런데 'UNFORGIVEN'의 프리코러스는 부드럽게 물러서는 듯하지만 주저앉거나 멈춰서지는 않아서, 'ANTIFRAGILE'이 '훨씬 용서 없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다만, 드라마타이즈와 짧은 인서트 모티프를 통해 새롭게 긴장을 다지며 들어서는 후렴의 자극은 분명 모자람이라고는 없다. 특히, 후렴 초반의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장난끼마저 어린 안무는, 비장한 결기 뒤에서 ('ANTIFRAGILE'에서도 들렸던 바로 그) 어쩐지 얄밉기도 한 생기를 잘 표현해낸다. 그것이 르세라핌 캐릭터를 주조하는 또 하나의 음악적 장치다.

앨범은 세 종류의 포토북 버전과 다섯 종류의 컴팩트 버전, 그리고 두 종류의 '위버스 앨범' 버전으로 발매됐다. 인물이나 오브제가 아니라, 찢기고 불타고 그을린 종이라는 텍스처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보니, 서로 다른 버전의 패키지를 나란히 놓았을 때 퍼즐처럼 서로 이어지는 점도 근사하다. 비교적 활기찬 모습의 멤버들이 부서진 브라운관이나 확성기 등의 소품과 긴장을 일으키는 'Dewy Sage' 버전이 보다 케이팝 아이돌 같은 느낌이라면, 'Bloody Rose' 버전은 안대, 활, 날개, 장미, 헤드폰, 상처 등 뮤직비디오에서도 많이 등장한 소품들과 함께 탐미적인 서브컬처 기호를 쏟아낸다. 반면 'Dusty Amber' 버전은 깃발, 말, 카우보이, 도검류 등 판타지적인 소재가 현대적 도심에 위치하면서 초현실주의적인 충돌을 보여준다. 세 가지 모두, 앨범에 담긴 르세라핌의 '보이그룹이 아닌' 특이성의 구성 요소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하지만 'UNFORGIVEN'이 구현하고 있는 세계의 본론에 가장 가까운 것은 역시 'Dusty Amber' 버전일지도 모르겠다.



LE SSERAFIM - 1st Studio Album 'UNFORGIVEN' [COMPACT ver.][버전 5종 중 1종 랜덤 발송]
LE SSERAFIM - 1st Studio Album 'UNFORGIVEN' [COMPACT ver.][버전 5종 중 1종 랜덤 발송]
르세라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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