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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잊은 듯한 세계관의 빌리
환상과 현실 사이의 유노이아
'EUNOIA'는 일렉트로스윙의 맥락에 위치한 펑키한 리듬과 아기자기한 편성이 신선하게 비트를 밟고, 간단하면서도 산뜻한 멜로디와 함께 달콤함과 우아함과 씩씩한 기세가 효과적으로 교차한다. (2023.04.05)
대중음악 평론가 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칼럼이 격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최신 이슈부터 앨범 패키지에 담긴 이야기까지 지금 케이팝의 다채로움을 전합니다. |
빌리(Billlie)의 세 번째 미니앨범 <the Billage of perception: chapter three>와 타이틀곡 'EUNOIA'에는 산뜻함과 단호한 생기, 그리고 우아한 그루브가 가득하다. 'EUNOIA'는 일렉트로스윙의 맥락에 위치한 펑키한 리듬과 아기자기한 편성이 신선하게 비트를 밟고, 간단하면서도 산뜻한 멜로디와 함께 달콤함과 우아함과 씩씩한 기세가 효과적으로 교차한다. 특히 곡의 백미라 할 것은 2절 이후인데, 브리지와 랩, 댄스브레이크로 50초에 달하는 23마디에 걸쳐 듣는 이를 이리저리 휘몰고 다닌다. 그러나 이 휘황찬란한 롤러코스터의 끝에서도 일말의 망설임이나 혼란도 없이 후렴으로 되돌아올 때의 짜릿한 안착감은 결코 보기 드문 것이다.
2000년대 초를 연상시키는 디지털카메라, 사진과 영상 등 기록물, 매우 현실적 공간에서 춤추는 소녀들과 같은 뮤직비디오의 장면들은, 레트로와 스마트폰이 교차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탐하는 최근의 일련의 경향(그렇다, 뉴진스라든지)과의 접점도 엿보인다. 다만 빌리가 하이틴 주인공의 미스터리 판타지를 세계관으로 진행해 왔기에 얄팍해 보이는 기색은 없다. 차라리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의 질감에서 한국의 현실 고등학생으로 넘어오는 것이 의외라면 의외다. 그러나 케이팝의 대표적 시각요소이자 딜레마인 교복이 그 찜찜함을 덜어낼 수도 있는 맥락과 접근을 생각해보게 하는 비디오이기도 하다.
빌리의 얼굴을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린 것은 작년 초 'GingaMingaYo(the strange world)'의 히트였지만, 이들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세계관'이다. 케이팝이 세계관을 사용하는 방식을 살펴보자면 '청춘', '성장' 등 시간의 흐름과 결부되는 서사의 틀 위에서 다양한 감정이나 테마를 다루는 이들도 있고,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구체적인 스토리를 구축해 놓고 작품마다 그 일부를 떼어 보여줌으로써 궁금증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빌리는 서사 속에서 멤버들이 각각의 인물로서 뚜렷이 구분되지는 않지만 후자에 가깝다. 그러나 서사와 관련한 상징들을 여기저기 흩어놓으며 멤버별 상징색이나 동물을 지정해 방탈출 카페의 단서들처럼 이를 해석하게 하는 일련의 흐름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있다.
빌리의 겉이 세계관이라면, 내부에는 이를 일견 과감할 정도로 배반하는 이면을 갖는다. 마치, 상징주의풍의 커버를 펼치면 이미 시각적으로도 전혀 무관해 보이는 현실 인간인 멤버들의 포토북으로 직행하는 이 미니앨범의 패키징과도 같다. 무표정하게 종종 카메라를 직시하는 얼굴들이 일견 달콤한 러브송 같기도 한 'EUNOIA'의 가사와는 생경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세계관 서사를 창조적 제약이자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은 트렌드와도 일치하고, 결국 성년 이전과 이후의 괴리라는 테마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도 빌리를 큰 그림의 일부로 이해하게 한다. 하지만 종종 뮤직비디오와 가사가 서사와 얼마나 강력하게 연관돼 있느냐를 완성도의 증빙처럼 여기기도 하는 경향에서는, 빌리는 사뭇 느슨하다. 'EUNOIA'의 뮤직비디오는 사실 세계관 속 스냅샷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인트로와 아우트로의 짧은 시퀀스나 AR처럼 구현된 올빼미의 존재감 정도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서사를 별로 진행시키지도 않고 구석구석에서 의미심장한 단서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싱글 등 번외작으로 발표하는 게 공식처럼 자리잡은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물론 너무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서 나중에야 무릎을 치게 하는 요소들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은 있겠다) 다만, 지금까지 빌리를 세계관에 몰두하는 아이돌로 알려지게 한 것은 별도의 영상물이나 심지어 OST 앨범까지 발매하는 기획에서 보충된 성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빌리의 진짜 매력이다. 매번 빌리의 곡과 음반은 세계관과 거의 완전히 무관하게 즐길 만한 것들이다. 세계관 속 미스터리의 핵심인 실종인물 빌리 러브(Billlie Love)를 호명하거나 조금 수수께끼 같은 상징 표현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파편화된 언어를 마구 던져대는 것이 일반적인 미학인 케이팝 가사의 세계에서 청자들은 이미 사소하게 마음에 걸리는 단어들을 건너뛰고 듣는 데 익숙하다. 무엇보다 세련되고 촘촘한 프로덕션이 음악적으로 충실 그 이상을 들려준다. 텐션과 불협을 과감하게 흩뿌리는 화성과 취향 좋은 그루브는 플레잉 타임 내내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을 제공한다. 섹션의 전환은 물론이고 수시로 의외성을 던져주는 진행은 곡의 흐름을 수시로 비틀고 풀어내면서 놀라운 집중력을 이끌어낸다. 어느 한 순간 그냥 흘려버릴 만한 대목이 없고, 갑작스레 칼로 자르듯 마무리되는 마지막 곡 'nevertheless'는 자연스럽게 1번 트랙으로의 반복을 부른다. 이 느슨한 콘셉트 앨범 같은 작품은 (미니)앨범 단위의 청취에 방점을 두고 있고, 이를 유도하기 위해 음악적인 기량 이외의 어떤 것도 들이밀지 않는다. '어떤 세계관/스토리일까?'하는 궁금증은 음악적으로 매료된 뒤에 따라와도 충분하다는 듯이. 청자가 빌리를 '세계관에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시점은 거기다. 또한 세계관의 그러한 활용법이, 빌리가 세계관에 '정말로 진심'임을 깨닫게 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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