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얼룩 개를 기른다고요? 정이현 소설가에게 어느 날 찾아온 강아지, 그 작은 돌봄과 애쓰는 마음을 연재합니다.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강아지, 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서로 적응해가는 이야기, <채널예스> 격주 월요일을 기대해주세요. |
바둑이가 온 후 나는 평화란 고요함, 즉 아무 일 없음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어린 개와 함께하는 하루하루, "일상은 평화롭다"는 말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땐 참 평화로웠었지"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인간이 되었다. 과거형에는 필연적으로 회한의 뉘앙스가 묻어난다. 지금은 사라진 것, 희미하게 흔적만 남아있는 것을 추억할 때의 아득함과 달콤함이 있다. 꿈속에서 입맛을 다시다 보면 너무 금방 깨어났다.
현실에서는 심심할 틈이 전혀 없었다. 놀랍게도 매일 새로운 이벤트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탈에서 빠른 속도로 회복한 바둑이는 왕성한 식욕과 비례하는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집 안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킁킁 냄새를 맡고 다니다가 신기하게 생겼다 싶은 건 일단 입에 넣어보았다. 미지의 물건을 자발적으로 입속에 넣은 이상 그걸 잘근잘근 물어뜯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바둑이가 물어뜯는 것들의 종류는 다양하기도 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치운다고 열심히 치워도 바둑이의 시각에 포획되는 것들은 참으로 달랐다.
때는 초겨울. 미리 준비해둔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을 바둑이는 끈기 있게 탐색했다. 반짝이며 흔들리는 모든 오너먼트들이 녀석의 관심 대상이었다. 특히, 전구 모양의 원형 볼은 바둑이의 큰 사랑을 받았다. 바둑이는 틈만 나면 점프를 시도하여 그것들을 탈취하려 했다. 마치 한 마리의 작고 기운찬 토끼처럼 말이다. 또한, 큰 트리 앞에 앙증맞게 서 있는 루돌프 사슴 모양의 작은 트리에 대한 녀석의 집착도 대단했다.
"혹시 진짜 사슴인 줄 아는 거 아니야?"
"쟤가 사슴을 어떻게 알아. 친구 강아지인 줄 아는 것 같은데."
아이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루돌프를 대하는 바둑이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사냥감을 대하는 것인지 친구를 대하는 것인지 장난감을 대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때론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라도 만난 듯이 진심을 다해 그 딱딱하고 차가운 사슴과 (홀로) 대적하기도 했다. 가만 있는 루돌프에게 다가가 괜히 빙빙 돌다가 혼자 공중으로 뛰어올라도 보았다가 이내 쓰러뜨리고는 마음껏 냄새를 맡고 이빨로 물어대는 바둑이는 어쩐지 의기양양해 보였다.
"쟤는 뭘 저렇게 자꾸 뛰어올라."
우리는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곧 닥쳐올 일을 알지 못한 채. 바둑이의 점프가 인간을 향하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둑이는 곧 사람에게 무한 점프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어른, 즉 나와 E가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중 하나라도 제 시야에 등장하면 바둑이는 질주했다. 빠르게 달려가서 따라잡은 후 그 앞으로 휙 뛰어올랐다. 반가워서 그런다고 하기엔 뭐랄까 너무 격렬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다. 바둑이의 입과 이빨이 그 오해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 뛰어오르면서 동시에 입을 활짝 벌리면 사람의 몸에 강아지의 이빨이 부딪히게 된다. 점프력이 좋을 때는 허벅지, 조금 떨어질 때는 종아리. 물론 강아지가 사람을 문다거나 사람에게 입질한다는 등의 손쉬운 표현이 있지만 나는 차마 그렇게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확실히 강아지가 작정하고 '무는' 행위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반갑다고 달려와 점프하고 입을 벌려 이빨을 부딪치는, 그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에서 바둑이에게 고의가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믿고 싶었다. 얼마 전 집에 다녀간 훈련사가 "나무가 되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흥미를 잃고 가버리는 게 강아지들의 속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바둑이가 크리스마스트리를 가장 좋아하는 강아지임을 간과했다. 인간이 그 자리에 멈춰서 나무인 척하는 행동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 제지도 하지 않으니 더욱 팔짝팔짝 뛰어올라 신나게 여기저기 이빨을 가져다 댔다.
예방 접종을 하러 갔을 때 수의사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그는 바둑이의 입안을 보고 아주 빨리 결론을 내려주었다.
"엄청 가렵겠는데요."
퍼피의 이갈이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강아지의 유치는 생후 12주 정도에는 다 나온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28개 정도였다. 바둑이는 이미 유치가 다 난 상태였고, 이제 본격적으로 유치가 빠지고 새 이가 돋는 과정이 이어질 거라는 설명이었다.
"아, 그렇군요."
나는 멍한 상태에서 그 말을 들었다. 육아를 하던 시절부터, 일반적인 숫자는 얼마라는 식의 말 앞에 서면 별수 없이 간이 콩알만 해지곤 했다. 그 '정상적인 발달의 범주' 안에 들지 못하면, 혹시라도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가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안해서였다. 그런데 '유치'란 어차피 한번 갈아야 하는 이빨이니 개수가 좀 모자라거나 많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바둑이 행동의 원인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오해하지 않아도 되어서.
"선생님, 그러면 이 시기도 지나가지요?"
나는 물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을 것이다.
"그럼요."
의사가 대답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보호자님,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아이가 훨씬 안정감이 생기고 편안해 보이는데요."
"네? 그럴 리가요."
"노력을 많이 하셨나 봐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아이도 굉장히 노력을 하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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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파랑새증후군
2023.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