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사랑도 개발이 되나요? - <사랑의 고고학>
<사랑의 고고학>의 감흥을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용기를 준다고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영향 아래에 있어도 괜찮다. 생산적인 극복, 통렬한 복수, 깔끔한 탈피 같은 것은 하지 못해도 괜찮다.
글ㆍ사진 김소미 <씨네21> 기자
202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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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사랑의 고고학> 포스터

시작한다, 계속한다, 끝낸다. 연애를 행위의 개념으로 묘사한다면 이 세 개의 동사가 대체로 권력을 쥐고 있다.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상태가 동반하는 감정에 대해서도 자주 논의된다. 사랑이 싹트는 관계의 설렘과 긴장, 안정된 관계의 편안함, 그리고 끝나버린 연애의 상실감이나 허무함 같은 것 말이다. 이런 서술들을 보고 있으면, '사랑'이란 것이 하나의 독자적인 생명체로 실존해서 우리가 그것을 현행적으로 주고받기라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관계가 끝나서 사랑도 고통스럽게 죽어버리면, 사람들은 애도하고 장례를 치른 뒤 새 감정을 생산하고 교환하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다시 시작한다, 계속한다, 끝낸다. 이 시대에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것은 사랑의 경제학이다.

그런데 그럴 리가. 사랑이 죽으면 그것을 우리 외부에 묻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묻히는 자리가 우리 자신일 것이다. 작가 이승우가 『사랑의 생애』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랑은 차라리 기생충에 가깝다. 그리고 <사랑의 고고학>을 만든 이완민 감독은 그 관계를 숙주-기생 생물이 아니라 토양-유물의 관계로 치환해 바라본다. 나라는 비옥하기도 하고 황폐하기도 한 이 땅에 묻혀있는 누군가의 흔적에 관해서, 그것을 조심스레 발굴하고 들여다보는 긴 시간에 대해서 영화는 차분히 읊조린다. 그 어조는 늘 머무는 자리에 홀로 앉아서 평생의 기억을 더듬는 식물의 말소리 같이 낮고 조용해서 듣는 이가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렇게 함께하다보면 <사랑의 고고학>은 기어코 함께 맞는 시원한 바람과 햇볕을 우리에게 내어준다.

이완민 감독은 데뷔작인 <누에치던 방>(2018)부터 관계의 지층학에 능한 고고학자의 자세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는 끈기 있는 제토의 과정과 같아서 함부로 과격하게 땅을 파내서도, 너무 듬성듬성 아무데나 헤쳐서도 안되는 집요함의 산물이다. 감독이 그려놓은 유구선(유물이 묻혀있는 구역을 표시한 흰색의 선) 안에는 10대 시절 절대적이었던 여자들의 관계(<누에치던 방>)가 묻혀있거나, 8년이라는 긴 연애의 제국이 멸망한 뒤 남은 유물들(<사랑의 고고학>)이 묻혀있다. 그리고 이 두개의 영화는 작업자들이 수시로 자리를 옮겨가며 땅을 파내듯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이탈해 기억의 덩어리 사이를 옮겨 다닌다. '조용하다'는 수식은 두 영화의 표면을 전달할 수는 있지만, 실상 오해에 가깝다. 순서나 논리에 맞지 않는 주관적 기억들을 기어이 낚아채 한 사람의 역사에 재편시키는 움직임은 차라리 대담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영화 <사랑의 고고학> 스틸컷

"내게도 행운이 있을 수 있을까?"

40살이 된 고고학자인 영실(옥자연)에게 우도라는 이름의 새로운 남자가 찾아온다. 영실은 상대에게 끌리면서도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이 고고학자가 새로운 관계에 '삽질'하려 할수록 8년 간 연애한 남자 인식(기윤)과의 기억이 돌뿌리처럼 턱턱 걸려대서다. 이완민 감독은 새 사랑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입에 넣었을 때 기억이 확 펼쳐지는" 기점으로 삼았다. 이후 산발적으로 소개되는 지난 연애의 사연은 얼핏 보기에 별 일 아닌 일들의 연속인 것 같지만, 들여다볼수록 사랑 앞에서 취약해진다는 것의 위험함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영실은 왜 새 연애에서 행운을 바라게 되었나. 과거에 영실은 짧은 원피스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연인의 분노를 사기도 하고, 지난 연애 상대가 알려지자 헤픈 여자라고 비난받았으며, 자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요구받았다. 이 폭력의 시간들은 사랑의 시간과 아주 태연히 동행하고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어느 하나로 깔끔히 잘라낼 수 없음이다. 필요하다면 라벨을 붙이는 일은 쉽다. 말하자면 가스라이팅 같은. <사랑의 고고학> 전체를 지난 연애의 트라우마라고 압축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고고학>은 하나의 경험을 하나로 용어로 압축하지 않기 위해, 영실의 경험을 영실의 것으로 두기 위해 존재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영실은 더 빨리 나쁜 관계에 저항하지 못했던 자신을 추궁하거나 피해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찾는다기보다, 그저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투명히 들여다보길 원한다. 나쁜 관계가 있었고, 그것이 자신에게 영향을 여전히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환상 없이' 인정하길 원한다.


영화 <사랑의 고고학> 스틸컷

<사랑의 고고학>의 감흥을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용기를 준다고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영향 아래에 있어도 괜찮다. 생산적인 극복, 통렬한 복수, 깔끔한 탈피 같은 것은 하지 못해도 괜찮다. 여성으로서의 겪은 불합리한 경험을 사회적 목소리로 환원하고 운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다. 혹은 나쁜 관계에 머물렀던 나의 '흑역사'를 재빨리 더 괜찮은 모습으로 덮어두지 않아도 괜찮다. <사랑의 고고학>은 한 사람의 인생에 과거-현재-미래의 사랑이 지층처럼 쌓인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고고학적이지만, 무엇보다 끊임없이 자기 인생에 개발의 역사만을 되풀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 고고학적이다. 평생 새롭게 갈아엎기만 하는 땅 위에 지어진 집은 겉보기에 심미적일지 몰라도, 우리는 언젠가 부실 공사된 그 집안에서 외로워지고 말 것이다. 그 안에 나 자신 마저 없으므로. <사랑의 고고학>은 조용한 시간, 낮은 목소리, 아주 느린 망각 속에서 사는 삶을 기꺼이 살아낸다. 내게 일어난 일, 내가 살아낸 시간, 그 속에서 내가 나답지 않았던 시간까지 끈질기게 발굴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붙잡혀 있지 말라는 말과 전혀 반대의 길을 감으로써 영실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영화의 말미에 영실은 기꺼이 좀더 혼자 있기로 한다. 관계에 실패한 이가 재빨리 다른 관계의 가능성을 증명하지 않고 홀로 있기를 택하는 일은 얼마나 후련한가. 시원한 바람 속을 관통해 걸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풍경삼아 흐르는 엔딩곡 '환상 없이'(이민휘 작곡, 이완민 작사)가 그런 날들의 온전함을 마지막까지 노래한다. 

"이제 나의 환상을 허무는 것은 너일까, 나일 수 있을까. 너에게 남겼던 그 무엇을 다시 가져올 수 있을까." 

두 발로 딛고 서서 환상 없이 살 수 있을만큼 강해지고 싶다는 이 노랫말의 의지는 가장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더욱더 홀가분해진다.

"강할 필요도 없이, 환상 없이."



사랑의 생애
사랑의 생애
이승우 저
위즈덤하우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저 | 김희영 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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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