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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문은 열려야만 한다 - <스즈메의 문단속>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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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내 힘으로 막을 수 없었던 상실의 경험은 몇 번인가. 가까운 이들을 포함한 무수한 타인들의 비극까지 더해 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접어보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생각했다. 애니메이션이 허락한 열렬한 문단속 의식 대신 현실의 우리는 무얼을 해야만 할까, 하고. (2023.03.10)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포스터

살면서 내 힘으로 막을 수 없었던 상실의 경험은 몇 번인가. 가까운 이들을 포함한 무수한 타인들의 비극까지 더해 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접어보았다. 재난의 시대에 숨쉬고 있는 우리 모두는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생각했다. 애니메이션이 허락한 열렬한 문단속 의식 대신 현실의 우리는 무얼을 해야만 할까, 하고.

부채감과 억울함은 친밀한 관계를 좀먹는 감정이다. 더 희생하는 사람의 마음과 더 미안해하는 사람의 마음이 만났을 때 애정은 곧잘 애증으로 뒤바뀐다. 연인이나 모녀 관계에서 되풀이되는 이 고약한 부등식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이모와 조카가 이룬 단촐한 가족 공동체 안에서도 재현된다. 평범한 고등학생 스즈메와 직장인 이모에게는 꼭 한 번쯤 풀어젖혀 놓아야 할 마음의 응어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진을 일으키는 나쁜 기운(미미즈)을 잠재우기 위해 재난의 문을 막는다는 <스즈메의 문단속>의 스펙터클에 한동안 밀려나 있다. 설화와 판타지가 난무하는 이 세계관에서 어쩌면 사소한 설정일 뿐인지도 모른다. 문 앞을 지키던 요석이 깨어나 말하는 고양이로 변하고, 잘생긴 대학생이 갑자기 유아용 의자로 변해버리며, 일본 열도가 대규모 지진의 위험에 처하는 크고 작은 혼란 속에서 어느새 잊히고 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첫번째 지진 이후 스즈메는 떠난다. 재난을 봉인하는 토지시(문을 닫는 사람) 소타를 따라 집 뒷편에 버려진 온천 마을에 들어간 스즈메가 혼자서 커다란 문을 열어젖히기 때문이다. 붉은 지렁이 모양을 한 재난의 기운이 윤슬이 아름다운 규슈 바닷가 마을의 상공을 덮쳐온다. 스즈메는 이 무렵 일상과 분리된다. 남들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그에겐 분명한 진실이라서다. 흉포한 재난의 그림자가 교실 창밖을 유유히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자 안에 사람이 깃들고 고양이 신이 열린 문의 위치를 안내한다는 사실을 누구에게 털어놓고 공감받을 수 있겠는가. <마녀 배달부 키키>(지브리, 1989)의 키키가 진정한 마녀가 되기 위해 늦은 밤 조용히 홀로 떠났던 것처럼, 스즈메도 이모의 동의없이 맨몸으로 집을 나선다. 모험을 떠나는 영웅의 여정은 이처럼 언제나 닮아있다.

길 위에서 스즈메는 여러 '관문지기'들을 만난다. 모범생 스즈메와는 딴판인 감귤 농장의 소녀, 주점을 운영하는 싱글맘,  고물 컨버터블을 끌고 나타난 대학생...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등에서 미성년 주인공을 고아 혹은 단독자로 설정하고 그가 비로소 세계와 만나는 순간을 꾸준히 그려온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낯선 이들과의 접촉을 오직 선의로 채운다. 관문지기들은 스즈메를 시련에 빠트릴 수도 뜻밖의 악역을 자처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그저 새 옷과 잠잘 곳을 내어주거나 아득한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의 운송 수단을 제공한다. 애니메이션의 세계에서 사랑스러운 조력자들은 낯선 존재가 아니지만, 이야기가 재난과 만났을 때 그 함의는 달라진다. 그것은 마치 재난의 전과 후를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염원해봤을 법한 연대의 실현이자 현실 사회가 이뤄내지 못한 이상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열도 남단의 규슈에서 시작해 시코쿠, 고베, 도쿄로 나아간 스즈메는 결국 이 장황한 모험이 어디에서 끝날지 직감한다. 후쿠시마와 인접한 미야기현, 자신의 고향이다. 미야기현은 3.11 동일본 대지진 당시 이와테현과 함께 후쿠시마현보다도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스즈메가 엄마를 잃고 이모와 살게 된 배경이 구체화되면서 21세기 들어 일본 사회를 가장 큰 아픔에 빠트린 실제 재난이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감귤 농장의 친절한 소녀와 하룻밤을 보내던 중 스즈메는 이렇게 고백했었다. 낯선 사람에게나 슬쩍 말해볼 수 있다는 듯이.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스틸컷

"가끔 내가 이모의 인생을 가로막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고향으로 향하는 로드 트립 직전, 스즈메의 눈 앞에 갑자기 이모가 나타난다. 연락을 끊은 조카의 가출기간이 길어지자 GPS 추적을 동원해 뒤쫓아온 것이다. 벌어질 재난을 막기 위한 여정이었던 스즈메의 궤적은 이제 이미 벌어진 어느 과거의 재난을 다시 마주하기 위한 제의로 변모한다. 이 무렵 내게 스즈메는 더이상 영웅이 아니라 '생존자'였다. 재회가 일으킨 당혹과 이후의 반가움, 그리고 다가올 일들에 대한 불안감이 이내 차 안에 맴돈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놀라운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순간에 영화에서 가장 경쾌한 주크박스 신을 마련한다는 점이다. 전설적인 애니메이션 OST(<마녀 배달부 키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과 시티팝이 폐허를 향해 달리는 슬픈 컨버터블 위로 흥겨운 리듬을 띄운다. 말없는 인물들과 신나는 음악 사이에서 나는 재난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의 찬란함과 지독함을 동시에 느꼈다.

스즈메가 유년기에 살던 집에 도착하기 직전, 이모와 조카는 결국 반목한다. 심술궂은 고양이 신의 농간으로 어둠에 사로잡힌 이모가 "너를 위해 희생하느라 내 삶은 망가졌다"고 악다구니를 쓰다 쓰러지고 마는 장면이다. 성장 서사에서 집과 가족은 언제나 이별해야 할 대상이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리는 스즈메와 이모의 갈등은 단순히 헤어짐에 대한 부적응의 반응이 아니다. 이 영화의 물밑에 내내 흐르는 감정은 그보다 잔인하다. 살아남은 사람의 죄의식과 보살피는 사람의 버거움. 재난을 막고 막지 못하고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재난 이후의 아픈 산물이다. 둘은 상실자로서 연대하지만 생존자와 외부자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리는 관계의 부등호는 인간 내면의 지리멸렬한 감정과 욕망의 차원이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재난의 비극이 낳은 숙명의 차원으로 확대된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둘은 끝내 동행한다. 판타지를 경유해서 도착한 현실의 폐허 위에 스즈메는 혼자가 아니다. 이미 부서지고 버려진 장소 위에서도 한때 그곳을 살아냈던 사람들의 감정과 마음에 접속할 수 있다는 설정 — 세상을 보는 인식의 변화 — 이 스즈메를 바꿔 놓았다.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과 만나는 작업이 필수이므로 '문 열림'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히려 절대 열리지 않는 문일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어느 시기에 새로운 문을 열고, 또 어느 시기에 그 문을 닫는다는 흔한 비유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큰 위안이 된다. 문은 다만 잘 보이지 않을 뿐 언제나 사라지지 않고 도처에 있으므로... 내가 스즈메에게서 배운 것은 그 열린 문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사람의 자세, 우리 각자의 성숙은 곧 타인의 아픔과 접속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의연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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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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