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J 작가님에게 '호러 소설 쓰기'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씩, 총 한 달 동안 진행되었는데 단편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낭독하는 커리큘럼이었다. 첫 주 차에 한 것은 무서워하는 대상으로부터 키워드를 뽑아 내기였다. 내가 스스로를 분석하며 골라낸 소재는 더위와 양서류. 난 더위에 약하다. 여름이 싫고 겨울이 좋다. 무서운 것과 단순히 싫은 것은 좀 다르지만, 그해 여름은 정말 공포스러울 만큼 더웠다.
두 번째 키워드인 양서류에는 끔찍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 것이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노란색 우산을 쓰고 하교하던 나는 아파트 단지의 등나무 앞에 또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궁금해 근처를 알짱거렸는데, 마주한 건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자동차 바퀴에 깔려 죽은 황소개구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개구리의 참혹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자면 이 꼭지가 본격 고어 장르가 되어버릴 것 같아 생략하겠다. 한창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해외에서 유입된 외래종 생물이 생태계를 망가뜨린다는 내용을 배우던 시기였다. 성인의 머리통만 한 크기의 황소개구리가 기괴하게 죽어 있는 모습은 나에게 낯선 괴물의 시신을 목격한 것 같은 감상을 남겼고,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다. 정확히 그 시기부터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현실의 양서류를 보면 분명한 공포감을 느낀다. 눈을 마주칠 수 없고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두렵다. 언제든 튀어 올라 나에게 위협을 가할 것 같다. 하지만 작품을 감상할 때는 또 다른 기이한 심리가 작동한다. 현실에서 그토록 꺼려하는 '미끌미끌한 피부의 괴생물-양서류, 지렁이, 바다 생물 등등'을 더 많이, 더 자세히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속 크라켄과 데비 존스, <괴물> 속 한강의 괴물, 사막의 모래 밑에 사는 <불가사리>나 <미스트>에 감질나게 등장하는 촉수들, 우주로 나간다면 <에일리언>까지. 나는 크리처물을 사랑한다. 없어서 못 본다. 더 다양하고 끔찍한 괴물들이 나타나 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괴물들을 보거나 상상할 때, 불시에 내가 목격한 죽은 개구리를 떠올린다. 무조건 반사와 같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걸 어찌할 수 없다. 어떤 때는 그저 스치는 이미지 정도일 뿐이지만, 어떤 때는 악 소리 나게 소름 끼친다. 매번 역한 기분이 들지만, 언제부턴가 그 역한 기분으로 스스로를 단련하는 듯한 기분도 든다.
크리처물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라면, 아무래도 가장 안전하게 나의 공포를 들여다보고 관찰할 수 있는 장르라서가 아닐까 싶다. 물론 현실의 양서류들이 작품 속 크리처들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은 대체로 비슷하게 '미끄럽고 축축한 피부'를 가졌으며, 내가 양서류를 볼 때마다 상상하는 공포의 순간들을 엇비슷하게 재현한다. 이를테면 갑자기 뻗어 와 발목을 휘감는 촉수처럼. 나는 공원의 개구리들이 점프해서 내 얼굴에 달라붙을까 두렵고, 별생각 없이 베란다의 슬리퍼를 신다가 그 안에서 민달팽이가 밟힐까 무섭다.(실제로 그런 적이 있다. 온 가족이 다 튀어나올 정도로 소리를 질렀었다) 그들의 미끄러운 피부가 내게 닿는 게 소름 끼친다. 영화 속 크리처들은 그들과 비슷한 미끄러운 촉수, 혹은 팔과 다리와 혀를 거침없이 뻗어 인간을 해하곤 한다. 현실과 다른 점은 그들이 아무리 난리를 피워도 촉수는 절대 나에게까지 뻗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인공이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 나는 멀리 떨어져서 그들의 사투를 팔짱을 낀 채로 관람하기만 하면 된다! 그 안락함이 좋다. 이전에도 말했다시피, 나는 계속 안 좋은 상태를 상상하며 마음을 단련시키려는 버릇이 있는데, 크리처물을 보는 건 꼭 가장 안전한 상태로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 같다. 공포 영화 속 인물들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지하실이라는 금기를 깨뜨리고야 말듯이, 나는 나름대로 내 안의 금기를 살짝 넘어서는 달콤함을 맛볼 수 있다.
여기까지가 개인적인 이유라면, 두 번째는 그 기괴하고 낯선 존재들의 기원과 먹이로서 인간의 위치를 상상하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크리처물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다. 한강에 괴물이 출몰하는 영화의 제목이 <괴물>이듯이 크리처물의 주인공은 괴물. 괴물 입장에서 보면 그들 대부분은 주인공들을 향한 엄청난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은 굶주렸고, 하필 주변에 보란 듯이 깔려 있는 게 약육강식의 피라미드에서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는 인간이었을 뿐이다. 밥 좀 먹으려는데 식량이 나를 공격하다니. 걔네도 황당하겠지. 배고파서 죽겠는데 음식들이 도망 다닌다면 나라도 짜증 날 테다.
크리처물은 인간이라는 종의 위치를 반전시킨다. 인간만이 주인공이고, 인간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고, 인간이 사랑하고 인간이 뭐든지 해내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오로지 크리처물만이, 인간은 한낱 먹이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전제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물의 첫 등장 신이 중요하다. 그들이 인간보다 한참 위에 있는 존재여야 이후 퇴치했을 때 쾌감과 안도감이 클 테니까. 어찌 되었든 이것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이 감상하는 이야기다. 절정으로 치달아 주인공의 대처가 능숙해질수록 괴물의 임팩트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나는 묘한 아쉬움에 사로잡히고 만다. 크리처물에서 좋아하는 장면들이 대부분 초반에 몰려 있는 이유다. 가장 좋아하는 등장 신은 역시 <괴물>의 한강 신이다. 얼마 전에 다시 보았는데, 이전에는 그저 무자비하게 느껴졌던 괴물이 조금 안쓰러웠다. 그리고 촉수가 나오지는 않지만 호러 영화 <사일런트 힐>에 등장하는 저주받은 존재들의 디자인도 좋아한다. 게임을 원작으로 해서인지 크리처들이 매번 친절하게 등장하고, 종 수도 많다.
생명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를 한 단계 낮추면 더 광대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가 무수한 동식물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살아가듯, 우리 역시 어떤 존재의 양분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은 너무도 당연하면서 또 얼마나 짜릿한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 명예, 권력 그 모든 것 역시 저 위의 포식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담백한 진실이 좋다. 가끔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세상에서 왠지 모를 느끼함을 느낄 때마다 영화 <캐빈 인 더 우즈>의 경쾌한 엘리베이터 도착 음을 떠올린다. 궁금하다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감상하시길.
한 가지 안타까운 건, 내가 이렇게나 크리처물을 좋아하는데 신작이 업데이트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때 괴수물 붐이 일었지만, 그 시기를 마지막으로 끔찍한 괴물과 인간이 맞서는 구도의 작품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 투자 대비 마진이 남지 않는 장르여서겠지. 언젠가는 나도 크리처물을 써보고 싶다고는 생각하지만 많이 좋아하는 만큼 냅다 시작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계속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는 쓸 수 있겠거니 생각한다. 올해까진 바라지 않고, 내년에는 꼭 멋진 크리처물이 한 편이라도 개봉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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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소설가)
소설가.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등을 썼다. 스릴러, SF, 호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영영
2023.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