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 허태임. 식물 분류학자인 그가 식물을 탐색하는 일상을 전합니다. |
일종의 직업병이 아닌가 싶다. 내가 혼잣말로 식물의 이름을 정확하게 고쳐 부르는 건.
식당에서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일행 중 한 명이 고들빼기 무침이 정말 맛있다며 권할 때,
'고들빼기보다 벌씀바귀랑 벋음씀바귀가 더 많네.'
한 점 집으며 나 혼자 가만히 속으로 말한다. 그 세 식물은 아주 비슷하게 생겼고 같은 장소에서 어울려 살고 똑같이 뿌리가 길고 쓴맛이 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크게 구분하지 않고 함께 나물로 쓴다. 다 같은 고들빼기가 아닌데, 제대로 된 자기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 채 밥상에 오르는 그들이 너무 딱하다는 생각을 그래서 나는 하는 것이고, 독백처럼 그 이름들을 나지막하게 호명하고 나서야 먹는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달래 넣은 된장국 맛이 기가 막히다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는 '달래 아니고 산달래'하고 하마터면 속엣말을 꺼낼 뻔한 적도 있다. 한반도에는 달래와 산달래 두 종류가 사는데 뿌리가 더 크고 향이 더 강해서 예로부터 약용과 식용으로 쓰는 건 산달래다. 편의상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 한국어 문화권에서는 '달래'라고 합쳐서 부른다. 엄연히 서로 다른 두 종이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니, 내가 대신 나서서 말이라도 해볼까 하다가 이내 그만둔다. 이 상황에 그런 걸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 내가 생각해도 좀 재수 없고 좀 많이 이상할 것 같으니까. 어떤 때는 이런 식의 혼잣말도 한다. 고사리 볶음이 맛있다는 누군가의 말에 '고사리처럼 보이지만 그건 고사리가 아니고 고비예요. 고사리보다 대형이고 줄기가 실해서 육질이 더 잘 느껴지죠. 가만 보자, 청나래고사리도 섞여 있네요.' 나물 중에 취나물을 제일 좋아한다는 누군가의 말에는 또, '다 같은 취나물이 아닙니다. 참취와 분취와 서덜취가 섞여 있어요' 등등. 이쯤 되면 혼자 속으로 말하는 병이 참 깊게도 들었구나 싶다. 그럼에도 그칠 줄 모른다.
목련이 꽃을 활짝 피웠다고 봄꽃 개화 소식을 앞다투어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저건 백목련이지' 혼자서 중얼거린다. 특정 목적에서 심어 기르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 중국 원산의 백목련이다. 목련은 제주도 숲속에 아주 드물게 사는 희귀 식물이다. 유채밭이라고 알고 들어가 사진을 찍는 상춘객 무리를 건너다보면서도 '어머, 배추밭에서 사진 찍으시네. 아이고, 저쪽은 갓밭에서 찍으시네' 이런 식으로 나 혼자서 하는 말은 이어진다. 실제로 그 세 식물(유채와 배추와 갓)은 같은 혈통이라 꽃이 거의 비슷하게 생겼고 군락으로 피어 있으면 분간이 잘 안 된다. 사진을 찍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예쁜 것도 하나같다.
한번은 내가 그 아름다운 풍경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꺼내는 동안 어떤 환청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한 적도 있다. 자기들이 누군지 이름도 모른 채 사람들은 왜 자꾸 사진을 찍어대냐고, 크게 서운하다고. 그래서 나는 유채밭인 줄 알고 배추밭과 갓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는 이들을 붙잡고 말을 걸려고 하다가 '어휴, 그게 다 뭐람. 보통 사람처럼 그냥 유채꽃이라고 하고 지나가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애써 그 장면을 외면했다.
내 직업병의 또 다른 증상 하나는 일상에서 내 앞에 존재하는 식물의 배경을 생각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쓴다는 거다. 한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는 이런 식이다. 에티오피아가 원산이고 예가체프 계열의 품종인 이 '꼭두서니과'의 '커피'라는 식물이 아프리카에서 나무로 자라 하얀 꽃을 피우고 빨간 열매를 맺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린다. 과육을 제거하는 공정의 과정과 과육이 벗겨진 채 생두의 몸으로 한국에 입국해서 누군가의 손에 타닥타닥 볶인 후 곱게 갈려 커피로 추출되기까지의 여정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시간이 꽤 지나 있다.
아침으로 먹겠다고 식탁 위에 아몬드 한 줌을 올려놓고는 턱을 괴고 앉아 아예 긴 대화를 시도하는 편이다.
"서아시아 일대가 원산지? 아마 기원전부터 사람들은 너를 재배했다고? 지중해 인접 국가에서 시작해서 북아프리카에도 재배법이 전해졌고 현재 최대 주산지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살구나무랑 혈통이 가까운 장미과 식물이잖아, 그치? 그러고 보니 정말 닮았어, 꽃이 살구나무랑. 고흐도 이 모습에 반해서 한껏 핀 너의 모습을 그렸겠지? 열매도 진짜 살구나무랑 비슷해. 열매 하나를 따서 과육을 벗기면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안쪽 껍질이 나오는데 이건 진짜 씨앗 아닌 거 나는 알지. 씨앗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 같은 것, 내과피잖아. 그걸 쪼개면 진짜 씨앗이 나오는 거고. 우리가 먹는 한 알의 아몬드가 바로 그 부위지. 이 먼 타국까지 와서 맛있는 씨앗을 제공해줘서 고마워, 아몬드나무야."
가만 생각해 보면 이건 직업병보다는 깊은 짝사랑에서 비롯된 상사병이 아닌가 싶다. 그들 편에 서고 싶고 그들을 대변하고 싶어 환청을 듣게 되고 아름답다고 좋아한다고 그저 존재만으로도 고맙다고 말을 걸게 되는 그런 증상. 증세가 드러나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나의 감정은 들쑥날쑥 기쁘기도 슬프기도 설레기도 아쉽기도 하고 때로는 황홀해지기도 한다. 딱 잘라서 판단하고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징후가 사랑이라는 계통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해본다. 마치 서로 너무 비슷해서 이 종인지 저 종인지 분간이 안 되어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기 어려울 때 하는 추정처럼.
<허태임의 식물탐색> 연재는 오늘로 끝이 난다. 11화는 없다. 하지만 식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나는 계속해서 식물탐색을 이어 나갈 것이다. 직업병인지 상사병인지 모를 그 무언가를 안고서 종횡무진 누비며 탐구도 하고 샛길로 새서 딴짓도 하면서. 그러는 동안에 식물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더욱 깊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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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임(식물 분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