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여섯 살 아이에게 그림일기 숙제가 주어졌습니다. 나의 하루를 정리하고 글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데 좋은 방법이기에 반가운 마음 절반이었고, 결국 이 숙제는 엄마의 일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귀찮은 마음 절반이었습니다. 일기 숙제를 앞에 두고 뭘 어쩔지 몰라 하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하루 중에 가장 즐거웠던 일을 떠올려 봐!"
한참을 고민하던 아이는 30분 동안 두 문장을 적었습니다.
'오늘은 축구를 했다. 참 재미있었다.'
문장을 단정하게 고쳐주면서 첫 숙제를 마쳤습니다.
하루는 빨랐고 아이의 일기 쓰기 시간 역시 빠르게 돌아왔습니다. 아이의 일기는 매번 비슷한 형태로 반복됐습니다.
'오늘은 호박 수프를 먹었다. 나는 호박이 좋다.'
'오늘은 포켓몬 게임을 했다. 포켓몬 카드를 사고 싶다.'
이렇게 말이지요. 반복되는 일기를 보고 있자니 문득 아이의 일상이 너무나 단조롭다는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집과 유치원을 오가며 몇몇 학원을 다니는 삶. TV에서 <포켓몬스터>와 <신비아파트>를 보는 즐거움이 전부인 삶. 머지않아 본격적인 학업의 시기로 들어설 텐데, 적어도 그 전에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추억들을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래전 우리 부부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일곱 살이 되는 해에 서울을 떠나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과거 제주에서 한 달 살기를 했었고, 행복한 추억만 가득했기에, 그 시간을 늘려 제주 반년 살기에 도전해 보기로 한 겁니다. 남편은 6개월 육아 휴직을 내기로 했고, 아이가 다니고 있는 유치원이나 학원들은 모두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조금 다르게 키워보고 싶었지만, 서울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주변의 이야기들에 자유로울 수 없었고, 남들만큼 이것저것 다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지, 라는 생각에서마저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 지배적인 생각을 끊어보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유치원에 안 보내는 대신 자신이 아침과 저녁 한 시간씩 아이의 공부를 챙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에게 유치원과 학원과 TV 시청에서 해방돼 자연과 호흡하는 삶을 선사해 주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늘 바빴던 엄마 아빠와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생각에 아이는 벌써부터 설레어합니다. 체력이 약한 아이를 위해 매일 아침 제주 오름에 오르고 시장에서 막 사 온 좋은 식재료로 엄마 아빠가 만든 음식을 준비해주려 합니다.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을 구경하고 하루의 얼마는 축구와 게임으로 아이만의 행복을 보장해 주고 싶습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오직 우리 셋이 천천히 하루하루를 보내는 낯선 경험을 해보려고 합니다. 예전부터 막연하게 꿈꿔왔던 계획이었지만, 막상 실행해 보려니 두렵고 망설여졌습니다. 변화는 번거롭고 피로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너무 먼 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남편과 저는 한라산 끝자락에 농장이 즐비한 조용한 마을을 택했고, 작은 마당이 있는 집을 계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계약으로 말미암아 멀고 흐릿했던 저의 오랜 꿈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가만히 기울이면』은 넉넉한 시간이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그림책입니다. 가만히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가만히 강아지 털의 보드라움을 느껴보고, 거미가 집을 지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만히'라는 부사일 텐데요. '가만히'의 의미는 이러 합니다.
1)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 없이.
2) 어떤 대책을 세우거나 손을 쓰지 않고 그냥 그대로.
3) 마음을 가다듬어 곰곰이. 이 세 가지의 뜻 모두
가 아이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덕목이라고 그림책은 말해 주고 있었고, 저도 이런 덕목들을 아이에게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면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리고, 더 좋아질 게 분명할 겁니다.
<월간 채널예스>에 원고를 쓰기 시작한 지 정확하게 1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와 고백하자면 매달 정해진 날짜에 맞춰 완성된 원고를 넘긴다는 것은 적잖은 스트레스였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모이는 공간이고, 대단한 문인들과 명사들이 지면을 채워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내 부족한 사유와 글솜씨가 드러날 게 두려웠습니다.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하지만, 내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부족함을 숨기려 나를 포장하고 머리를 쥐어짜내는 스트레스를 던지고, 그저 다달이 열심히 살아낸 데에서 글감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 공간에 쓴 글에는 지난 일 년 동안의 제 고민과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과감하게 도전했던 일들의 기억이 구구절절 남겨졌습니다. 덕분에 별것 아니게 흘러가 버릴 순간들이 글감이 되고 내 삶의 특별한 순간으로 저장됐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때로는 고통스럽더라도 글쓰기를 지속해 나갈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제 무거운 글쓰기의 짐을 던져버리고 또 새로운 것들을 채워나가 보려 합니다. 충분한 경험이 쌓이면 그 경험이 생각으로 변하고 언젠가 그 생각이 흘러넘칠 때 다시 글을 써볼 용기가 생길 거라 믿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어나갈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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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작가, 방송인)
방송을 하고 글을 쓰며 애TV그림책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