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애의 그림책 읽는 시간] 『앙코르』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능숙했고 그 능숙함은 오랜 세월과 반복된 노동에서 이뤄진 것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육수를 대하는 그의 마음을 알고는 그의 음식을 먹을 때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글ㆍ사진 문지애(작가, 방송인)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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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청역 인근 상가 건물 코너에 위치한 평양냉면 전문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다. 평양냉면과 곰탕을 전문으로 하는 곳인데, 점심때면 동네 엄마들의 발길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저녁에는 인근 직장인들의 회식 장소로 북적인다. 과장된 홍보도, 화려한 음식도, 힙하다는 인테리어도 없는 곳이지만 이 집만의 고유한 '맛'에 반해, 찾는 이들이 알음알음으로 늘어 어엿한 동네 맛집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배달 시장에서도 우리 가족은 늘 이 집의 음식을 선택한다. 맛있어 보이는 다른 가게의 음식 사진에 현혹될 때가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이 집의 음식을 선택한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고, 건강한 음식을 먹었다는 포만감을 주며, 반복해 먹어도 속이 편안해, 마치 집밥을 먹는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싸한 사진에 혹해 새로운 음식을 시켜 먹었다가 실망한 횟수가 늘어날수록 믿고 먹는 음식에 의지하게 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대체 이 집 음식의 비결은 무엇일까 궁금하던 차에 셰프님과 길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 대화를 통해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요식업에 뛰어들었지만, 자신의 평양냉면이 시장의 주목을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노포만이 살아남던 시장에서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음식을 잘 만들고 싶어 최상급 투 플러스 한우를 사용했고, 새벽 일찍 나와 5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육수를 끓였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손님은 "이렇게 좋은 재료를 사용해서 이 맛밖에 내지 못하는 것도 용하다"며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건네기도 했단다. 셰프는 낙담했다. 유명한 식당에서 음식을 배운 것도 아닌데, 냉면과 곰탕 시장에 뛰어든 게 무모한 도전이었나 후회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육수를 끓이고 음식을 만들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이제 미식 전문가 여럿이 그의 음식을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평양냉면이라 평하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을 한 셰프는 자신이 10년 동안 지켜온 원칙에 대해 입을 열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재료만을 쓴다고 말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이용해도 지금과 유사한 맛을 낼 수 있지만,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육수를 위해 투 플러스 한우만을 고집하고 모든 식재료를 자신이 아는 가장 좋은 걸 쓴다고 했다. 둘째, 모든 음식의 기본이 되는 육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이 직접 만든다. 육수도 레시피가 있기 때문에 일 잘하는 후배가 만들면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지만 여전히 자신이 만드는 걸 고집한다. 요리법에 따라 기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날의 기온과 습도와 재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그날 낼 수 있는 최고의 육수를 만들고 싶어서라고 했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매일 새벽 5시까지 식당으로 나와야 한다. 술을 마시고 놀다 보면 건너뛰는 날이 생기기 마련일 테니, 그러지 않기 위해 10년 동안 저녁 약속 한 번 잡지 않고 육수에만 매달렸단다. 마지막으로 항상 귀를 열어 놓고 일을 한다고 셰프는 말했다. 식당을 오래 한 사람 중에 고집 없는 사람이 없고 고집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들 하지만, 자신의 고집이 아집이 되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쓴다. 맛있다는 식당을 가서 먹어보길 소홀히 하지 않고, 손님들의 평가에도 늘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결과 자신의 육수는 손님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금씩 조금씩 발전됐다고 한다. 육수는 그의 삶이고, 그는 날마다 정진해 오늘의 맛에 이를 수 있었다.



유리 작가의 그림책 『앙코르』에는 이제는 낡아 소리도 잘 나지 않을 것 같은 바이올린을 수리하는 장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오래된 가구들 틈에서 발견한 바이올린,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됐는지 상태가 좋지 않다. 하지만 장인의 손길을 거치며 악기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간다. 거칠어진 악기 표면을 정리해 주고, 현을 조여 소리를 조율하고, 소리통을 다듬어준다. 그가 사용하는 수많은 도구는 바이올린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부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이올린은 장인의 노동을 통해 새 생명을 얻게 된다. 그리고 어느 연주회에 모인 관객들에게 자신만의 소리를 들려주며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림책은 이 모든 게 평생을 악기에 헌신한 장인의 노동 덕분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림책은 바이올린을 보살피는 장인의 손길을 밝고 따뜻한 색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육수를 만드는 셰프의 모습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학창 시절에 자주 들었을 법한 오래된 노래들을 따라 부르며 새벽부터 나와 끓인 육수를 식히고, 그 식힌 육수에 어제 만든 차가운 육수를 섞어 '오늘의 육수'를 완성하고 있었다. 일을 다 끝내고는 육수를 뽑아내느라 기름기로 가득한 바닥을 세제 묻힌 솔로 박박 닦아냈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능숙했고 그 능숙함은 오랜 세월과 반복된 노동에서 이뤄진 것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육수를 대하는 그의 마음을 알고는 그의 음식을 먹을 때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저녁 약속 한 번 잡지 않고 매일 육수를 만들어가며 도달한 어느 경지의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냉면의 육수를 한 입 크게 머금고, 맛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아본다. 장인의 하루가 온전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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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작가, 방송인)

방송을 하고 글을 쓰며 애TV그림책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