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아모스 할아버지의 코끝 좀 보세요! 얼마나 코를 풀었는지 빨갛게 부풀었어요. 코감기가 제일 고역인데 말입니다. 여러 해 동안 바이러스가 창궐했으니 면봉으로 ‘콧속을 찌르는’ 검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의 표지를 보다가 유독 할아버지의 빨간 코가 눈에 들어온 이유입니다. 할아버지도 혹시 PCR 검사를 하신 걸까요?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은 2010년 전에 출간되었으니 그럴 리는 없습니다. 글을 쓴 필립 C. 스테드와 그림을 그린 에린 E. 스테드는 부부이며 이 책으로 칼데콧 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책이 주목받으리라고 예견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화려한 색채도 자극적인 캐릭터도 없는 소박하고 순수한 세계를 담았기 때문이지요. 부부는 오랜만에 후속권인 『아모스 할아버지가 버스를 놓친 날』을 펴냈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도 다시 국내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아마도 십여 년 만에 한 번씩 부부는 우리 마음을 녹이고자 아모스 할아버지를 전령처럼 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모스 할아버지는 동물원에서 일합니다. 철학자 칸트처럼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요. 바쁘게 일하면서도 빼놓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동물 친구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할아버지는 생각이 많아 시간이 무척 필요한 코끼리를 채근하지 않고 체스 게임을 둡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거북이와 달리기 시합을 하고요. 수줍음이 많은 펭귄 옆에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어 주고요. 늘 콧물을 흘리는 코뿔소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것도 잊지 않아요. 모두 할아버지가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할아버지가 감기에 걸려 출근을 못합니다.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친 동물 친구들이 할아버지를 찾아 나섭니다. 이제부터가 이 그림책의 백미입니다.
필립과 에린이 만들어낸 ‘아모스 할아버지의 세계’를 만나면 잠시 공간 이동을 한 듯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일상의 우리는 분주합니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바삐 걸어 정해진 시간까지 일을 마쳐야 합니다. 상사의 이야기가 지루해도 때로 맞장구를 쳐주며 들어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SNS에 펼쳐진 타인의 삶은 화려하다 못해 박탈감까지 안기고요. 언제나 무언가에게 나를 빼앗기고 사는 기분입니다.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기분이라고 할까요.
이런 순간이라도 아모스 할아버지를 만나면 분주한 세상이 잠시 음소거 된 듯 조용해집니다. 문을 닫고 방안에 홀로 앉아 있는 듯합니다. 아모스 할아버지와 친구들이 사는 세계에는 소음도, 험담도, 가식도, 잘난 척도 없습니다. 아모스 할아버지는 “너는 왜 그렇게 느리니?”,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봐라!”, “그래서 앞으로 뭐가 될래?”라고 닦달하지 않습니다. 대신 손수건을 빌려주거니 가만히 옆에 있어 주지요. 조언과 강권이 없는 친절한 세계가 그림책 안에 있습니다.
이 그림책의 편집자였던 닐 포터는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을 두고 ‘조용한 책’이라고 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에린의 그림은 정말 말수가 적습니다. 강렬한 원색도 없고, 번쩍이는 코팅도 없고, 화면을 꽉 차게 배경을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걸 아껴 사용했습니다. 에린은 종이에 목판화로 색을 얹고 나중에 연필로 추가 작업을 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목판의 나뭇결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균질하게 색이 입혀지는 디지털이 아니라 목판이 종이에 닿는 부분에 따른 들쑥날쑥한 아날로그의 세계지요. 살짝 색을 뺀 낮은 채도의 생각도 과하지 않아 편안합니다. 아끼고 절제하는 방식이 도리어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종종 “사람의 마음은 상대에게 전해질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죽는 날까지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도 여깁니다. 그러다 가끔 『아모스 할아버지가 아픈 날』 같은 그림책을 만나면 잠시뿐일지라도 소망을 품게 됩니다. ‘내 마음이 너에게 가닿을 수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베푼 사랑을 돌려주는 동물 친구들이 있으니 드물더라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우리 모두 기억하기로 해요. 아모스 할아버지가 베푼 친절이 친절로 돌아왔듯이 친절만이 친절을 낳는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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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화(어린이책·출판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