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고단한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방법은 책이었다. 궁색한 살림에 그나마 가구라 불릴만한 갈색 나무 책상 양옆으로 책이 쌓여 있었다. 아빠는 인생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을 때마다 그곳에 웅크렸다. 나는 책상에 앉은 아빠 뒷모습이 동굴에 숨은 곰과 닮았다 생각했다.
아빠는 정기적으로 책을 사고 주기적으로 부부싸움을 했다. 삶의 무게로 굽어진 어깨와 고꾸라진 허리를 펴기 위해 아빠는 책이 필요하고 엄마는 볶아 먹을 돼지고기 한 근이 필요했다. 달마다 책값을 받으러 외판원 아저씨가 왔다. 나는 아저씨가 삼촌 같았는데 엄마는 고리대금업자처럼 여겼다.
한글을 떼고 읽기에 제법 속도가 붙자 아빠는 일 년에 한두 번 내가 읽을 책을 사주셨다. 나는 그중 국민서관에서 나온 삼십 권 짜리 위인전을 제일 좋아했다. 헬렌 켈러가 처음 설리번 선생님께 물이란 단어를 배우는 장면은 읽어도 읽어도 감동이었다. 엄마는 내 책을 살 때는 화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책 속에 길이 있다.' 며 책을 많이 읽으라 조언하셨다.
집안 사정이 나빠졌는지 2년 넘게 책이 늘지 않았다. 좋아하는 위인전은 다섯 번을 읽고 ‘작은 아씨들’도 3번을 넘었다. 나는 아빠 책상을 기웃거렸다. 아빠 책은 대부분 두껍고 글자도 작은데다 전문 서적이 많아 읽을만한 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높이 쌓인 책을 위 아래로 살펴봤다. 그러다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양치는 언덕'이었다.
『양치는 언덕』은 소설 『빙점』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대표작으로 진실한 사랑과 용서라는 아름다운 주제를 가졌지만 학생과 선생님의 사랑, 성폭행, 가정폭력, 불륜 등 열세 살이 읽기엔 다소 이른 감이 있는 내용이었다. 아빠에게 허락을 구했을 때 별말 없이 꺼내주신 이유는 둘 중 하나가 확실했다. '료이찌'가 개과천선한 결말만 기억하시거나 제대로 읽지 않으셨거나. 아빠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으셨으니 아마 후자일 것이다.
나는 곧 국민학교를 졸업할 나이였지만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헤엄이라도 치고 싶은 청량한 가을 하늘이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애송이인 나를 생각지도 못한 언덕으로 데려갔다. 그곳엔 처음 본 세계가 있었다. 나는 애들은 모를 사랑 얘기를 언덕배기에 숨어 훔쳐봤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동화를 졸업하고 소설에 입문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독서의 성인식과 같아 나는 이제 어깨동무나 보는 애들과는 더이상 놀 지 못할 기분이 들었다.
내 첫 번째 어른 책 『양치는 언덕』. 주인공 나오미와 다께야마는 오랫동안 사랑의 정의가 되어 열여섯 첫사랑을 시작할 때도 끝낼 때도 함께 했다. 사춘기 시절 나오미를 보며 방황을 위로받고 인기 많은 국어 선생님을 다께야마와 비교하기도 했다.
오늘 오래된 책을 정리하다 우연히 『양치는 언덕』을 발견했다. 꼽아 보니 읽은지 벌써 삼십 년이 넘었다. 어릴 적 흑백사진 찾은 듯 신기하고 반갑다. 첫장을 읽는데 문장이 이렇게 서정적이었나 싶다. 처음엔 낯설더니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낯이 익다. 행과 행 사이 묻어둔 그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엄마 말씀이 맞았다. 책을 따라 걷다 보니 시간 여행하듯 먼 시간 너머 그리운 풍경과 어린 나를 만난다. 도란도란 피어나는 이야기들. 추억을 나침반 삼아 다시 언덕에 오른다.
*송은영 읽고 쓰며 세상과 나와 화해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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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영(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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