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그런 취향 Part 1
매주 시청 경험이 쌓이면서 절로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도 있었다. 보통의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얼마나 특수하고 개별적인 존재들인지(다들 얼마나 지랄 맞은지).
글ㆍ사진 윤가은(영화감독)
202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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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펜트하우스> 포스터“진짜요? 그런 취향은 전혀 아닐 것 같았는데?!”

최근에 재미있게 본 작품이 뭐냐는 질문에 솔직히 답하면 종종 저런 말을 듣는다. 내 영화를 만들고부터는 더 자주 듣는다. 내 대답을 듣고 다음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런 반응이 그저 예상 밖의 놀라움인지 알 수 없는 실망감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그러면 어쩐지 나도 긴장해 꼭 나중에 후회할 이상한 변명이나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이게 된다. 아니 제가 원래 이것저것 많이 봐서요, 호호. 그냥 스트레스 풀려고 보는 거죠, 호호호. 실은 요즘 아녜스 바르다랑 켄 로치 영화를 다시 보고 있는데요, 호호호호……(뻥)

얼마 전 <우리들>, <우리집>을 같이 만든 몇몇 동료와 안지혜 미술감독의 새집에 뒤늦은 집들이를 갔는데, 그때도 저 말을 들었다. 오랜만에 만나 밀린 근황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던 우리는 곧 요즘 삶의 진짜 낙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늘 빡빡한 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박세영 편집감독은 간신히 틈을 내어 주말마다 드럼과 테니스를 배우는 게, 오랜만의 휴식을 만끽 중인 김지현 촬영감독은 우연히 가족이 된 반려묘를 극진히 모시는 게 요즘 최고의 기쁨이라고 했다. 나는 풀릴 듯 말 듯한 작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그래도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결혼작사 이혼작곡>으로 행복을 충전한다고 전했는데, 순간 지혜 미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내게 ‘그런 취향’이 있는지 전혀 몰랐다며 신기해했다. 하긴. 나도 스쿠버다이빙에 푹 빠진 그녀가 최근 무려 100회 다이빙을 달성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으니깐. 나름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최고의 전우들인데, 정작 일상의 관심사는 나누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미안함과 애틋함이 차올랐다.

다행히도 그녀는 나의 ‘그런 취향’이 반가운 눈치였고, 자신도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온 <결혼작사 이혼작곡>을 우연히 본 뒤 기묘한 임성한 월드에 빠져드는 중이라고 털어놨다. 그러자 세영이가 자기는 주변에서 하도 <펜트하우스> 이야기를 하기에 1시즌 요약본 영상을 봤다가 그만 2시즌을 본방 사수하게 됐다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지현 오빠는 원래 드라마는 잘 안 본다고, 애청자인 아내의 어깨 너머로 몇 번 본 게 다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각 드라마의 세세한 디테일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각 잡고 본 게 아니라면 절대 알 수 없을 사소한 유머 포인트까지도. 놀라웠다. 나야말로 모두들 ‘그런 취향’을 갖고 있는지 몰랐다. 우리 팀의 단합력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됐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고, 그렇다면 준비 중인 작품의 방향을 전면 수정해 우리도 황금 시간대에 전국의 안방을 점령해보자는 원대한 꿈을…….

사실 ‘그런 취향’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절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취향의 것들을 의외로 즐겨 보고 뜻밖에 참 좋아한다. 통속의 탈을 쓰고 자극적으로, 뜨겁게, 거침없이 직진하는 소위 ‘막장 드라마’들도 그중 하나다. 솔직히 나로선 그런 드라마들이 어떻게 취향이 아닐 수 있는지가 더 의문이다. 매운맛, 단맛, 짠맛, 신맛을 쉴 새 없이 선사하는 기상천외한 맛집이 즐비한데, 어떻게 늘 담백하고 슴슴한 맛을 추구하는 집밥만 고집한단 말인가. 물론 날이면 날마다 오색찬란한 산해진미로 맛의 향연을 즐기는 것도 너무 부담되고 피로한 일이긴 하지만. 참 어렵고 복잡한 문제다.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이를테면 친구들을 불러 집들이를 하기로 했는데, 역시 쌀밥에 된장찌개가 건강에도 좋고 제일 잘하는 요리란 걸 알면서, 그래서 벌써 재료도 다 사놓고 손질까지 해놨으면서, 정작 당일엔 배달앱을 열고 온갖 이색 맛집을 기웃거리며 다른 가능성을 찾아 헤매는, 그래도 손님이 오시는데 평범한 집밥보다는 화려하고 특별한 요리를 대접하는 게 맞지 않나 고민하다 결국 식사 준비에 늦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말이다. (뭔 소린지. 배고픈가?)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 포스터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한 장면

사실 내 인생 드라마 중 하나는 1999년부터 2014년까지 2기에 걸쳐 방영된 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다. 한창 고삐 풀려 놀아도 모자를 20대에, 가장 불타오를 금요일 밤이 되면, 나는 부득불 집에 기어들어와 TV 앞에 앉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사정으로 만나고 헤어지는지를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결혼과 이혼, 양육과 부양 같은 지난한 일상사 안에 온갖 기대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별별 종류의 드라마가 끝없이 펼쳐지는데, 내겐 그보다 흥미진진하고 짜릿한 유흥이 없었다. 어떤 인간도 단순하지 않고, 어떤 만남도 간단치가 않아 보였다. 늘 뭔가가 더 있었다. 애정 뒤엔 희생이, 희생 뒤엔 배신이, 배신 뒤엔 복수가, 복수 뒤엔 전쟁이 이어졌고, 전쟁 뒤엔…… “4주 후에 보겠습니다”라는 허공에의 외침만 남았다. 아, 인생 대체 뭘까! 

또 매주 시청 경험이 쌓이면서 절로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도 있었다. 보통의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얼마나 특수하고 개별적인 존재들인지(다들 얼마나 지랄 맞은지), 그들이 처한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문제들도 들여다보면 얼마나 크고 복잡한 딜레마를 안고 있는지(모두 얼마만큼은 다 망했다) 같은 것들. ‘세상에, 저런 집구석도 있다니!’ ‘맙소사, 저런 인간도 숨을 쉬고 살고 있네!’를 연발하며 감정이입 하다 보면, 결국 저런 인간과 집구석이 나나 우리 집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는 각성의 순간도 찾아왔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래도 내 처지가 좀 낫지 않나’ 하는 묘한 우월감에 사로잡혀 이상한 위로와 용기도 얻는 순간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뭐랄까. 무수히 많은 사례를 통해 온갖 종류의 인생사를 간접 체험하며 감을 잡아나가는 신박한 인생 수업에 가까웠달까.

한편 고정 출연하는 배우들의 변화무쌍한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사랑과 전쟁>의 큰 재미 중 하나였다. 지난달엔 전대미문의 난봉꾼을 연기했던 배우가 이번 달엔 환상에 가까운 순애보 남편을 연기하고, 이번 달엔 희생밖에 모르는 현모양처를 연기한 배우가 다음 달엔 자신밖에 모르는 야욕의 아내를 연기할 예정이었다. 드라마를 만드는 방식 자체가 가진 유연함과 역동성이 배우들의 연기 스펙트럼을 더 넓고 다양하게 확장시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특성을 이야기의 반전에도 적극 이용해 매주 회를 거듭할수록 색다른 방식의 긴장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영리하고 멋진 드라마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놀랍고도 강력한 드라마가, 제2의 <전원일기>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이 명작 드라마가 14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막을 내렸을 때 나는 세상을 잃은 기분이었다. 부디 언제고 꼭 부활해 나의 금요일을 다시 제대로 불살라주기를 여전히 강력히 소망하고 있다. 

내 또 다른 인생 드라마의 한 축은, 한번 보기 시작하면 절대 중도 하차할 수 없는, 그 어떤 미친 끝장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돌아버린 막장을 안겨주는, 거장 중의 거장, 희대의 이야기꾼인 김순옥 작가님의 작품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은데 이미 지면은 초과한지 오래고…… 에라 모르겠다. 다음 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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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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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2021.09.03

너무 공감되는 글이에요! 그런데 너무 다른 사람 세계에 빠져 계시면, 감독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많이 기다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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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al0321

2021.04.20

진짜 삶의 구리구리한 희노애락을 그린 막장드라마에 빠져듬과 동시에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고상한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나의 모습이 딱 연상되는 유쾌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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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e

2021.04.19

윤가은 감독님 글 정말 너무 재밌어요. 나중에 꼭 책으로 묶어주시고, 산문집도 계속 내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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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영화감독)

영화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단편영화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