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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일요일의 청소 시간

<윤가은의 나만 좋아할 수도 있지만>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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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청소를 좋아한다. 꼭 청소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든 깨끗하고 반듯하게 하는 작업을 정말 좋아하고, 그래서 매일 자주 한다. (2021.04.02)

pixabay

일요일 아침엔 대청소를 한다. 주중과 주말의 경계가 희미한 직업 때문에 일요일의 의미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 집도 크지 않고 딱히 어지르지도 않아 한 번에 몰아서 할 만한 청소거리도 별로 없는데. 그런데도 일요일만 되면 집안을 대대적으로 뒤집어 구석구석 깨끗하게 쓸고, 닦고, 정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어쩌면 일요일의 마법인지도 모르겠다. 이른 아침, 일요일 특유의 느긋하고 다정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나면, 어쩐지 그에 걸맞은 안온한 일상을 보내야 할 것 같은 여유에 휩싸이고 마니까. 그러면 아무리 밀린 작업이 있어도, 어떤 급한 회의가 있어도, 무조건, 어떻게든 청소를 해내야 한다. 그래야 안락한 기쁨과 평화 속에 나머지 (꼭 해야 할) 일들도 잘 마무리할 수 있다. 오늘은 일요일.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이 3.5개 정도 기다리고 있지만, 일요일의 마법에 빠진 난 일단 이불 빨래부터 돌리고 본다……니. 감독이 되고부터 뻥만 늘었네. 

사실 청소를 좋아한다. 꼭 청소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든 깨끗하고 반듯하게 하는 작업을 정말 좋아하고, 그래서 매일 자주 한다. 지나치게 자주 해서 특단의 조치로 ‘큰 청소는 (제발 좀) 일요일에 몰아 하자’는 가훈을 세웠다. 마법은 무슨. 일요일의 한풀이다. 물론 전업가사노동자가 아니기에 가능한 애정이고 취미일 수 있음은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종종 심각할 정도로 청소에 몰두한다. 본가에서 독립하고 두 달은 종일 청소만 하고 살았을 정도다. 과장이 아니다. 그 땐 정말 눈뜨고부터 잠들 때까지 집을 때 빼고 광내는 게 일이었다. 그래서 종종 크고 작은 사고도 쳤다. 기어코 설거지를 하고 나가는 바람에 중요한 약속에 늦는다든가, 갑자기 시작한 책장 정리로 밤을 꼴딱 새우는 바람에 더 중요한 약속에 더 많이 늦는다든가 하는.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시나리오도 써야 하는데. 젊은 날의 귀한 분초를 별것도 아닌 일에 낭비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름 이를 악물고 청소를 끊으려는 노력도 해봤는데, 결국 더 스트레스를 받아 더 잦고 과한 청소를 하는 역효과만 났다(억압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 더 강력하게……). 

당시 각색 일을 하느라 자주 만나던 Y선배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나만의 청소 루틴을 만들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선배는 결혼하고 새집으로 이사한 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집안일에 압도당해, 한동안 오직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리하는 일에만 매진했다고 고백했다. 살면서 만난 가장 성실한 감독 3위 안에 드는 선배의 평상시 모습을 생각하면 절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는 밤 9시에 끝나고 아침 9시에 재개되는 릴레이 회의 사이에, 언급된 모든 레퍼런스를 섭렵하고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한 뒤 새로운 이슈까지 고민해오는, 그 사이 새벽 수영까지 다녀오는, 약간 미친 사람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선배는 불현듯 그간 단 한 번도 시나리오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현타가 왔다고, 그때부터는 나름의 청소 규칙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고 했다(하여튼 모든 일에 다 성실하다). 이를테면 세탁기는 매일 아침 한 번만 돌린다든가, 화장실 청소는 매주 토요일에 몰아서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들은 여러 가지 일들이 쉽게 뒤엉키니 꼭 시간표를 만들어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선배의 말이 가슴에 깊이 사무쳤다. 

그래서 나도 나만의 청소 규칙들을 만들기로 했다. 아침엔 청소기만 가볍게 돌리기, 설거지는 모아 두었다가 저녁에 한꺼번에 하기, 수건 빨래는 일주일에 한 번만 돌리기 등등. 화장실 청소나 이불 빨래, 창틀 닦기 같은 나름 굵직한 일들은 일요일 아침에 몰아서 하기로 결심했다. 확실히 일요일은 왠지 모를 여유가 샘솟아 청소를 오래 많이 해도 마음이 편했다. 물론  눈앞에 빤히 보이는 청소거리들을 모른 척 무시해야 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요일 아침만큼은 당당하게 마음껏 청소를 즐길 수 있게 되어 한층 행복해졌다. 

그런데 난 대체 왜 이렇게까지 청소를 좋아하는 걸까. 단지 ‘깔끔한 걸 보면 기분이 조크든요’ 이상의 어떤 깊은 마음이 작동하는 건 아닐까. 혼자 곰곰이 따져보다, 어쩌면 나의 겁 많은 천성이 이런 기이한 애정을 불러일으킨 걸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청소를 넘어 청소에 대한 생각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내게 청소는 모르는 대상을 마주할 때 싹트는 불안과 걱정을 처리하려는 나름의 긴장 해소법인지도 모르겠다. 상대가 무엇이고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알고 나면 더는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면 뭐든 안심하고 즐길 수 있게 되니까. 어지럽고 지저분한 것들이 정돈되고 깨끗해질 때 온몸의 근육이 편안해지고 마음에 깊은 안도가 스며드는 건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언스플래쉬

결국 청소는 내게 어떤 ‘앎의 과정’이 아닐까. 청소야말로 나의 내면을 끝없이 뒤흔드는 불안과 공포에 지지 않으려는 영혼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자, 진정한 평화에 다다르고자 배움을 놓지 않는 용감한 진리 탐구의 여정이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늘어놨더니 Y선배는 놀고 있다고, 그냥 시나리오 쓰기 무서워서 도피한 거 아니냐며 웃어댔다. 흥. 선배는 감독이 되고부터 냉소만 늘었군! 딱히 반반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분하긴 하지만…… 사실 선배도 마음으로는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청소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선배는 왜 회의 사이사이의 쉬는 시간마다 안방에 달려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빨래를 개고 온 걸까. 그리고 그때마다 왜 생전 본 적 없던 행복한 얼굴이었을까.

 그래도 이제는 이렇게 청소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며 갖가지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참 좋다. 절친 슬기는 고무장갑을 끼고 뜨거운 물로 설거지를 하면 그릇도 마음도 얼마나 뽀드득하게 상쾌해지는 지를 알려주었고, 세영이는 옷 먼지를 제거할 때만 쓰던 테이프클리너를 책상에 두고 쓰면 별별 부스러기들에 손쉽게 대처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다들 영화인이라는 게 어딘가 좀 수상쩍긴 하지만.

 사실 어릴 땐 집에 청소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뿐이라 좀 외롭기도 했다. 문득 생각나는 여덟 살의 어느 날, 동생을 살살 꼬셔 같이 온 집안을 물걸레로 닦아 반짝반짝 빛을 내놨는데, 퇴근하고 들어온 엄마한테 야단만 잔뜩 맞았다. 앞으로는 절대 혼자 청소하지 말라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게 만든 엄마의 울컥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긴. 어린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시키지도 않은 집안일들을 다 해놨으니, 안쓰럽고 속상했을 엄마의 마음은 지금에야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하지만 엄마. 세상엔 이 지경으로 청소에 진심인 사람들도 정말로 존재한답니다. 걸레질이 정말로 재미있고, 그래서 하고 싶고, 심지어 잘하는 아이들고 있다는 것을 부디 이제라도 알아주세요! (그 때 크게 혼난 게 트라우마가 되어 유일하게 걸레질만은 싫어하는 청소인으로 자란 슬픈 진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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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가은(영화감독)

영화 만드는 사람. 좋아하는 게 많습니다. 단편영화 <손님>(2011), <콩나물>(2013), 장편영화 <우리들>(2016), <우리집>(2019)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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