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한 번은 이제 태어나나 보다 하면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다가
생각한 대로 잘 되지 않았다
한번은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이리 도망치고 저리 도망치다가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구나 했다
지난번에 태어났을 때는 불편한 게 너무 많았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그래도 어떤 건 옛날이 그리워요
- 유진목 시집 『식물원』 ‘서문’ 중에서
이슬아 작가님의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라는 서평집에서 발견한 시다. 그야말로 발견이자 득템(?)이었다. 이 시를 읽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고 서간체 형식의 서평을 읽을 땐 오열했다. 읽자마자 떠오르는 두 명에게 급히 이 시와 서평을 통째로 찍어 보냈다.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은 글이었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매 순간을 힘겹게 살아가는 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매번 언어로 빚어내지 못한 채 맴돌던 진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더는 나에게도 너에게도 해줄 말이 없을까 봐 두렵고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해줬다. 그날 이후로 매일 이 책을 머리맡에 두고 잔다. 기운이 넘치는 날이면 꼭 다시 읽는다. 그러면 힘 빠지는 날들을 견딜 수 있다.
이렇게 보물 같은 글을 마주할 때 책 읽는 즐거움이 커진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훌륭한 글을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다니.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이어가는 게 버겁고 귀찮은 내게 더없이 편안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즐거움이 커지는 만큼 괴로움도 클 때가 많다. 삶이 즐거울 수만은 없듯 책도 마찬가지니까. 책 안에 삶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거나 흥미로워 보이는 책을 집었을 때, 추천받은 책, 사랑하는 사람이 읽는 책, 서점에 보이는 신간, TV나 SNS, 팟캐스트에서 소개하는 책 등등. 여러 경로를 통해 다양한 책을 읽으며 내가 모르던 삶을 너무 많이 알게 됐다. 즐거운 삶만큼이나 전혀 즐겁지 않은 삶을. 그런 삶을 만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작아졌다. 몰랐던 건 알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게 어려웠다. 일상이 흐트러지고 마음이 짜부라지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특히 요즘이 그랬다. 오로지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 동물 이야기를 읽으며 며칠을 죽은 것처럼 지냈다. 힘을 쥐어짜서 채식하는 사람들의 글과 책을 읽는데 또 마음이 답답해졌다. 동물이 아니라도 괴로운 삶은 수도 없이 많지만, 유난히 더 마음이 동하고 괴로워지는 부분이 있으니까.
어쨌든 닮고 싶고 동경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나 글을 찾아 읽는데 이상하게 더 망가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욕이 가득한 상태였다가 점점 ‘안 되겠다.’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없구나. 이렇게 살 수 없구나. 그들에 비해 내 그릇의 크기는 작고 깊이도 얕구나.
내 그릇의 크기를 처절하게 느꼈다고 해야 할까.
그릇에 담기는 이야기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나는 무겁고 힘에 겨워서 결국 그릇을 뒤엎고 만다. 잠시 모든 걸 비워내고 망나니처럼 살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고는 했다.
며칠 전에도 그랬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펑펑 울고 새벽 내내 술만 마시다가 겨우 일어나 정신을 붙잡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일과 관련된 미팅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일 얘기 반 사는 얘기 반을 나누다가 문득 “요즘 어떠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오랜만에 받는 질문이라 잠시 멈칫했다가 좀 무기력하다고 답했다. 나 역시 형식적으로 어떠시냐는 말을 건넸는데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건 좋은데, 사실 버거워요. 몰랐던 걸 너무 많이 알게 되거든요.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뭐라고요? 순간 그분의 손을 덥석 잡고 싶었다.
“저도 그래요, 저도 그렇다고요! 몰랐던 걸 너무 많이 알게 되니까 손이 달달 떨려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악몽에 시달린다고요. 살아있는 게 마치 죄악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사람이 싫고 저도 싫어요!”라는 말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부담스럽다. 그냥 공감한다고 했을 뿐.
유익하고 신나는 이야기를 접한 날이면 눈이 번쩍 뜨이고 정신이 맑아지지만, 화가 나고 슬프거나 부끄러운 감정을 꼬집는 이야기를 만난 날에는 마치 정전이 된 것처럼 하루가 캄캄해진다. 잠시 기절했다가 깨어나는 기분이다. 아니,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분일 때도 있다.
하지만 감당할 시간이 필요한 거 같다는 말이 구원처럼 다가왔다. 맞아, 뭐든 시간이 필요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부피만 커지고 가벼워지는 것도 있지만 작고 단단해지는 것도 있잖아. 한 번에, 바로 되는 게 어디 있어?
요즘은 이상적인 삶을 좇기 위해 애쓰다가 나가떨어지는 대신 내 그릇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음을 뒤흔드는 커다란 이야기를 만나면 잠시 쉰다.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내 일상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도전을 꾀하고 실천한다. 실패한다고 해서 그릇을 뒤엎지 않는다. 이야기를 쌓고 묵히면서 시간이 지나면 작고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위에 또 다른 이야기를 쌓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이 과정은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라고, 그렇게 여러 번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이건 다음에 말해야지. 또 서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감당하자고, 그냥 눈 감고 피해버리지만 말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하지 않았다. 피하는 게 비겁한 건 아니니깐. 내 말이 부담이자 강요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게 눈을 감고 피하는 건 곧 실패이자 죽은 시간이다. 그래도 끝이 아니라는 걸 이 책과 뜻밖의 대화를 통해 다시 깨닫게 됐다. 이제는 조금 명랑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채널예스와의 일 년의 시간이 끝났다. 한 달에 한 번, 총 열두 편의 글을 읽으며 아쉬움에 잠시 죽어 있던 하루였다. 중심을 잡지 못하며 소중한 지면을 허투루 채웠던 몇몇 순간을 후회하고 있다. 감상적인 마음으로 맥주까지 마셨다. 촌스럽고 구질구질하지만 이게 내 모습인 걸 어쩌나. 적어도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매번 실패하면서도 다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라는 말처럼 시간을 견디며 조급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럴 수 있기를, 모두 한 생에서 여러 번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걸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제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언젠간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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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희(작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5년간 일했습니다. 10년 넘게 기분부전장애(경도의 우울증)와 불안장애를 앓으며 정신과를 전전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지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떡볶이입니다.
2020.08.11
skyeg641
2020.08.10
그릇의 크기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릇에 무엇을 채울지 고민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릇은 선택하지 못해도, 내 그릇에 무엇을 올려놓고 먹을지는 나에게 달려 있거든요. 우리에겐 완벽한 크기의 그릇이 아니라, 좋은 것을 채우려는 노력의 그릇들이 필요합니다.
작가님 글대로 피하는게 비겁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때론 피하는 일에 위로와 공감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그리 자랑스러울 일은 아닌 것 같아요.
tjdud4378
20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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