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6년 만의 정규 앨범
인터뷰는 전시회 이후 21일 진보의 한남동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넓은 스튜디오에는 닥스킴(Docskim)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듀서들과 작곡가들이 작업을 위해 분주히 오가는 중이었다. 치열하고도 여유로운, 묘한 분위기의 스튜디오에서 피처링, 콜라보레이션, 작곡가 크레디트의 진보 대신 인간 한주현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013년
심리적 문제가 컸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과욕이 됐다. 하루는 고민하다 뮤직비디오를 같이 찍던 박재범에게 대놓고 이렇게 물어봤다. “어떻게 하면 잘돼요?”. 그러니 이렇게 대답하더라. “좀, 담백하게 내야 할 거 같아요. 너무 힘을 줘서 내면 실망할 수도 있으니까...”.
한 방을 노리는 게 아니라 잽 날리듯 가볍게, 부담 없는 자세가 필요했던 것인가.
(자세를 취하며) 너무 이렇게, 힘주고 있었던 거다(웃음). 3년에 한 번쯤 도끼(Dok2)를 찾아가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친구도 박재범과 비슷한 조언을 해줬다.
도끼와 박재범 모두 진보보다 어린 뮤지션이다. 개방적인 성격이 인상적이다.
본성이 그런 게 8이라면 일하다 보니 생긴 성격이 2다. 퀸시 존스, 퍼렐 윌리엄스 등 내가 존경하는 아티스트들을 보면, 그들은 꾸준히 자신을 물갈이하며 롱런의 초석을 닦는다. 항상 새로운 인물과 친분을 쌓으며 새로운 무기를 장착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것은 잃지 않는다. 나에겐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꾸준한 신진대사 활동과 같다.
여러 조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단일 앨범으로 발표됐던 2012년
처음엔
음악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중요하다. '너무 생각하지 말자. 그냥 하자. 그냥 해! 실패해도 돼. 안 좋아도 뭐 어때.'다. 오늘 입고 온 나이키처럼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다(웃음).
지난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타인을 너무 많이 의식해왔다. 후배 뮤지션 누구는 이렇게 잘하는데, 존경받는 선배라면 더 멋진 걸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떨쳐내자는 의지가 앨범의 주제다. 전시회에서 전시한 '숙변'이라는 제목의 작품도 기억이 난다. 이 앨범은 나에게 '숙변' 같았다. 그 묵은 변을 시원하게 '플러쉬(Flush)'한 작품이다.
방금 언급한 대로 1월 17일과 18일, 성수동에서 전시회 형태로 앨범을 소개했다.
보다 많은 분들께 내 작품을 소개하고 설명하고자 했다. 앨범을 소개하는 매거진 형식의 설명서도 만들었고, 정규 앨범 트랙리스트를 살짝 바꾼 음반도 수록했다. 솔직한 나의 이야기를 담았다. 예전보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하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됐다.
진보는 힙합 알앤비 씬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침과 동시에 2012년 소녀시대의 'Gee'를 리메이크한 'Damn'을 시작으로 SM 엔터테인먼트와 함께 협업해왔다. 소속사를 대표하는 샤이니, 에프엑스, 레드벨벳의 노래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방탄소년단의 'Pied piper', 'Anpanman'은 물론 멤버 제이홉의 'Chicken noodle soup' 역시 진보의 작품이다. 당시 메이저 시장과의 교류가 드물던 언더그라운드에서 진보의 콜라보레이션은 분명 독특한 행보였다. 현재도 그는 청담과 홍대, 이태원을 바삐 오가며 주류와 언더그라운드를 자유로이 활보하고 있다.
진보는 “처음 대형 기획사와의 협업할 땐 나 자신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이 되고 나서, '나는 안 바뀌는구나!'하는 자신감이 생겼다.”며 후배 뮤지션들에게 메이저 시장으로의 접점을 넓힐 것을 주문했다. 그는 이센스의
다양한 스타일이 종합된
발라드 곡 '눈을 감아도'다. 한국 사람들에게 노래방에서, 대학가에서, 술집에서 익숙하게 들려오는 멜로디, 정서 아닌가(웃음).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그 느낌을 피하려 노력해왔는데, 이번 앨범에서 '힘을 빼자'는 마음을 가지며 새로운 시도를 더해보고자 했다. 평소 음악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기타리스트 김승현이 곡을 만들고 많이 격려해줬다. 전시회에 방문하신 어머니께서도 '눈을 감아도'에 대해 코멘트를 더해주셨다.
평가는 어땠나.
'아쉽다'였다. “더 풍부한 해석과 감성을 담아야 한다.”라고 뼈 있는 조언을 해주셨다. 칭찬 좀 해주시지...(웃음)
지금까지 진보는
과거 '내가 덜 한국적이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기에 '눈을 감아도'를 마주하기 더욱 어려웠던 것 같다. 많은 발라드 가수들과 비교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지금은 훨씬 여유도 생겼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 무서웠던 걸 해낼 때의 뿌듯함이 있다.
유부남에 대한 찬가 'Baby'에서도 한결 여유로워진 진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Baby'는 <쇼미 더 머니> 시즌 4 우승자 베이식(Basick)의 의뢰로 만든 곡이다. 베이식도 유부남이다. 이후 일본의 그룹 에그자일(EXILE)에게 노래를 보내는 과정에서 뼈대에 살을 붙였고, 출산과 육아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담아 곡을 완성했다. 이런 얘기를 '유부 Flow' 팔로알토에게 들려주며 '유부남의 사랑을 표현해달라'고 요청했다.
여유로운 트랙이 변화를 상징한다면 'Coolest fire ever'는 젊은 힙합 팬들에게 화제다. 스윙스, 저스디스, 쿤디 판다 등 다양한 래퍼들의 단체곡이다.
LA에 유학할 때 친해진 친구들이 있다. 한 명은
언급한 것처럼 최근 2020년대를 맞아 2000년대 초 스타일이 상당 부분 돌아오고 있음을 체감한다. 이모 코어, 엔이알디(N.E.R.D.)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이 다시 유행으로 자리하는 모습인데.
다양한 부분에서 유행이 돌고 돈다는 걸 확인하고 있다. 이펙트를 예로 들자면, 한동안은 리버브 강한 웻(Wet)한 느낌이 강세였으나 최근엔 드라이(Dry)한 사운드로 가는 추세다. 멜로디도 마찬가지다. 지난 10년간 아주 단순한 진행의 선율이 대세였으나 한계에 부닥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우울했던 곡 분위기 역시 달리지고 있다. 여러 단서를 통해 2000년대의 유행을 체감한다.
얼터너티브 록이 힙합의 영역으로 들어온 '사랑꾼'에서도 그 무드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랑꾼'은 2014년경 밴드 워크맨십(WRKMS)의 프로젝트로부터 출발했다. 당시 워크맨십이 “모스 데프(Mos Def)를 생각하며 만들었는데 형이 필요해”라며 피처링을 부탁한 곡인데,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내가 갖고 있던 곡이다.
진보는 앨범에 참여한 해외 아티스트들을 소개하며 “이 친구들은 나에게 단순한 피처링 가수들이 아니라, 정말로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동시에 그는 이와 같은 행보가 자신이 설립한 슈퍼프릭레코드(Superfreak Records)의 국제적인 지향점과 일치함을 강조했다.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전 세계적으로 유의미한 공조를 이루고 싶다”는 계획은 상세하고도 구체적이었다.
슈퍼프릭레코드 설립 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처음 제작사를 설립했을 때와 현재를 비교한다면.
슈퍼프릭레코드의 핵심 가치가 있다. 첫째는 진보적인 스탠스다. 계속해서 새로운 음악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일리(Sailli), 다울(Daul), 비앙(Viann) 등이 2010년대 꽤 성과를 낸 영역이다. 두 번째는 국제주의다. 그간 도달하기 힘든 부분이었는데, 지난해 찰리 태프트(Charli Taft)가 함께한 다울의
다시 말하자면 이번 앨범으로 '인터내셔널'의 초석을 닦은 셈이다. 작품에 참여한 해외 아티스트들을 소개해달라.
'Bed shaker'에 참여한 런던 출신 피닉스 트로이(Phoenix Troy)는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보다도 낮은 목소리를 가졌다. 2009년경 마이스페이스(Myspace)를 통해 만난 친구인데, 그가 추천해주는 노래는 정확히 내 취향을 겨냥한다. 지난 10년 동안 '무드 뮤직 프릭스(Mood Music Freaks)'라는 유닛을 계획하며 협업을 의논해왔는데 이제야 함께하게 됐다.
'해주면 돼'의 파리 출신 누누 패리스(Nounou Paris)는 한국 알앤비와 가요에 관심이 많다. 돈을 모아 파리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 중이고, 한국에서 프로듀서로 성공하고자 분주히 노력하는 아티스트다. 피닉스 트로이와 함께 나의 '소울 프렌드'다.
'갈매기'에 함께한 LA 출신 디지털 대브(Digital Dav)는 '3년 안에 무조건 뜬다(Im'ma blow up in 3 years)'는 자신만의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미국 예능 프로그램이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도 꼭 이 한마디를 빼놓지 않는다. 미국적인 정서, 한국적인 정서 모두 잘 맞는 친구다.
'잊어버려'의 킨타로(Kintaro)는 더 인터넷(The Internet)의 전 멤버다. 형이 썬더캣(Thundercat)이고 아버지도 유명한 재즈 뮤지션인 천재 집안이다. 이 친구와는 '특이한 것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통한다. 평범한 진행을 싫어하고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한다. 킨타로의 '이상한' 음악을 듣다 보면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화려하고 대담하지만 진지하다.
진보는 일찍이 고교 재학 중 자신의 아티스트 이름을 정했다. 이후 그는 끊임없이 고정관념과 편견에 맞서는 괴짜(Freak)로 혁신을 만들어왔다. “2005년 데뷔할 때 사람들은 '한국말로 알앤비를 할 수 없어'라 말했다. 2012년
“앞으로 10년은 음악보다 더 큰 표현을 하는 사람, 자유로운 존재를 지향할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는 뮤지션인 줄 알았는데, 진보가 표현하고자 하는 영역은 훨씬 깊고 넓었구나!'라는 깨달음을 주고 싶다.”. 진보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고 또한 여유로웠다. 새삼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가 절로 흘러나왔다.
진보가 최근 즐겨 들었던 음악, 관심 있는 장르는?
친한 친구가 소개해준 정보에 의하면 최근 뉴욕의 트렌드는 하우스 음악, 그중에서도 백인이 아닌 흑인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하우스 음악이라 한다. 최근 UFC 선수 코너 맥그레거가 올린 영상을 보면 그가 직접 고용한 디제이들이 트는 음악이 모두 그런 블랙 하우스 음악이다. 관심 있게 듣고 있고, 탐구할 생각에 설렌다. 또 인상 깊게 들은 아티스트는 영국 싱어송라이트 라브린느(Labrinth)다. 음악에 대한 레벨을 한 단계 높였다. 요즘 아프리카 아티스트들의 음악도 즐겨 듣는다. 비욘세의
튼튼하고도 다양한 시도를 지속하며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커리어를 쌓아 올린 진보다. 끝으로
사람들이 '진보'라는 단어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는 말 그대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뒤로 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퇴보하고 싶은 사람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전진하고 발전하며 나아가고 싶다. '진보'라는 단어를 상징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고, 진보라는 단어를 재정의하고 싶다. “너 진보? 나 보수”하는 진보가 아니라(웃음).둘째로는 표현주의자로 새겨지고 싶다. 아티스트, 뮤지션 등 다양한 직함이 있지만 그 이름에 나를 다 담을 수 없다고 본다. 내가 존경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도 커리어 초기엔 자신을 작곡가로 인식했다. 끊임없이 의문하고 시도하며 부수는 사람, 그것을 전시회, 앨범 등으로 다채롭게 표현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한다. 정력적인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