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 “삶의 모든 순간에 빨강머리 앤이 있었다”
늘 빨강머리 앤처럼 상상력을 가동하며, 꿈꾸듯이 살 순 없을 거예요. 다만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해 생각하는 게 낭만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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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이 3주년을 기념해 한정판 ‘윈터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보들보들한 질감의 블랙 벨벳 표지에 반짝반짝 은박의 눈꽃이 수 놓인 이번 에디션은, 35만 독자가 사랑한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의 세 번째 에디션이다. 첫 번째 레드 에디션은 10만 부 돌파 기념으로 2016년 12월 출간했고, 두 번째 화이트 에디션은 30만 부 돌파 기념으로 앤의 고향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다녀온 백영옥 작가의 여행기를 수록하여 2017년 12월 출간했다.이번에 세 번째로 선보이는 ‘윈터 에디션’에는 백영옥 작가가 올겨울 전하는 따뜻한 메시지와 친필 사인(인쇄본)이 수록되었다. 기존의 에디션과 달리, 애니메이션 원작의 포근한 겨울옷을 입은 앤과 다이애나를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이번 에디션의 차별점이다. 빨강머리 앤을 통해, 일상 속 낭만을 잊지 않는다는 백영옥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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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의 세 번째 스페셜 에디션, 윈터 에디션이 출간되었습니다. 수많은 캐릭터 에세이 사이에서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이 이토록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가 있을까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은 제가 온갖 종류의 실패를 경험하고 실수를 반복하고 있을 때 앤이 제게 해준 이 말에서부터 시작해요.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 걸요!” 우리는 사람이라, 늘 실패하고 실수해요.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죠. 그럴 때면 앤의 미소와 맑은 메시지가 간절하게 느껴지는데, 많은 분들이 비슷하게 느끼신 것 같아요. 너무 늦었다는 생각 때문에 포기해버리고 싶은 우리들에게 앤의 이런 메시지가 선물처럼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페셜 에디션 출간으로 이어지는 거라고 봐요. 


 저는 상상력을 늘 마음의 근육 같은 거라고 말하곤 합니다. 근육은 쓰지 않으면 퇴화됩니다. 다쳐서 며칠만 침대에 누워 있어도 근육의 많은 부분이 소실돼요. 마음의 근육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림을 보는 것 역시 일종의 근육을 자극하기 위한 행동인 거죠. 저는 앤이 상상하는 ‘내일’의 정의를 정말 좋아해요. 앤처럼 ‘내일은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상상하면 오늘 하루 망했지만, 정말이지 내일은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요. 앤이 한 말 중에는 감기에 먹는 비타민 같은 말이 많아요. 

 

2016년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이 첫 출간되고 난 이후,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 『곰돌이 푸, 행복은 매일 있어』 와 같이 캐릭터가 등장하는 에세이 붐이 일었습니다. 사람들이 캐릭터를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시대가 취향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처럼 학벌이나 나이, 같은 고향으로 연대하는 시대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취향’으로 뭉치거나 흩어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특히 고도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선 특정 브랜드를 좋아하거나,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있는 것처럼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표현 양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 국내에서 방영되던 1980년 중후반 비슷한 시기에 <키다리 아저씨>나, <플란다스의 개>, <미래소년 코난> 등등이 방송을 탔습니다. 제가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을 내고 제목을 본 제 선후배들이 그렇다면 나는 ‘강백호가 하는 말’을 내겠다, ‘미래 소년 코난이 하는 말’을 내겠다, 라는 말을 농담처럼 종종 했어요. 이 예언적인 말들이 실제 현상이 되기까지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어요. 한때의 취향이 추억으로 진화해 거대한 흐름을 만든 거죠.   

 

소설 출간 이후 112년이 지났는데도 <빨강머리 앤>은 영화, 애니메이션, 뮤지컬, 드라마 등 여러 형태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콘텐츠입니다. 다른 캐릭터보다 ‘빨강머리 앤’에 대한 반응이 더 뜨거운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앤에 대해 유달리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제가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 특히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 같습니다. 이런 소설은 지금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정한 시대에 흐트러진 머릿속을 깨끗하게 정렬하는 효과를 줍니다. 마치 청소를 한 것처럼 말이죠. 


 열린 결말과 선과 악의 불분명한 경계를 현대성의 지표라고 본다면, 이런 소설은 비교적 선명한 인과관계가 작동하는 세계인 셈이죠.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복을 받고, 세계는 선한 질서에 의해 움직일 것이다, 라는 그런 믿음 말이에요. 변화무쌍한 현대성이 줄 수 없는 긍정과 위안이 이 세계 안에는 있어요. 


 원인이 되는 삶을 살면, 그 원인에 합당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믿어왔던 세계예요. 가령 건강해지고 싶다면 운동을 해야 하고, 외국어를 잘하고 싶다면 낯선 단어를 외워야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착하게 살아라, 남과 나누어라,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 같은 교육도 그런 믿음 아래에서 선행되어 왔던 것이고요. 


 그런데 점점 기존의 믿음들이 와해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도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천하의 나쁜 놈이 부자가 되고, 선한 사람이 복을 받기는커녕 억울해지는 상황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걸 알게 되면, 지금처럼 세상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 있다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됩니다. 가능성이 모두 열려 있는 세계란 말은 선택에 대한 비용이 높다는 뜻이니까요. 다르게 말해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불안감은 높아지죠. 


사람들에게는 자유롭고 싶지만 동시에 안정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요. 이건 인간이 가지는 자기모순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순 사이에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앤’은 적절한 균형을 가지고 있는 삶을 살아요. 우리는 그 균형점을 바라보며 일종의 위안을 느끼는 것이고요.  


그 시절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제약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앤은 진취적인 여성이었어요. 여성이 진취적이어서 받는 불필요한 오해나 책임도 컸습니다. 하지만 앤은 나아가죠. 앤은 자기감정에 솔직합니다.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상상력이 많다는 건 요즘처럼 크리에이티브, 창의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앤 셜리는 지극히 현대적인 사람이에요. 앤이 고전이 된 이유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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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과 한마음처럼 이야기하는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위로받았다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이 책이 작가님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는지, 혹은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 궁금합니다.
  
프린스에드워드섬 여행기를 쓴 적이 있었는데, 글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적었어요.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 어쩌면 그것이 앤과 내가 만든 33년간의 관계였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쓰면서 제 삶의 모든 순간에 앤이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에도 앤은 제 마음속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죠. 앤과 저는 굳이 시간을 내어 만나야 하고, 마음을 먹고 찾아가야 하는 관계가 아니었던 거예요. 언제나 함께 있었으니까. 그 사실이 제게 큰 위로가 됐어요. 많은 분들에게도 저마다의 앤이 있었으면 해요.

 

팍팍한 일상 속에서 앤처럼 약간의 낭만을 간직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있을까요? 앤을 보면서 터득한 작가님만의 실천 방법이 있는지요?

 

창문을 열어 하늘의 구름을 자주 보세요. 길가의 꽃을 보면 사진만 찍지 말고, 냄새를 한번 맡아보세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머그컵이 아니라 가장 예쁜 손님용 찻잔에 차를 우려 마셔 보세요. “아끼다 똥 된다”라는 말을 저희 할머니가 자주 하시곤 했는데, 저는 나이 40이 넘어서야 이 말이 진정 ‘지혜’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무엇보다 나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마세요. 막연히 나를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앤처럼 행동하세요.  


늘 앤처럼 상상력을 가동하며, 꿈꾸듯이 살 순 없을 거예요. 다만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해 생각하는 게 낭만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돼요.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이라는 걸요. 그러니 삶이 기대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게 일상 속에서 낭만을 고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해요.

 

바로 지금, 우리의 곁에 앤이 있다면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앤은 회복 탄력성이 큰 사람이에요. 마틴 샐리그먼이라는 행동 경제학자의 표현대로 하면 ‘긍정의 화신’인 셈이죠. 앤은 행복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늘 행복 쪽을 ‘선택’하기 때문에 행복한 겁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가보지 않더라도, 예상대로 되지 않더라도, 앤은 기필코 행복해지는 쪽을 선택하거든요. 어떤 사람의 눈에는 그게 ‘자기기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컵에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컵에 물이 반밖에 차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기필코 다르다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기어코 행복해지는 앤의 능력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의 후속편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나요?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실 텐데, 앤의 프리퀄 격인 애니메이션이 있어요. 제목은 <안녕, 앤>이고요, 앤이 마릴라와 매슈의 집에 오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담고 있어요. 앤이 모든 게 서툰 다섯 살이던 시절부터 시작하는데요. 정말 가슴 아픈 내용이 많습니다. 마릴라와 매슈를 만나기 전에 앤은 거의 아동 학대 수준의 노동을 해야 했거든요.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면서 처치 곤란한 아이 취급을 받기도 해요. 고아원에 가서도 앤에겐 암담한 일들만 가득했어요. 그럼에도 앤은 아주 작은 곳에서도 기쁨을 찾아내며 버텨요. 그러니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앤의 ‘기어코 행복해지는 능력’은 앤의 생존 전략이었고, 동시에 앤이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안전지대가 아니었을까 해요. 다음 책에선 그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앤이 어떻게 그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들려주게 될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된 앤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으신가요?

 

앤, 네가 한 모든 말이 맞진 않더라.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네 말이 맞길 간절히 바라며 지금도 살고 있어.

 

 

 

 

* 백영옥


2006년 단편 「고양이 샨티」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2008년 첫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 시 조찬모임』, 『다이어트의 여왕』, 『애인의 애인에게』, 소설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출간했으며, 산문집으로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다른 남자』,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를 펴냈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백영옥 저 | arte(아르테)
추억 속 빨강머리 앤의 웃음, 실수, 사랑과 희망의 말들을, 내 곁의 소중한 사람과 함께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올겨울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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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