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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치료 용어 중에 ‘아하 경험(aha experience)’가 있다. 맞다. 그 의성어 “아하!(AHA)“다. 상담 중에 치료자의 해석에 내담자가 ‘맞다. 그거지!’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만날 수 있는데, 이때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단어, 아하를 통째로 용어로 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퍼즐의 한 구석이 맞춰지면서 전체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 단단해서 깨지지 않을 것 같던 바위에 쩍하고 금이 가면서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순간이다. 엄청나게 깊은 울림이 있는 전체를 흔드는 임팩트보다는 눈으로 볼 수 있던 것 에서 안보이던 연관성이나, 패턴이 발견되는 그런 현상에 가깝다.
꼭 정신치료 세션이 아니라고 해도 “아하!”하게 될 때가 가끔 있다. 무심하게 지나치던 일상에서 연관성이나 패턴, 색다른 면을 관찰하게 될 때 인생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아직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것이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 말이다. 그 순간은 쉽게 오지는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아하!’를 찾기 위해 무던 애를 쓴다. 좋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러 가거나, 훌쩍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지만 자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차라리 관점을 바꿔서 평소의 일상에서 찾을 수는 없을까? 아쉬움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런 일에는 광고를 하는 사람이 전문가다. 언제나 일상을 관찰하고, 새로움을 찾아내고, 약간 비틀어 낯설게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어떤 제품이나 회사가 떠오르게 하는 영상을 만들고, 카피를 쓴다. 언어를 가지고 놀고, 전혀 상관 없을 거 같던 일상에서 색다른 울림을 만들어낸다. 놀라게 되는 것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오지에서 만나는 웅장한 이미지와 압도적 지식을 내뿜는 단어의 향연이 아니라 집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평소 지나치던 이미지들, 그리고 내가 매일 쓰던 말들을 조금 비틀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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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해보이지만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결국 디테일의 문제다. 일상의 루틴 안에서 색다른 ‘아하!’를 뽑아내는 능력은 바로 디테일을 찾는 능력에 있다. 그래서 카피라이터나 광고기획자의 책은 재미있다. 정신과 의사들도 책을 많이 쓰는 편이지만, 직종을 볼 때 이들도 만만치 않다.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의 박웅현, 『힘 빼기의 기술』 을 쓴 김하나, 『짜릿하고 따뜻하게』 의 이시은 등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국내 작가만 해도 벌써 다섯 손가락을 넘어갈 기세다.
오늘 소개할 작가 유병욱 역시 카피라이터다. TBWA에서 근무중인 18년차 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첫 책 『생각의 기쁨』 에 이어 나온 『평소의 발견』 은 관찰한 사소해보이지만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평소 일상 속의 디테일의 차이들 속의 메모, 음악, 밑줄 그은 것들을 바탕으로 “아하!”를 뽑아내서 소소하고 짜릿한 울림을 주고 있다.
다른 광고업계 사람들의 책이 그렇듯 수행한 광고캠페인의 뒷 얘기, 카피를 뽑아내는 과정의 고민과 괴로움, 광고가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 느끼는 기쁨 등이 주요 뼈대다.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디테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었다.
하루에도 열 개는 넘게 읽고, 쓰는 메일에서 오타가 발견될 때, 누구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갈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메일에 적힌 오타는 딱 그만큼 당신이 중요하다는 뜻.”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메일을 바로 쓰지 않고 워드를 열어놓고 여러 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고 썼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한 생각이다. 하나의 오타는 실수일 수 있지만 두 개 이상의 오타는 나를 보는 태도일 것이라는 것. 사소함이 결정적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강조한다.
‘사소한 것이 결정적인 것을 말해준다’고 하며 회사의 홈페이지에 잘못된 약도를 찾았을 때 느끼는 실망감, 그 회사가 하는 큰 일에 비하면 진짜 작은 디테일일지 모르나, 그건 사실 큰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소개하는 다른 일화도 있다.
광고 촬영감독이 인정하는 잘 찍은 광고는 멀리서 잡히거나 스쳐 지나가는 보조출연자들이 모두 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모두가 메인 카피를 말하는 주연 배우에 주목을 하지만, 진짜 잘 만든 광고 영상은 보조 출연자들까지도 잘 관리하고 세세한 디테일의 마무리까지 모두 신경을 쓴 것이어야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디테일의 작은 차이에서 큰 울림을 받는지, 지금의 아내와 처음 식사를 할 때, 식당에서 젓가락이 들었던 종이를 확 구겨서 놓고, 그 위에 젓가락을 놓는 행위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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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일을 하면서 사람들은 인정받기를 원한다. 금전적 보상보다 인정과 칭찬이 더 큰 보상이 된다. 큰 광고를 따내기 위해 오래 준비를 한 경쟁 PT를 한다. 모든 동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올라가 광고주들을 의식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곧 깨닫게 된다고 한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고, 스크린에 비춰지는 광고의 내용을 보고 있다는 것을.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덩크슛이 아니라 레이업슛이구나.” 라는 걸 느꼈다.
3주동안 최선을 다해 만든 광고 제안을 위해 백보드를 부술 정도로 힘을 준 멋진 개인기를 부리는 덩크슛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부드럽게 링 바로 앞에서 공을 던져놓고 돌아오는 성공확률 90%의 레이업슛이면 충분했다. 어차피 두 개 모두 들어가면 2점이기는 마찬가지니까. 여기에서 생각이 확장되어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까지 이른다. 결국 관심은 내가 내게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고민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자고 조언하다. 세상은 내게 별 관심이 없으니까. 그저, 소소하게 찬스가 오면 놓치지 말고 레이업슛을 슬쩍 넣으면서 평균 득점을 따내는 일이 우리가 일상에서 요구되는 일들이니까.
저자는 그만큼 우리의 일상은 레이업슛을 넣고 포효하는 선수같은 일은 적다고, 평소의 삶은 아주 평범하기 그지 없다고 그동안은 관찰의 결과를 고백한다. 그러나, 이를 슬퍼하지는 말라고 위로한다.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아이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걸 본다. 평소 A급 연예인의 표정연기를 수없이 보아온 저자지만 자기 아이의 공연을 볼 때만은 긴장과 설렘은 숨길 수 없었고, 자기 아이만 눈에 들어오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다. 그러고 나서 대전의 본가의 어릴 적 앨범에서 유치원에서 교련복을 입고 ‘진짜 사나이’를 부르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전까지는 자신의 눈으로 그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날만큼은 그 옛날 노래를 부르는 저자를 찍어준 부모의 관점으로 서있었다. 며칠 전의 저자와 같이 흥분하고, 틀릴까 봐 노심초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수십년을 거슬러 하나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장면은 여러 세대 동안 매주 유치원에서 벌어지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장면들일지 모른다. 저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평범하지만 시시하지 않아.”
유튜브 10만뷰가 나오거나, 화제의 뉴스에 나올 엄청난 퍼포먼스거나, 재미있는 실수담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시시하지 않은 일이고 보석같은 순간이 벌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담담하게 말한다.
이렇게 평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소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서 삶 전반으로 충분히 확장시킬 수 있을 ‘아하!’의 단초들을 책 전반에서 보여준다. 저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 생각의 재료가 될 일상을 낚시하는 데 게으르지 말기를 권한다. 보석이 될만한 순간들은 놀랍게 평소의 시간들 사이에 박혀서 좋은 관찰자를 기다리고 있으니. 사진 찍고, 메모하고, 기록하는 습관을 강박적으로 만들기를 제안한다. 책에 소개된 패션디자이너 노라 노의 인터뷰 기사에 “성실이 쌓이면 혁신이 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언뜻 들으면 뻔해 보이는 광고 카피들이 사실은 이런 강박적일 정도의 메모하기 습관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런 성실이 디테일의 작은 차이로 큰 울림을 주는 혁신을 만들어낸 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국 디테일에 대한 집착적 관심은 완성도에 대한 집념으로 이어지고, 마음과 시야를 확장하게 해주는 좋은 길이라고 ‘평소의 발견’은 평소의 점심시간에 괜찮은 선배가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듯이 무심하고 평범해 보이나 시시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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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발견유병욱 저 | 북하우스
18년을 광고계에 몸담은 카피라이터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유병욱의 감성적인 인문 에세이로, 감각적이면서도 세련된 문체로 평소의 시간 틈에 숨어 있는 인생의 보석 같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neuwied
2019.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