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오름으로 가는 편안한 산책로
사려니숲은 사시사철 푸르고 높다란 삼나무 속에서 걷기 좋은 길 덕분에 제주도에서 가장 인기 높은 여행지 중 하나이다. 사려니숲은 두 개의 출발지가 있다. 516 도로에서 비자림로에 진입해서 5분 정도 지나면 나오는 입구(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 137-1)와 교래 사거리에서 서귀포 방향으로 남조로를 타고 가면 보이는 입구(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 158-4)이다. 전자는 교통 체증 때문에 주차를 금지해서 자동차를 렌트한 여행객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한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는 후자의 주소가 명확히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사려니숲 붉은 오름 방향'으로 검색하면 된다. 이때 등장하는 '붉은 오름'은 대체 어떤 곳일까?
붉은 오름 정상까지 620m
매년 수만 명이 몰리는 사려니숲에 비해 지척에 위치한 붉은 오름은 무척 한산하다. 나 역시 사려니숲을 수십 번 다녀온 이후에야 붉은 오름에 처음 갔을 정도이다. 여행객 대다수는 붉은 오름 곁을 스쳐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여행객이 내비게이션만 보고 붉은 오름에 잘못 들어오는지, 붉은 오름 진입로 입구에 '사려니숲은 800m 더 직진해야 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하지만 사려니숲만 보고 가기엔 붉은 오름은 무척 아름답고, 소중한 지인들에게만 소개하고 싶은 특별한 오름이다.
야자수로 만든 친환경 산책로
붉은 오름은 붉은 흙 때문에 그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실제 오름의 대부분을 화산송이인 스코리아(scoria)로 덮여 있다. 그렇다고 오름 전체가 붉은 건 아니다. 온대와 난대, 한대 수종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언제 가더라도 울창한 삼나무림과 해송림, 천연림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산수국,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하얀 눈이 쌓인 설경이 그야말로 절경이다. 오름을 찾는 사람이 적어도 아쉽고, 많아도 미안해질 것 같은 신기한 오름이자 숲이다.
오름의 터줏대감 같은 때죽나무
붉은 오름은 입장료(성인 1,000원)를 받는다. 주차료(1,000~3,000원)는 별도이다. 산굼부리 입장료(성인 6,000원)보다는 저렴하지만, 대부분의 오름은 무료인데 첫인상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제주도민이라고 무료입장이나 할인 혜택은 없다. 오름이 속한 표선면 주민만 일부 할인해준단다. 하지만 산책로에 들어선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초반부터 숲이 주는 깊이가 압도적이다. 제주의 대다수 오름과 달리 사시사철 잘 정비되어 있다. 이래서 시설 관리를 위한 입장료를 받는구나, 뒤늦게 이해가 간다.
곳곳에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다
붉은 오름에는 4개의 산책 코스가 있다. 개인별 체력과 날씨, 시간을 체크하고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물론 4개의 코스를 모두 걸어도 된다. 1.7km에 이르는 붉은 오름 건강 등반로는 제법 등산을 하는 맛이 난다. 야자수 매트가 깔린 상잣성 숲길(3.2km / 약 60분 소요)과 말찻오름 해맞이 숲길(6.7km / 약 120분 소요)은 호젓하게 걷기 좋다. 노약자가 있으면 어우렁더우렁길(0.3km)만 걸어도 충분하다.
약 15분 동안 계단을 오르지만 가파르지는 않다
정상 전망대와 분화구 둘레길 중 선택하는 곳
붉은 오름 정상(표고 569m, 비고 129m)으로 가는 길은 인근 사려니숲길과 숲 모양새가 무척 닮았다. 몸통이 굵고 키 높은 삼나무 군락지 사이를 걷는다. 지상으로부터 20cm 정도 간격을 띄운 데크 산책로를 이른 아침에 걸으면 삼나무에서 뿜어져 나온 피톤치드가 미세먼지에 익숙한 도시인에게 청량제 역할을 한다.
붉은 오름 초입에 보라빛 산수국이 만개했다
6월부터 피기 시작한 보라색 산수국이 작은 계곡 사이로 끝없이 군락을 이룬다. 제주의 수국 명소는 어디를 가든 인파로 넘치는데 이곳만은 예외라서 마음에 든다. 덕분에 산수국의 모양새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이름 모를 풀벌레와 산새가 쉴 새 없이 지저귄다. 까마귀 부부는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다가 지나는 나그네를 보고 깜짝 놀라 푸드덕 날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정상 전망대로 가는 길은 작은 오솔길이다
오르막길에 접어들자 천천히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모녀를 지나쳐 간다. 계단을 약 10여 분 오르자 흙길이 나타난다. 새벽 사이 많은 비가 내려 길이 미끄럽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걱정이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지나자 정상이다. 작은 전망대에 오르자 서쪽으로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 백록담 정상이 눈에 훤히 들어오고, 북동쪽에는 여러 마리의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드넓은 목장(렛츠런팜 제주)이 보인다. 붉은 오름의 분화구는 깊지 않지만 면적이 제법 넓어서 정상 둘레길(총 1,480m)을 걷는 데 약 30분 소요된다.
붉은 오름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수십 개의 오름 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준비해간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르는데 아까 만난 모녀가 도착했다. "올라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조금 전에 물영아리 오름에 다녀왔는데, 여기도 정말 좋네요." 잠시 후 모녀가 내려가고 나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 더 가지려고 했으나 작은 날벌레들이 자꾸 달려든다. 땀 냄새 때문일까? 결국, 모처럼 호젓한 시간을 포기하고 하산했다.
일정에 여유가 된다면 붉은 오름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다. 자연휴양림 홈페이지에서 숙박시설 예약이 필수다. (물론 치열한 선착순 예약 경쟁이 필요하다) 가격도 저렴해서 비수기 주중 기준으로 4인실이 32,000원에 불과하다. 세 자녀 이상일 경우 50% 감면해 준다. 숙박시설을 이용하면 입장료와 주차료도 면제된다. 피톤치드 공기를 느끼며 별이 쏟아지는 숲속에서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 접근성 ★★★
◇ 난이도 ★★
◇ 정상 전망 ★★★
아무튼, 술
김혼비 저
'책방 소리소문' 정도선 대표님이 적극적으로 추천한 책이다. 책값은 9,900원에 불과하지만, 책의 재미는 그 열 배도 아깝지 않다. 술을 좋아하든, 관심이 없든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오름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어서, 붉은 오름을 다녀오자마자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캔맥주를 꺼내 마셨다. 여름은 맥주를 위한 계절이 분명하다.
찾아가는 방법
지도 앱이나 내비게이션에서 '붉은 오름 자연휴양림'으로 검색해서 찾아오면 된다. 주차장은 비교적 여유로우며 주차비는 무료이다. 제주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한 번 갈아타면 70분 정도 소요된다. 주차장은 여유로우나 극성수기에는 일찍 갈수록 편하다. 사전에 예약하면 산장 같은 숙소에서 숙박할 수 있다.
◇ 주소 : 서귀포시 표선면 남조로 1487-73
◇ 전화 : 064-782-9171
◇ 홈페이지 : https://www.foresttrip.go.kr/indvz/main.do?hmpgId=ID02030014
주변에 갈만한 곳
사려니숲 (붉은 오름 입구)
사려니 숲길은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사려니 오름까지 이어져 있다. 교래리와 붉은 오름 사이 구간은 약 10km 정도이다. 조천읍 교래리 방향의 사려니숲에는 주차할 수 없지만, 붉은 오름 입구 부근에는 차를 세우고 숲길 트레킹이 가능하다. 화장실과 관리소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관광객 대부분은 이곳을 선택한다. 사계절 언제 가더라도 아름다운 숲이다.
◇ 주소 :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 158-4
렛츠런팜 제주
양귀비와 청보리 등 꽃이 필 무렵에 가면 수만 평의 대지가 온통 신들의 정원으로 바뀐다. 입장료가 없으며, 유모차도 편하게 다닐 수 있게 잘 조성되어 있다.
◇ 주소 :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산 25-2
◇ 전화 : 064-780-0131
◇ 홈페이지 : www.kra.co.kr
제주돌문화공원
한라산 영실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문대 할망과 오백 장군' 설화를 중심 주제로, 제주의 형성과정과 제주민의 삶 속에 녹아있는 돌 문화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박물관이자 생태공원이다. 안개 낀 날에 가면 환상적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 주소 :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119
◇ 영업시간 : 매일 09:00 ~ 18:00
◇ 전화 : 064-710-7731
◇ 홈페이지 : www.jejustonepark.com
4년차 제주 이주민이다. 산과 오름을 좋아하여 거의 매일 제주 곳곳을 누빈다. 오름은 100여회 이상, 한라산은 70여회, 네팔 히말라야는 10여회 트레킹을 했다. 스마트폰으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고 있으며(www.nepaljeju.com), 함덕 부근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운영 중이다.
최경진
4년차 제주 이주민이다. 산과 오름을 좋아하여 거의 매일 제주 곳곳을 누빈다. 오름은 100여회 이상, 한라산은 70여회, 네팔 히말라야는 10여회 트레킹을 했다. 스마트폰으로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담고 있으며(www.nepaljeju.com), 함덕 부근에서 에어비앤비 숙소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