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영 씨는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출판 일을 하기 전에는 영화제작사에서 기획과 마케팅 업무를 했다. 원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는데, 당장 용기가 안 나고 경제적 독립을 빨리 하고 싶어서 월급을 받으며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했다. 오래 준비한 영화가 허무하게 엎어지는 것을 많이 봤고, 기대한 영화가 빛을 보지 못하거나 반대로 예기치 못한 호응과 찬사를 얻는 것, 그를 둘러싸고 많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을 봤다. 한 번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후유증이 심하게 와서 병원에 장기 입원하게 되면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를 계기로 출판 편집자로 전업하게 됐다. 마케터로 지원했지만, 처음 입사한 출판사의 대표가 편집자를 권해서 편집자로 일하게 됐다.
최근에 편집한 책은 『을들의 당나귀 귀』 (부제: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제작하는 동명의 팟캐스트가 있다. 팟캐스트는 ‘노동’ 편과 ‘대중문화와 젠더’ 편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 ‘대중문화와 젠더’ 편은 문화연구자 손희정이 고정 출연하면서 여러 분야의 게스트들을 초대해 이야기 나누는 콘셉트인데, 그 내용을 단행본에 맞게 보완해 엮은 책이다.
바로 전에 작업한 책은 연구자, 활동가, 의사, 변호사들로 구성된 성과재생산포럼과 함께 엮은 『배틀그라운드』 (부제: 낙태죄를 둘러싼 성과 재생산의 정치)라는 책이다. 공교롭게도 『을들의 당나귀 귀』 출간 즈음 ‘버닝썬 게이트’가 터졌고, 지난 4월 11일 낙태죄 위헌 선고가 나면서 『배틀그라운드』 의 저자들이 외쳐 온 선언들이 현실화됐다. 그 때문인지 간혹 두 책이 시의성만 바라보고 빠르게 기획된 책으로 여겨지지만, 두 책 모두 오래전부터, 필자들이 쌓아 올린 연구와 운동의 결과물이다. 『을들의 당나귀 귀』 가 방대하게 흩어져 있어 한눈에 읽히지 않았던 대중문화 속 성평등 이슈를 하나로 꿰어 보는 책이라면, 『배틀그라운드』 는 납작한 줄 알았던 ‘낙태죄’ 이슈를 공론장에 펼쳐 놓고 전방위하게 톺아보는 책이다. 강소영 편집자는 두 책을 내며 지금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즘 독자뿐 아니라 더 많은 분에게 읽히고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과 최근에 좋게 읽은 책을 소개해 주세요. 어떤 계기로 선택하게 되었나요?
제가 어제 러시아에서 돌아왔어요. 2017년 12월에 출간한 『시베리아 시간여행』 (부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베를린까지 횡단 열차에 탄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그 책 1장에서 3장까지의 여정(블라디보스토크-우스리스크-하바롭스크)을 저자 박흥수 선생의 안내로 돌아보는, 언론사 주최 여행에 다녀왔어요. 편집자라고 초대해 주시고 여러모로 배려해 주셔서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특히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신한촌’이 있던 자리라던가, 강제이주열차의 출발지였던 라즈돌노에역이나 페르바야레츠카역에 갔던 일을 두고두고 생각할 것 같아요.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횡단 열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마침 블라디보스토크역에 도착한 날이 북러 정상회담을 마친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기차를 타고 귀국하는 날이었어요. 환송식에서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데 우리는 언제 기차를 타고 이어진 대륙을 횡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여행 때마다 하는 고민인데, 저는 도저히 책을 안 가져갈 수가 없더라고요. 대신 되도록 가볍고 얇은 책, 그리고 이미 읽은 책이나 익히 아는 작가의 신작을 가져가요. 함께 여행하고 싶은 책을 나름대로 엄선해 가는 거죠. 이번 여행에는 황인숙 시집 『리스본行 야간열차』 와 존 버거 소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을 가져갔어요. 밤중에 시베리아 횡단 열차 2등석(4인실) 침대에 누워 기차 소리에 맞춰 소설을 읽다가 불을 껐는데, 차창 밖 까만 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어요. 영원히 이대로 가도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모두 잠든 새벽에는 복도에 앉아 시집을 앞에서 뒤, 뒤에서 앞으로 두 번 읽었는데, 물론 횡단 열차라는 공간과 이국의 밤이 준 기분 탓도 크겠지만, 너무 좋았어요.
“죽고 싶도록 슬프다는 친구여 / 죽을 것 같이 슬퍼하는 친구여 / 지금 해줄 얘기는 이뿐이다 / 내가 켜 든 이 옹색한 전지 불빛에 / 생은, 명료해지는 대신 / 윤기를 잃을까 또 두렵다”( <묵지룩히, 눈이 올 듯한 밤> )
오늘 출근하며 들고 나온 책은 김보영 작가의 『천국보다 성스러운』 입니다. 지난번에 ‘책방 꼴’에 갔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배틀그라운드』 의 필자 박종주 선생님, 삼천포책방의 단호박 님께 제가 안 봤을 만한 책을 골라 달라 부탁했더니, 한 분이 추천해 주신 책이 김보영 작가의 2010년작 『진화신화』 였어요. 그때만 해도 모르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펼쳐 보니 예전에 너무 좋게 읽었던 단편을 쓴 분이었어요. 그런데 최근 너무 근사한 디자인의 책이 나왔길래 얼른 샀습니다.
오늘 선물 받은 책은 오혜진 선생의 비평집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입니다. ‘찾아보기’까지 588쪽이나 되는 두꺼운 책인데요. 저자가 글을 워낙 잘 쓰기도 하지만, 동시대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젊은 문학/문화연구자의 비평을 한 권에 모아 읽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나오는 국내 여성 필자의 단독 저서가 너무 적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이제 더는 아니죠. 그 흐름과 동력에 한몫하는 책이 되길 바랍니다.
평소 책을 선택할 때, 기준은 무엇인가요?
별 목적 없이, 끌리듯 책을 고를 때는 표지가 큰 몫을 하죠. 편집자로서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표지 디자인이나 메시지란 뭘까 늘 생각하고, 또 놓치지 않고 감지하려는 노력을 하는데요. 이를테면 책의 권위, 실용성, 소장 가치를 한껏 드러내고, 해당 분야의 독자층이 익숙해 하고 선호할 만한 판형과 디자인을 따르는 방식이 있겠는데, 그러다 보면 책들이 서로 비슷해지고, 책의 겉과 속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고 또 추구하는 표지는 이런 책이야, 친절히 말해 주기보다는 쓰윽 보여 주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쪽이에요. 그러다 보니 시선이 잘 가는 요소, 중요한 요소에 힘을 주기보다는 사소한 디테일에 티도 안 날 공을 들이기도 해요. 독자들이 책을 읽기 전에는 좀 궁금했으면 좋겠고, 읽고 나서는 뭔지 알 것 같다는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거든요.
편집자로서는 종이 낭비를 많이 하지 않는 판형으로, 띠지 없이, 내구성 있게 책을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데요. 독자로서는 코팅하지 않은 종이를 과감히 사용한다거나, 멋진 디자인과 고급 사양으로 책을 만드는 출판사 책들을 보면서 쾌감을 느껴요. 예를 들면 알마 출판사의 책들. 예전에 제가 편집한 책 중에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라는 책이 있는데, 중세에는 책이 너무 귀해 집 한 채 값으로 겨우 책 6, 7권 구할 수 있었다고 해요. 알마의 책들은 뭐랄까, 책이 귀한 시절, 책의 가치를 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나게 해요. 이것은 한편 책의 권위와 소장 가치를 드러내는 방법이자, 출판사의 브랜드 가치를 강화하는 전략이기도 하죠.
굿즈를 좋아하나요? 잊지 못할 굿즈가 있나요?
수많은 굿즈를 때론 호기심에, 또는 정말 필요해서, 또는 자료(샘플)라는 핑계로 수집해 왔지만, 『히끄네 집』 에 딸린 “우주대스타” 히끄(고양이) 등신대와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가 책 만들다가 귀여워서 기절한 책”이라는 카피가 붙은 『안녕하세요 내 이름은 인절미에요』 에 딸린 ‘인절미’(개) 등신대는 너무나 취향 저격이었습니다. 제가 히끄 등신대를 놓쳐서 내내 슬퍼하다가 이번에 러시아에서 등신대처럼 세워 둘 수 있는 고양이 전신 그림책을 사 왔다는 거 아닙니까. (웃음)
어떤 책을 볼 때, 특별히 반갑나요?
만든 사람들의 훌륭한 면모가 느껴지는 책을 보면 반가워요. 저는 스스로 “판권면 매니아”라고 자주 말하는데요. 모든 책의 판권면을 살펴보거든요. 담당한 편집자나 디자이너 이름을 확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출판사를 나갔고 새로 들어왔는지를 보기도 하고요(살림살이가 나쁘지 않은 출판사의 구성원이 자주 바뀔 때는 노동 조건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같은 저자, 같은 원고라도 어떤 편집자와 디자이너, 출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책이 될 수 있잖아요. 이름밖에 모르는 업계 동료들의 작업 과정을 상상하면서, 누구누구가 만든 책은 이게 장점이더라, 하며 기억하는 거죠. 어쩌다 사석에서 그를 만나면 잘 아는 사람(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고요. 작업자의 고민이 느껴지는 책을 보면 감정이입도 많이 해요. “남의 책을 읽는 게 더 좋다”란 말도 입에 달고 살죠.
또, 무명 저자의 첫 책인데, 너무 좋을 때도 반가워요. 이 저자와 편집자가 운명적으로 만나 책을 엮게 된 과정이 어땠을지 궁금해 해요. 갑자기 김달님 작가의 『나의 두 사람』 이 생각나는데, 부모님과 함께 속초에 여행 갔을 때, 서점 ‘완벽한 날들’에 들렸는데, 마침 책이 있더라고요. 제가 일하는 동안 아이를 양육해 주시는 어머니께 책을 선물했었어요. 아무런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이 책이라면 제 마음을 전했겠죠?
매월 10만 원의 독서지원금이 나온다면, 어떤 분야의 책을 많이 사실 건가요?
“책을 사서 보는 일이 사회운동”이라고 한 정희진 선생의 말씀을 자주 떠올려요. 너무 멋진 말 아닌가요? 저도 책 읽는 속도보다 책 사는 속도가 빨라서 반성을 많이 하고 책을 읽든지 정리하든지 해야 한다는 숙제를 늘 안고 살아요. 또 누구나 ‘지향’과 ‘취향’은 조금 다르잖아요. 쌓여 가는 책을 보면서 제 독서(구매) 성향이 너무나 가파르게 변해 왔다는 걸 느끼거든요. 더 자유로이 넘나들면서, 더 거침없이 책을 사는 데 그 돈을 잘 쓰겠습니다. 이걸 누구한테 말해야 하나. 사장님?
편집자로서 출판계 혹은 독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편집자로서” “독자로서”라는 말을 많이 쓴 것 같은데요, 제가 편집자이기 전에 독자가 아니라면, 편집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래서 독자로서 더 즐기려고, 누리려고 노력해요. 혹시 책을 사랑하는, 그래서 이 ‘갑툭튀’ 편집자의 아무 말을 여태 읽으신 독자가 있다면, 가끔씩 책 만드는 사람, 책으로 먹고사는 많은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어요. 책이 안 팔리고 안 읽히는 시대라고 하니(물론 제가 일하는 동안은 늘 그랬습니다), 어떻게 하면 책이 세상에 나와 독자들을 오래 만날 수 있을지, 만나야 할 독자에게 끝내 닿을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하는데요. 독자들도 좀 더 책에게 다가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각자 좋은 책을 캐내고, 나누다 보면 더 다양한 책과 풍성한 사유를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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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사람김달님 저 | 어떤책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삶도 쉽게 규정할 수 없고, 어떠한 조건에서도 사랑은 찾아든다는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 주는 일일 것이다.
엄지혜
eumji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