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비가 멈추고 구름이 걷히고 별빛이 작은 창으로 든다. 이곳은 도시가 아니고, 내 집이 아니며, 나는 스탠드 조명에 의지한 채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다. 고요한 밤이다. 하루를 한 장의 이미지나 한 줄의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이 거울 속에 보이고 나는 소리 없이 그를 마주하고 있다. 낯선 곳에서 내 얼굴은 나에게도 익숙하지 않다. 침묵은 모든 걸 낯설게 한다. 김은지 시인의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라는 시집을 펼쳐 읽기도 전에 제목에 붙들렸다.
책방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는 이는 혼자다. 책방에서 홀로 빗소리를 듣는 이는 쓸쓸하지 않고 평온하다. 그이가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 때문. 책으로 둘러싸인 이가 읽던 책을 덮고 가만히 자연을 감상 중이다. 그때 그 얼굴은 오로지 침묵으로 자연에 밑줄을 긋는다.
책에 파묻혀 빗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사운드에 귀를 기울이고 침묵에 빠져들었다가 텅 빈 종이 위에 한 줄의 문장을 적는 이를 누군가는 시인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위대한) 시를 ‘침묵 속에 박아 넣은 모자이크’(막스 피카르트 지음, 『침묵의 세계』)라고 명명했다. 위대한 시에 관한 정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지 간에 시의 토대가 말이 아니라 침묵이라는 것, 시가 오로지 말의 산물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곱씹음 직하다.
오래, 자주 잊곤 하지만 우리는 시, 지금 여기에 없는 듯 보이는 말을 통해 지금 여기의 말에 눈 돌린다. 지금 여기 없는 말, 침묵에.
시는 원초적으로 말에의 경험이 아니라 침묵에의 경험이다. 시를 읽으면 말이 승하지 않고 침묵이 승하는 이유, 시를 읽다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전해 받는 것도 모두 ‘헐’ ‘대박’ ‘짱’ 같은 줄임말로는 쉬이 얻을 수 없는 침묵을 체험해서이다. 말이 나의 내면에 가 닿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면, 침묵은 나의 내면에 가 닿은 가장 먼 길. 하여 시를 통해 마주하게 되는 나는 더 멀리에 있는 나다.
내 마음은
비 오는 날을 위해
만들어졌다
난 내일 필 거야
그건 벚꽃의 계획
그러나 가지마다
다랑다랑
빗방울 꽃 피는 것을
몰랐다
이렇게 예쁜데
왜 비 오는 날마다
보러 나오지 않은 거지
나는 너무 내 마음을 몰랐다
비가 와서 산에 안 가고
서점엘 갔다
그래서 비가 온 것이
그렇게 좋았다
지붕을 내려다본다
지붕은
비 오는 날을 위해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내 마음은
비 오는 날을 위해
만들어졌다
-김은지,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중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전문
누구나 시집을 펼쳐 읽는다.
비가 와서 산에 가지 않고 서점엘 가는 게 좋은 이가 벚꽃의 계획을 듣고, 빗방울 꽃이 예쁜 줄 알게 되고, 뾰족한 지붕의 타고난 기능을 깨닫고, “나는 너무 내 마음을 몰랐다”라고 마음을 담담하게 돌본다. 자연의 공간(산)이 아니라 예술의 공간(책방)을 통해 마침내 내 마음이 태동한 연유를 이해하는 이가 나나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그 비 오는 날의 홀로인 자가 나이고 당신이다.
시는 누구나 펼쳐 읽는다.
시는 공평하다. 시는 자신 앞에 선 자가 누구든 그를 ‘나’로 만든다. 그때의 나는 ‘나는 나를 너무 몰랐다’라고 말하는 존재다.
말의 신비로운 점은 그것이 말을 거친다는 것이며, 침묵의 신비로운 점은 그것이 침묵을 꿰뚫고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의 가장 신비로운 점은 그것이 시가 아닌 것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 헐, 대박, 짱에 시가 있다. 비, 구름, 별빛에 시가 있다. 책에 파묻힌 자는 그 자체로 침묵 속의 모자이크 같지만, 그 자체로 시가 되지 않는다. 시는 말함으로써 침묵한다.
오늘은 종일 말하지 않았다. 홀로 걷고 먹고 우산을 폈다 접었다. 꽃비가 떨어지는 나무 아래 서 있었고 꽃잎을 줍진 못했다. 모두 젖어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서점에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빗소리를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공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경험. 시는 그렇게 우리 가까이에 있다. 밤. 혼자. 산과 바다와 들이 있는 곳.
타지에서 나는 홀로였으나 마침내 다시 혼자가 되어서 듣는다. 침묵이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져 내려 말의 지붕을 타닥타닥 두드리는 소리를.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 조금 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벌어진 침묵에 관해서, 닫힌 말에 관해서, 어디에도 없던 마음에 관해서, 시에 관해.
우리는 오늘밤 쓴다.
-
책방에서 빗소리를 들었다김은지 저 | 디자인이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세상을 살핀다. 오후의 벚꽃, 왼쪽 페달, 비디오테이프, 말차 케이크...처럼 일상 속에서 건져 올린 친근하고 감성적인 시어들이 우리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닿는다.
김현(시인)
봄봄봄
2019.05.08
찻잎미경
2019.05.03
비 오는 날을 위해
만들어졌다
- 이 문장에 딱 꽂혔다. 시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