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사람이 도시에서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이름뿐이었으니까. 서로를 부르고 대답할 수 있는 이름. 부르는 순간 세상에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평화와 친밀감과 흥분을 동시에 주는 이름. 단지 소리 내어 부르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체취를 상기할 수 있는, 동시에 서로의 껍질 안쪽에 자리한 영혼이 돌출되고 마는, 그런 이름 말이야.
구병모 작가의 소설 『버드 스트라이크』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인터뷰 - 구병모 소설가 편>
오늘 모신 분은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소설가입니다. 10년 동안 쓰신 작품이 12편!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계시고요. 판타지, SF, 스릴러부터 페미니즘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분입니다. 무엇보다 청소년 독자와 성인 독자 모두를 매료시키는 작품의 ‘힘’이 대단한데요. 『위저드 베이커리』 , 『아가미』 , 『파과』 ,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네 이웃의 식탁』 , 『단 하나의 문장』 등.... 누군지 아시겠죠? 『버드 스트라이크』 로 돌아온 구병모 작가님입니다.
김하나 : 오늘이 마침 『위저드 베이커리』 발행 10주년 되는 날이에요. 최근 그 책을 봤더니 49쇄더라고요.
구병모 : 49세요?! 아, 저는 마흔아홉 살이라고 하시는 줄 알고(웃음)...
김하나 : ‘ 『위저드 베이커리』 _작가 구병모(49세)’ 이런 건가요(웃음). ‘49세’가 아니라 ‘49쇄’입니다(웃음). 대단한 성과인데요.
구병모 : 다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많이 읽어주시고 찾아주셔서.
김하나 : 『위저드 베이커리』 가 등단작이었잖아요. 등단 10주년을 맞으신 것이기도 한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구병모 : 많은 분들이 찾아주시고 꾸준히 읽어주셔서 10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쓰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독자님들께 감사드리고요. 사실 9년쯤 됐을 때 ‘조금 있으면 나한테 굉장히 큰 분기점이 찾아올 거야’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약간 민망해지기도 하더라고요. 20, 30년이 아니고 10년이잖아요. 회사에서 10년 근속하는 분들도 계신데, 객관적으로 볼 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하나 : 아휴, 10년 근속하면 포상이 나옵니다(웃음).
구병모 : 그렇죠(웃음).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하는 느낌도 들고요. 이제 10주년 됐다고 많은 분들이 언급해주시니까 뿌듯한 느낌도 들어요. 무엇보다 ‘그 기간 동안 한 순간도 놓아본 적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래서 앞으로 힘이 닿는 대로 또는 여건이 되는 대로, 건강이 허락한다면 30년까지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하나 : 이번 『버드 스트라이크』 는 하나의 세계를 저희 앞에 꺼내놓으신 거잖아요. 이런 세계를 구축하려면 시간도 꽤 많이 들 것 같고, 세밀한 부분까지 만들어나간다는 게 굉장히 공력이 드는 일일 것 같은데요. ‘이걸 어떤 캐릭터로 만들어 보면 좋겠다’라든가 ‘그 세상에는 이런 동물이 살 거야’ 하는 생각들을 평소에 자주 하셨나요? 아니면 작업할 때만 집중해서 하셨나요?
구병모 : 최소한 『버드 스트라이크』 에 관해서만큼은, 어느 한 시기에 집중해서 했다기보다는, 띄엄띄엄 오랜 세월에 거쳐서 떠올렸던 것 같아요. 그 속에 나오는 동물, 식물, 인물들 하나씩을.
김하나 : 그러면 인물부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름이 다 청감이 독특하고 좋아요.
구병모 : 누구 이름이 제일 좋으셨어요?
김하나 : 저는 ‘루’였어요. ‘루’라고 하는 이름은 어떻게 착안하셨나요?
구병모 : 이 소설을 처음 구상했을 때부터 ‘루’라는 이름이 제일 먼저 정해져 있었고, 그 다음에 정해진 이름이 ‘탄’이에요. 나머지 인물들은 조금씩 늦게 떠올리고, 한참 있다 떠올리고, 나중에 또 바뀌고,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는데요. ‘루’ 같은 경우에는, 당시의 기분 탓인지 아니면 순전히 발음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구상 노트에 쓸 때는 ‘눈물 루’자를 썼어요.
김하나 : ‘눈물 루’가 아닐까 잠깐 생각하기는 했지만, ‘눈물 루’에서 시작된 캐릭터치고는 아주 많이 멀어졌네요.
구병모 : 그렇죠. 그래서 지금은 ‘쌓을 루’자로 생각하고 있어요.
김하나 : 『파과』 라든가 『아가미』 같은 소설을 읽어 봐도 캐릭터들 이름들이 ‘강하’, ‘곤’, ‘조각’, ‘투우’처럼 정말 범상치 않아요. 글자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름에 쓸 수도 있을 법한 음절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조합은 없었던 것 같은 거예요. 너무 독특하고, 신화 속 인물 같기도 하고요.
구병모 : 아, 그런가요(웃음).
김하나 : 『버드 스트라이크』 에 나오는 ‘시와’, ‘다니오’ 같은 이름들도 어감이 좋았어요. ‘마이’도 재밌는 이름이라고 생각했고요. 작명소를 하셔도 잘 하실 것 같아요(웃음). 구병모라는 필명을 지으실 때는, 남자 이름 같은 이름을 지으려고 하셨나요?
구병모 : 남자 이름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남자 이름이죠(웃음).
김하나 : 제가 아는 분 중에 ‘구O모’라는 이름의 여성분이 계세요. 그래서 구병모가 필명이라는 걸 몰랐을 때는 막연히 가문의 돌림자라고 생각는데요. 보통 듣기로는 남자 이름이죠.
구병모 : 처음의 의도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게 중성적으로 짓는 것이었어요. 결과는 남성의 이름에 훨씬 가깝게 되었는데요. 지금은 많은 분들이 이렇게 불러주고 계시니까 만족하고 있어요.
김하나 : 그러면 이름을 지으실 때는 ‘내가 여성작가라는 게 드러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셨던 거군요.
구병모 : 네. 제가 20대 때 어느 선생님께서 지나가시면서 하신 말씀인데요. ‘요즘 한국 문학에서 잘 나가는 작가들은 다 여성 작가야, 다음에 공모전 하면 나는 여성 작가라면 안 뽑고 싶을 것 같아’라는 말씀을 농담처럼 하셨는데, 그때 공모전을 계속 준비하면서 떨어지고 있었던 저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었어요. ‘그러면 이름이라도 바꿔서 내볼까’ 싶었던 거죠(웃음).
김하나 : 마치 조앤 롤링이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발표했던 것처럼, 또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같은 SF 작가들이 여성적인 이름을 버리고 남성 이름으로 활동해서 훨씬 유리한 지점을 차지했던 것처럼... 아니죠, 조앤 롤링은 유리하지는 않았죠. 훨씬 더 불리했죠. 그런 식으로 독자에게 연막을 치는 전략이었던 것 같아요.
구병모 : 그런 느낌이 있네요.
김하나 : 작명소 하시면 잘 하실 것 같고요(웃음). 그러면 ‘루’와 ‘탄’ 외에, 이를테면 ‘다니오’라든가 ‘지요’, ‘가하’ 같은 이름들이 탁 나오는 순간은 어떤 때예요?
구병모 : 음절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뜻이 먼저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가령 ‘비오’ 같은 이름은 ‘날 비’, ‘까마귀 오’자예요. 그런데 소설 속에 이름의 한자까지 병기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약간 걸리적거리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굳이 밝혀주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부분에는 한자를 빼려고 노력했어요.
김하나 : 만약에 ‘루’ 옆에 한자가 있거나 ‘비오’ 옆에도 한자가 있었다면 조금 더 방해가 됐을 것 같아요. 상상하려고 했던 여지가.
구병모 : 네, 말씀하신 그 부분이에요.
김하나 : 『버드 스트라이크』 가 완성되기까지 7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꿈에서 보셨던 ‘하늘을 나는 아이’가 모티프가 됐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이미지가 7년 동안이나 남아 있고, 집필이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 이유가 뭐였을까요?
구병모 : 7년 동안 이것만 쓴 게 아니어서(웃음)...
김하나 : 사이사이에 많이도 쓰셨죠(웃음).
구병모 : 제가 2011년 9월의 어느 날에, 잠깐 자다가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요. 보통 꿈꾸고 일어나서 조금 지나면 다 잊어버리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횡설수설 하면서 노트에 꿈의 내용을 적어 내려갔어요. 저는 꿈속에서 어떤 아이들을 보았는데, 그 중에 한 명은 자신이 영주의 딸이래요(웃음). ‘영주’가 나오면 왠지 중세시대 성이 떠오르잖아요. 영주의 딸은 성에 살고 있지만, 그 바깥은 우리가 흔히 보는 고층 빌딩인 거예요. 영주의 성에 한 무리의 아이들이 끌려왔는데, 그 아이들이 다 날 수 있는 아이들이었어요.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성에 끌려왔는데, 영주의 딸이 그 중에 한 아이를 보고서 ‘나를 데리고 하늘을 날아주면 없었던 일로 해줄게’라는 식의 제안을 한 거예요. 그래서 한 아이가 영주의 딸을 업고 성 밖으로 나가서 고층 빌딩 사이를 날아다녔는데요. 이게 꿈이다 보니까 시원시원하게 높이 나는 게 아니고 자꾸 하강세를 그리면서(웃음)...
김하나 : ‘퓽’ 하고 날아간 게 아니라 ‘폴폴폴폴’ 하고 날아갔던 거군요(웃음).
구병모 : 네, 거의 그런 수준으로(웃음). 떨어질 것처럼 나는 거죠. 그리고 이 아이들이 다 날 수는 있는데 날개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잠에서 깨어나고 나니까 이 아이한테 날개를 달아줘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꿈을 기록해놨고, 얼마 안 지나서 장면을 세 파트 썼어요. 첫 장면의 태우고 날아가는 것, 그리고 중간 장면 하나, 마지막 장면 하나를 써놨어요. 줄거리는 이미 다 잡혀 있었고요. 토막 장면을 쓴 건 그 세 파트였는데요. 나머지 빈 공간도 채워 넣어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설정, 장치, 주변 인물들의 스토리들이 들어가게 됐고, 그런 과정에서 특별히 목적의식을 갖지 않더라도 자료를 많이 찾아보게 됐어요. 딱 ‘이거다’ 싶은 게 없어도 일단 무조건 수집을 하고 보는 일종의 수집벽이 생겼고, 또 자료들을 정리를 해야 되잖아요. 그러느라 시간이 많이 걸린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집중해서 쓴 시간은 다 합하면 1년 조금 넘는 것 같아요.
김하나 : 이런 멋진 세계를 어떻게 그리게 되셨는지 여쭤보면 너무 큰 질문일까요?
구병모 : 글쎄요. 일단 핵심이 되는 주요 모티프는 ‘날개’이고, 그건 꿈에서 준 거니까요.
김하나 : 사실 꿈에서 안 줬죠. 날아가는데 날개가 없었으니까(웃음).
구병모 : 아, 생각해보니까 그러네요(웃음). ‘날개’와 어울리는 다른 요소들은 제가 만들거나 찾아내야 되는 상황이었는데, 그 요소들을 그려내느라 그만큼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예를 들면 처음에 날개만 생각하고 그 날개가 하는 일은 하늘을 높이 나는 것 정도까지만 생각했다가, 나중에 여러 책과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페르시아 신화에 굉장히 커다란 새가 등장한다는 대목을 보게 됐어요. 그냥 크기만 한 새가 아니고 포유류와 조류의 혼합이라고 제시되어 있었는데요. ‘그러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딱 맞네’ 하면서 그 부분을 계속 봤어요. 그 새의 이름은 ‘시무르그’라고 하는데요. 그 새가 페르시아 왕조를 대대로 지켜줬대요. 시무르그에게는 의료 기능이 있어서, 부상당한 전쟁 영웅이나 아픈 사람을 낫게 해줬다는 거예요.
김하나 : 날개로 감싸 안아서요?
구병모 : 날개로 감싸 안았는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날개로 감싸 안았을 것이 가장 어울리지 않나 라고 생각이 들었고요. 소설 속의 ‘초원조’가 시무르그한테서 그 이미지가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김하나 : 초원조가 익인들의 세상에서는 신 같은 존재죠. 시원이기도 하고요.
구병모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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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작가)
브랜딩, 카피라이팅, 네이밍, 브랜드 스토리, 광고, 퍼블리싱까지 종횡무진 활약중이다. 『힘 빼기의 기술』,『15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등을 썼고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