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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최대한 유예하는 편이다. 변화를 거부하거나 미룬다는 표현은 적당치 않고, ‘마땅히 받아들이지는 않을 뿐’에 가깝겠다. 업무부터 사소한 것까지 대부분의 일상사에서 그런 편인데, 식음료 취향 또한 그런 성향 중 하나다. <엽문>에서 견자단은 찻잔을, <애니홀>에서 다이아나 키튼은 샴페인이 든 고블렛 잔을, <카모메식당>에서는 이딸라 오리고 컵에다 차나 커피와 같은 어른들의 음료를 나눠 마시지만, 난 리차드 링클레이터나 주드 애파토우, 케빈 스미스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10대 시절 각인된 시간과 습관 속에서 맴돌며 사는 쪽에 가깝다. 어떤 잔이든 콜라를 담아 마신다. 냉장고에 음료를 직접 구비하기 시작한 이후 이 완고한 식음료 소비 습관은 지속되었다. 그러다 최근 몇 년간, 급격히 무너진 체중의 항상성 때문에 당분이 없는 커피나 차로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커피는 언제나 네슬레사의 테이터스초이스였다. 안성기의 이미지보다는 아마도 해외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의 선호인 듯하다. 아침이면 작은 스텐 주전자를 불 위에 올려 물을 팔팔 끓였다. 그리고 1~2분 정도 식힌 다음 커피 잔에 초이스 몇 스푼과 함께 드셨다. 설탕이나 프림은 경멸했다. 아침마다 커피 물을 올리는 부엌 풍경이 익숙하다보니 중학생 때 본 <베티블루>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장면이 같은 방식으로 끓인 커피를 사발에 마시는 프랑스인들의 풍습이었다. 커피가 아이들에게 안 좋다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누나도 곧잘 얻어 마셨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고등학생 때 우리 집은 여러 가지 사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레스토랑을 하게 됐다. 어떤 이유로 엄마가 가게에서 쓰던 프렌치프레스를 집에 가져왔는지 모르겠으나 메뉴판에 커피와 파르페와 김치 볶음밥이 나란히 자리하던 시절, 우리 집에서는 프렌치프레스를 활용해 커피를 잠시 내려먹었다. 그리고 왜 카페에서는 프렌치프레스를 쓰는지 갑론을박과 미식회를 가졌다. 물론 오래 가지 않았다. 숟가락만 있으면 되는 인스턴트커피보다 재료 소모도 크고, 무엇보다 한 잔 생산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방식도 매우 불편했다. 프렌치프레스는 보이는 만큼 연약했다. 안 그래도 퇴출하려던 찰나, 얼마가지 않아 설거지 더미 사이에서 깨져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아무 부담 없이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아메리카노와 스페셜티 커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프렌치프레스는 우리 집뿐 아니라 카페에서도 사라졌다.
그렇게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 프렌치프레스를 다시 만난 건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에서였다. 기품 있고 취향 좋은 비전이 관리하는 어벤져스 숙소에서는 프렌치프레스로 커피를 내려마셨다. 집에서도 커피를 제대로 즐기고 싶었지만 신선한 원두를 갈아서 드립커피를 정성스레 졸졸 내리는 건 하루에 한 페트씩 콜라를 마시던 내게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다. 그런데 프렌치프레스라니, 그것도 한번 내리면 서너 잔 나올만한 대용량 프렌치프레스가 있다니 놀라운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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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프레스는 이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커피 마니아의 향이 안 나면서 간편함과도 거리를 두고 있는 어중간함이 마음에 들었다. 맛과 향은 적당했고, 방식은 적당히 불편했으며, 적당한 정서와 수고도 필요하다. 드립만큼 관심을 쏟지 않으면서도 드립백이나 티백보다는 정성을 들이는 방식이 왠지 적당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살던 생각나고, 뭔가 효용이나 유행과 무관한 고집스런 멋도 있었다. 커피의 맛과 향도 비교적 연해서 편안한 무드에 제격이었다. 무엇보다 내 공간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마시는 커피라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살림에 대한 관심도 프렌치프레스와 마찬가지다. 유행이나 최신과 상관없이 나만의 적당함을 찾는 게 중요하다. 살림은 경쟁의 영역도 아니고, 뽐내야 할 기술도 아니다. 어떤 비기를 갖고 있거나, 신묘한 꿀팁이나 혁명이라는 아이템을 품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아이템은 살림에 애정이 있다면, 더 잘해보고 싶다면, 연구하고 찾아보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과 같은 거다. 자취생들을 위한 최고의 세제, 최고의 행주, 최고의 청소도구 이런 걸 알려주는 포스팅들과 광고는 그래서 부질없다. 그보단 살림과 공간에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울타리를 두르도록 돕는 것. 이것이 살림에 관심 있는 이가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다.
요즘 밖에서 어쩌다 맘에 드는 커피를 만나면 프렌치프레스용으로 굵게 갈아달라고 해서 사온다. 그리고 아이자와 공방의 스텐 차 보관통(caddy)에 넣어두고, 가족의 추억이 깃든 보덤사의 1000ML짜리 프렌치프레스에 내려 마신다. 커피와 물의 용량을 어떻게 맞춰야 좋을지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는데 『완벽한 커피 한 잔』을 작업하면서 익힌 레시피가 큰 도움을 주었다.
커피를 내리기 전에 프렌치프레스에 온수를 담아 예열해둔다. 그리고 물을 올리고, 나는 연하게 마시는 편이라 물 100그램에 원두 5그램 비율로 원두를 준비한다. 물이 끓으면 30초~1분 정도 식혀서 끓는점에서 내려오도록 기다린다. 이때 예열하던 물을 버리고 프렌치 프레스에 원두를 투입한다. 그리고 물을 붓고 긴 스푼으로 한번 저어서 원두가 골고루 물에 닿도록 한다. 그리고 뚜껑을 덮고 타이머를 3분 30초로 맞추고 기다린다. 단, 이때 플런저는 내리지 않는다. 커피가 우러나는 동안 온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알람이 울리면 다시 뚜껑을 열어서 수면에 뜬 분쇄 원두를 걷어낸다. 그리고 뚜껑을 다시 닫고 플런저를 내린 다음 10여 초 후 잔이나 다른 포트로 옮겨놓는다. 참고로 컵 아래에는 무조건 컵받침을 사용한다. 이를 문명이라 부른다. 그러면, 일상에서 가장 편안한 순간을 향과 풍미가 제대로 우러난 완벽한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김교석(칼럼니스트)
푸른숲 출판사의 벤치워머. 어쩌다가 『아무튼, 계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