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가기 전에, 세계를 읽다] 궁금했던 그 문화 이야기 - 인도 편
도서출판 가지에서 출간하는 <세계를 읽다> 시리즈는 장소보다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본격적인 세계문화 안내서다. 그곳에서 직접 살아보며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기쁨과 위험을 몸소 겪었던 저자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지인의 생활문화, 관습과 예법들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연재 칼럼에서는 매주 한 나라의 책에서 한두 가지 주제를 선정해 여행자들이 궁금해할 법한 그 문화 이야기를 속 깊게 들려주려 한다.
글ㆍ사진 도서출판 가지
20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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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갠지스 강가에 위치한 바라나시는 3천 년 동안 존재해 왔으며 힌두교 성지로 여겨진다. ⓒ Shutterstock

 

 

12억 인구를 연결 짓는 범인도적 세계관

 

인도의 사원 입구에는 거지들이 많다. 그들은 가혹한 뙤약볕 아래서 시체처럼 가만히 인내하며 안뜰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길게 줄지어 앉아 있다. 다양한 신들의 석상이 장님과 불구자와 기형인과 삭발한 과부와 사프란 색 예복을 두른 고행자들을 흔들림 없는 평온한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어둡고 시원한 내실로 들어가려면, 우선 앞 다투어 내미는 수많은 손들을 거쳐 가야 한다. 눈부시게 빛나는 비단 옷을 입은 우아한 인도 여인들은 숭배를 하기 전에 침착하게 동전 몇 푼을 대충 나눠준다. 이런 고통과 부당함과 고행을 눈앞에서 보고도 누구 하나 감정을 표현하는 이가 없다. 이런 장면을 처음 접하는 외국인은 두 번 충격을 받는다. 그 비참함으로 인해 한 번, 그에 대한 무심함에 한 번. 이러한 평정심은 과연 무엇일까? 냉담함인가, 무감각인가, 아니면 극기심인가? 이런 광경 앞에서 울컥하거나 동요하지 않는 모습이 비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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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나시에서 매일 해질녘에 펼쳐지는 불의 제식 장면. ⓒ Shutterstock

 

 

카르마(업보)


이런 평정심에 철학적 토대가 있다면 그것은 카르마의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카르마(karma) ‘행동’과 ‘행동의 결과’를 뜻하며 그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카르마는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사람들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모든 작용에는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이 철학적 차원에서 반박불가의 진리인 것처럼, 카르마 역시 도덕적인 차원에서 반박불가의 진리로 간주된다.

카르마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은 결과를 낳기 마련이며 그 결과가 영원히 우리를 쫓아다닌다. 카르마의 필연적인 귀결은 환생이다. 전생에서의 행동이 이생의 운명을 결정하고, 마찬가지로 이생에서의 행동이 미래의 환생에 영향을 미친다. 힌두교도는 여기에 화살의 비유를 이용한다. 이미 쏘아버린 화살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다. 이것은 과거의 행동에서 발생한 카르마, 즉 업보이며 그냥 그대로 놔둬야 한다. 신들조차 실제로 행해진 행동의 결과를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 그 반면에 과녁을 향해 겨누어졌으나 아직 시위를 당기지 않은 화살(현재의 행동)과 아직 화살 집에 있는 화살(과거의 행동으로 축적된 공과)의 경우는 궁수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카르마는 2000년이 넘도록 힌두교 사상을 지배해 왔다. 그것이 일종의 변명이건, 아니면 우주의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이건, 카르마는 인도인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해서도 어깨를 으쓱하며 “그게 다 내 업보지 뭐”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준다. 최악의 불행도 그것이 응당하다고 생각해 수용하게 만드는 것이다.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벌어지면 언뜻 부당해 보이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우리가 과거를 모두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저 운명이나 신의 변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희생양만은 아닌 것이, 이생에서의 선행이 내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카스트


인도의 세습적인 계급제인 카스트 제도는 카르마를 철학적 정당화의 근거로 삼는다. 카스트는 산스크리트어로 색을 뜻하는 ‘바르나(varna)’다. 그것은 처음에 인도를 침략한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리아인들이 인더스 계곡의 검은 피부 토착민들과 동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카스트는 중세 시대 영국의 길드와 오늘날 노동조합이 수행하는 것과 동일한 역할을 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노동자들을 불공정한 경쟁으로부터 보호하고 각 공동체의 지식을 보존하는 것이다. 도공의 딸이 도공과 결혼한다면, 그녀는 흙을 어디서 구하고 어떻게 가공하는지, 가마에는 어떤 나무를 넣어야 하는지 등을 이미 다 알 것이다. 만일 그녀가 대장장이와 결혼한다면 그런 지식이 어디로 가겠는가? 또한 소독약과 항생제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시체를 실어다 버리고 짐승 가죽을 가공하는 등의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해야 할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런 ‘불가촉천민’ 카스트는 여러 세대를 거치며 면역력이 생겼고, 다른 카스트는 순전히 건강상의 이유로 그들을 피했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카스트가 세습되기 시작하자 함께 음식을 먹거나 결혼하는 것에 대한 금기도 등장했다. 또한 직업과 상호의존성을 관계의 바탕으로 하는 ‘자티스(jatis)’라는 하위 카스트들의 거대한 망도 등장했다. 개인은 이런 망에 갇혀 카스트의 사다리를 오를 수 없지만, 집단으로서 하위 카스트는 시대가 변하면서 일의 성격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함에 따라 새로운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인도에 새로 정착하는 인종 집단은 별도의 하위 카스트가 되어 더 큰 카스트 구조 속에 동화된다.

 

수백 개의 자티스 또는 카스트 집단은 순결의 척도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며, 브라만은 제일 위쪽, 불가촉천민은 바닥에 속한다. 불과 1세대 전까지만 해도 어느 지역의 불가촉천민은 그림자만 닿아도 오염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자신들이 근처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종을 달고 다녔다. 그들은 마을 밖에 살았고 별도의 우물에서 물을 썼으며 인간의 분뇨와 동물 시체를 치우는 것 같은 불결한 일을 했다. 낮은 카스트의 사람들이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처럼 카스트를 부정하는 종교로 개종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교 집단들도 위계적 등급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카스트 제도는 계속 살아남았다.

 

1950년 인도 헌법은 그때까지 카스트 제도가 누렸던 법에 준하는 지위를 부정하고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도록 만들었다. 1인 1표 원칙은 ‘카스트주의’, 다시 말해 카스트에 입각한 정치세력화로 이어졌고 피지배층 사람들은 기나긴 카스트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그 갈등을 이용해 이로움을 얻을 수단을 갖게 되었다. 시골에서는 여전히 카스트 규칙을 어기면 죽임까지 당할 수 있지만 도시 지역에서는 카스트의 중요성이 훨씬 덜하다. 이제는 버스나 공장, 식당에서 옆자리에 누가 앉건 통제할 방법이 없어졌다. 또한 정부 일자리와 대학 입학 정원의 일정 비율을 낮은 카스트 사람에게 할당하는 정부의 ‘차별 철폐 조처’로 인해 신분의 상향 이동이 촉진되면서 카스트 제도는 더욱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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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를 상징하는 건축물, 타지마할을 관람하는 관광객들. ⓒ Shutterstock

 

 

다르마


다르마(dharma)를 정확하게 번역하기는 어렵지만 ‘자연법칙’이나 ‘보편적 정의’ 또는 ‘본분’ 정도가 가장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행성들도 자신들의 다르마를 따른다. 스바-다르마는 우리의 ‘양심’과 같은 개인의 도덕규범이다. 특정한 맥락에서 다르마는 ‘타고난 위치와 인생의 단계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 다르마는 카스트에 따라 개인별로 다르며, 나이와 상황에 따라서도 변한다. 성직자에게 올바른 행동이 직공에게도 올바른 것은 아니다. 고대에는 일종의 역차별로 범죄에 대한 형벌이 카스트에 따라 정해졌다. 브라만 계급의 도둑은 낮은 카스트의 도둑보다 여덟 배에 해당하는 벌을 받았다.

 

카르마와 다르마는 단지 고대의 철학적 개념에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지극히 세속적인 행동들을 설명할 때도 자유롭게 이용된다. 정치인들은 항상 자신의 주장을 한 차원 높게 격상시키기 위해 그 용어를 이용한다. 또한 많은 영화 줄거리가 과거 카르마의 결과로 인한 우연의 일치에 의존하며, 영화 속 영웅들은 다르마를 완수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행동한다. 다르마는 많은 인도인들이 우주의 섭리라고 인식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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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물이 귀한 지역이 많다. 사막의 도시 자이살메르에서는 동네마다 우물을 파놓고 식수 문제를 해결한다. ⓒ Shutterstock

 

 

죽음에 대한 생각


힌두교의 세계관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시작으로 통하는 문일 뿐이며, 천국도 지옥도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과정만이 존재한다. 내세의 보상이나 형벌 같은 것은 없으며, 무한하게 거듭되는 삶을 통해 가차 없는 카르마의 법칙이 펼쳐질 뿐이다. 이러한 사슬을 깨는 방법은 모크샤(moksha) 즉 해탈 또는 열반에 도달하는 것뿐이다. 힌두교도는 해탈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독단적이지 않다. 사람과 성격에 따라 다른 길을 따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요가와 명상을 행하고, 어떤 이들은 찬송과 의식을 통해 크리슈나 같은 신을 개인적으로 숭배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선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카르마 요가’라고 하는 일종의 자선 활동을 택할 수도 있다.

 

평범한 인도인들 역시 죽음을 해방으로 본다. 다음 번 가장무도회에 참석하기 전에, 영혼이 육신의 가면과 옷을 잠시 벗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개인의 삶에서 긍정적인 사건이다. 죽음을 일컫는 단어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마디(Samadhi)는 최고의 정신적 경지에 오르는 것을 말하고, 모크샤(moksha)는 해방을 의미하며, 샨티(shanti)는 평화를, 카이발야(kaivalya)는 완전한 평정을, 파라마파다(paramapada)는 궁극적인 장소를 뜻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개인의 의무 중 하나다.


이 글을 쓴 기탄잘리 콜라나드(Gitanjali Kolanad)는 1954년에 태어나 인도와 캐나다에서 성장했으며 미국, 싱가포르, 독일 등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그녀는 30년 이상 북미와 유럽, 아시아의 주요 도시에서 인도 전통 춤인 바라타나티암을 공연하고 가르쳐왔다. 그녀는 여행객으로서, 그리고 자원봉사자로서 인도 전역을 두루 여행했다. 언론인과 결혼해 슬하에 두 아들을 둔 그녀는 현재 토론토와 첸나이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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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읽다> 시리즈는 장소보다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본격적인 세계문화 안내서다. 그곳에서 직접 살아보며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기쁨과 위험을 몸소 겪었던 저자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지인의 생활문화, 관습과 예법들을 쉽고 친절하게 알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