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격주로 연재하는 이 칼럼, 한 달에 한 번 실리는 모 일간지 다른 칼럼도 있다. 계약만 하고 제대로 시작 못 한 원고도 있고, 초고만 던져 놓고 끝내지 못 한 작업도 있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 일들을 벌였을까!’ 나를 탓한다. 난삽한 활자들을 종이 위에 쏟아 놓고 나면, 부질없는 짓을 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한다. 전문작가도 아닌데, 잘 팔리지도 않는 책을 매년 꾸역꾸역 낸 것도 ‘뭔가 잘못한 일’ 같아 괴로울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글을 쓰는 나의 진정한 동기가 뭘까”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글을 쓰고 있느냐고.”
올해 초, 예스24 도서 팟캐스트 <예스책방 책읽아웃>에 출연했을 때는 “책을 내는 게 취미 생활이다”라고 했다. 진심이었다. 지금도 이런 마음이 크다.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워드프로세서라는 걸 샀을 때, 밤을 새워 자판을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종이에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졌을 때의 뿌듯함이 좋았다. 생각은 말이 아니라 활자로 표현되어야 진짜, 라고 믿어왔다. 주변의 동료 의사들을 봐도, 말로만 “나 잘 났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고, 논문과 책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이도 있다. 나는 언제나 후자를 좋아했고,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동안은 논문을 열심히 썼고, 언젠가 다른 형태의 글을 쓰는 게 나에게 더 잘 어울린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는 매년 한두 권씩 책을 냈다. 이때부터 (과정은 괴로웠지만) 책 내는 게 취미가 됐다. 지금도 이 마음은 변함없다.
꾸준히 글을 쓰는 다른 이유에는 “책을 내지 않으면 내가 나를 싫어하게 될 것 같아서”라는 것도 있다. 정신과 전공의 시절에, 자기 손으로 논문은 쓰지 않고 칼처럼 입만 휘두르는 교수를 보면서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심리상담을 오래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인데, 젊을 때부터 입으로만 먹고 살던 사람일수록 나이가 들면 꼬장꼬장해지고 자기만 옳다고 바득바득 날을 세우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 역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을 해서’ 생활비를 번다. 강의하고 가끔 라디오나 티브이에서 ‘말을 하고’ 출연료를 번다. 모두 다 말로 하는 거다. 공부하고 연구도 하지만, 어쨌든 말을 통하지 않고는 일이 완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입이 아니라) 몸을 쓰고 물성이 있는 걸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런 일 중 하나가 바로 손가락으로 타이핑하고 (비록 직접 만들지는 않지만) 책을 내는 것이었다. 이렇게라도 하면 ‘입으로만 먹고 산다’라는 자괴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마음 저 깊은 곳에는, 고역인데도 꾸역꾸역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첫 책을 쓸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우겨도, 죽음으로 끝나고 마니 어쨌든 허무한 게 인생이다. 실존적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글을 남기는 것밖에 없다.’ 언젠가 죽더라도 딸이 내 생각을 계속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었다. 나는 사라지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졸작이 분명한데도 책을 계속 내는 건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사라지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내 것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라디오 프로그램 <강서은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주말마다 게스트로 출연해서 청취자 사연에 답을 하고, 내 나름의 음악처방도 한다. 지금은 가요광장 피디로 옮겨갔지만, 얼마 전까지 이 프로그램의 피디가 했던 말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왜 라디오를 좋아하세요?”라고 내가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라디오의 사라짐을 사랑해요.” 활자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힘들다고. 소소한 오탈자부터, 볼썽 사나운 문장이나, 돌아보면 후회할 말들이 글자로 영원히 남겨지는 건 괴로운 일이라고. “하지만 라디오는 사라지잖아요.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것 같아요.” 사라지니까 쉽게 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라지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거라고. 그래, 사라질 수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에서 읽었던 문장이 문득 떠올라,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책의 중간쯤에서 찾은 이 문장.
“만일에 도쿄 전체가 전부 불타버리는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내 집만 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건 좀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아…… 불탄 들판에, 외롭게 자기 집만 남아 있는 광경을 상상해봐. 주위 사람들은 많이 죽었어. 이쪽은 인명은 물론 가재도구도 전부 무사해. 이건 말이야, 견디기 어려운 풍경이야.”
시간이 흐르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고,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꼿꼿이 남아 있는 게 정말 좋은 걸까?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잊은 채, 추한 것이라도 내 것만 오래오래 남겨두려는 욕심 때문에 괴로워지는 게 아닐까? 세상 만물은 망가지고, 허물어지고, 내려앉고, 끝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김병수(정신과의사)
정신과의사이고 몇 권의 책을 낸 저자다. 스트레스와 정서장애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진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교수 생활을 9년 했고 지금은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의 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