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한 시인은 일평생 침대에 누워만 있었음에도 지상의 모든 곳을 전부 지나쳐온 듯한 권태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권태를 물리치고 흔쾌히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삶의 범위를 발명해야 했다. 그는 실재하는 세계의 격전지에서나 경이로운 자연의 명소에서도 언제나 뒷짐을 지는 편이었는데, 자신의 눈꺼풀 안쪽에 무수히 긁힌 자국들을 들여다보기 위해 잠든 어느 날, 깨어있을 때보다 더욱 격렬한 감정을 느꼈다. 시인은 깨달았다. 자신의 삶에 항상 꿈이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꼭 그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당신도, 나도, 삶의 삼분의 일쯤을 꿈속에서 보내고 있다. 그러므로 엄밀히, 꿈의 세계는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꿈은 지도에서 추방당한 영토다. 누구도 꿈을 자신의 터전으로 삼지 않는다. 비밀이 귀와 입술 사이에서 팽창하듯이, 꿈이 낮과 밤 사이에서 은밀하게 부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안다. 때로는 꿈의 영역이 꿈 바깥 영역을 추월하며, 꿈이 비추는 자리에 실체의 본질이 맺힌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잠을 잤다. 그리고 의식의 바깥으로 추방당한 땅이자, 현실의 일부인, 꿈에서 응시한 것들을 열심히 기록했다. 필경사의 자세로. ‘바틀비’적으로.
바람이 자꾸만 새가 되는 것은 내가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인데 자신의 꿈속으로도 이런 흰 새들을 들여놓고 싶으며 그런 의미에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당신의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내 꿈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내가 내 꿈 밖으로 나가게 되면 당신을 꿈꿀 수가 없으므로 낭패가 아닌가요 하고 내가 말했다 그녀는 말하길 확실한 것은 나와 그녀는 꿈을 꾸고 있으며 (여기서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는데) 사실 나는 그녀가 꾸는 꿈속의 꿈이라는 것이다
-「정어리」 부분, 12p.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매일 잠을 자고, 거의 매일 꿈을 꾸며, 어떤 꿈은 꿈 바깥 시간보다 격렬한 감정과 이미지를 남긴다. 기억나지 않는 꿈은 기억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꿈속에서 꿈 바깥 영역을 간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꿈에서 거의 눈동자로, 어떤 감각점으로만 존재하며, 나를 제외한 것들을 보고, 나를 제외한 것들만 만진다(가끔 꿈속에서 나의 온전한 형상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타자에 불과하다). 꿈의 바깥에서도 이는 마찬가지기 때문에 꿈의 안팎은 경계가 모호하다. 선망해본 적도 없는 배우가 느닷없이 꿈에 출현해 깊은 감정을 나눈 뒤, 그가 나오는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며 혼자 아련한 감정에 빠지는 일 정도는 주위에 흔한 일이다. 눈꺼풀 바깥 세계의 한계 때문에 이루지 못한 관계, 가지 못한 장소, 하지 못한 일들은 눈꺼풀 안의 세계에서 불쑥 실현된다. 그러나 꿈의 반영은 우리의 염원과는 관계가 없을뿐더러, 특별히 친절한 방식을 띄지도 않으며 때로는 난폭하기까지 하기에, 꿈의 안팎은 구별이 어렵다. 우리의 희망이나 절망에 관심이 없는 것은, 꿈 바깥의 세계도 마찬가지 아닌가. 눈꺼풀의 안과 밖은 동시이자, 상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시간이다. 우리의 가능성이다.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는 가능성. 현실에 맺힌 내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가능성.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가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차단기 기둥 곁에서」 전문, 70p.
어느 날 (꿈의 안에서건 밖에서건) 당신이 염소가 되었다면, 당신의 발굽과 뿔, 검은 다리와 눈동자가 다분히 염소적일 것이며, 당신의 생각 또한 염소적일 것이다. 이때에 당신은, 인간의 시절과는 다른 감각으로 발밑의 풀을 밟아볼 수 있다. 부드럽고 따스한 풀의 촉감이 잠시 염소적인 당신의 것이다. 전혀 알지 못했던 풀의 초록과 풀의 고요와 풀의 웃음에 귀를 쫑긋거릴 수도 있다. 그리고 염소적인 그리움과 염소적인 즐거움이 잠시 당신의 가슴에 머물 것이다. 그럼에도 꿈 바깥의 당신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지상의 모든 곳을 다 떠돌아다녀본 듯한 권태에 시달리고 있을 수 있을까. 꿈속의 내가 꿈밖의 나와 포개지며 혼종의 존재로 합쳐지는, 신비를 눈치채버린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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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서대경 저 | 문학동네
꿈이면서 동시에 이곳인 서대경의 시는 대기를 느끼는 백치처럼,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흰 담배연기처럼, 경계가 지워진 자리에 스며들고 있다.
유계영(시인)
1985년 인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온갖 것들의 낮』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