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부암동 복수자들>
tvN <부암동 복수자들>의 한 장면, 방금 전까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복수를 위한 연대체를 제안하던 재벌집 막내딸 정혜(이요원)는 소맥 몇 잔에 사람이 돌변해 주사를 부리기 시작한다. “넌 좋겠다. 홍도 언니가 엄마잖아.” 따스하게 시작한 대화는 도희(라미란)의 아들 희수(최규진)에게 “돈 줄 테니까 홍도 언니 줘.”라는 생떼와 어리광으로 변질되고, 이 꼴을 지켜보던 도희는 어이 없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어우, 얘 취하니까 너무 귀엽다.” 정혜는 원작만화인 <부암동 복수자 소셜 클럽>에서도 작가가 공인한 ‘개그 담당 캐릭터’였지만, 드라마 판의 정혜는 대놓고 사람을 웃긴다. 처음 와 본 찜질방이 너무 좋다며 “이거 집에 하나 들여놓을까”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캐릭터. 처음 접하는 서민의 세상에 매료된 재벌 캐릭터의 익숙한 공식도, 이요원의 몸을 거치는 순간 단단한 설득력과 미워할 수 없는 귀여움의 지원사격을 받는다.
생각해보면 이요원만큼 이 역할에 적역인 배우도 흔치 않다. MBC <불야성>이나 SBS <황금의 제국>을 통해 강인하고 야심 많은 상류층 인사를 연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증명한 바 있는 그의 단호한 얼굴 뒤에는, 같은 인물이란 사실을 잊게 만드는 해맑고 무해한 웃음이 숨어 있다. 정색하는 순간에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에누리 없이 끊어내며 정확하게 말을 부리는 이요원의 입꼬리는, 입가에 웃음기를 거는 순간 부드럽게 말려 볼살을 밀어 올리며 보는 이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삶의 의욕을 모두 잃고 주저앉은 송이경과 그의 몸에 빙의된 철부지 아가씨 신지현을 모두 연기했던 SBS <49일>에서, 이요원의 입꼬리는 냉탕과 온탕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서로 다른 두 인물을 정확하게 묘사해낸다. 제 감정을 누르며 권좌에 오른 군주 선덕여왕과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던 낭도 시절 덕만이라는 두 얼굴을 모두 연기해야 했던 대표작 MBC <선덕여왕>을 떠올려봐도 답은 마찬가지다. 복수를 말하는 냉정함과 술주정하는 순간의 맹함을 모두 표현해야 하는 정혜 역에, 이요원이 아닌 다른 배우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필살기가 있으면 자주 써먹고 싶은 법, <부암동 복수자들>은 자꾸만 정혜를 배실배실 웃게 만든다. 감정의 아찔한 낙차를 웃음 하나로 연출하는 진풍경을 되도록 자주 써먹고 싶은 제작진의 노림수는 뻔한데, 그 뻔한 노림수가 매번 먹히는 게 분할 지경이다. 절대 적으로 돌려선 안 될 만큼 무섭고 결코 미워할 수 없을 만큼 귀여운 캐릭터. 정혜는 이요원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지금껏 잘 해 왔던 연기의 스펙트럼을 한 자리에서 펼쳐 보이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인물이고, 우리는 그가 화면 위에서 웃어 보일 때마다 이요원이라는 배우의 가치를 새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서늘한 위엄과 천진한 웃음을 한 인물 안에 담아내는 데뷔 20년차 배우의 위력을.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