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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선배’의 다짐에 대하여

2017년 오늘,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말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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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주어 발언한다. 나도 겪어봤어요. 달라져야 한다. 나아져야 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201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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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전기톱, 드릴, 전기 그라인더, 에어 컴프레셔와 에어브러시, 캔에 든 스프레이 페인트, 온갖 종류의 접착제. 대학교 다닐 때 매일같이 사용한 도구다. 산업디자인과의 전공수업에선 대략 이런 것들을 사용해 여러 가지 모형을 만든다.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한 마스크와 눈을 보호하기 위한 고글은 필수고, 상황에 따라 장갑을 껴야 한다. 긴 머리는 높이 올려 묶어야 하는데, 자칫하면 기계에 빨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치렁치렁한 옷도 같은 위험이 있으니 피하는 게 좋다. 날이 덥다고 해서 맨발에 샌들을 신는 것은 위험하다. 발을 완전히 감싸는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 모두 1학년 1학기, 첫 전공 실습 수업에서 배운 것이다. 해당 수업의 교수님은 마스크와 고글 등 보호장구를 갖추지 않으면 벌점을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음주 후 실습실 출입 역시 엄격히 금지되었다.

 

여기까진 너무 당연하고 유익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몇몇 선배들이 실습실에 쓱 들러선 한마디씩 핀잔 주듯 던졌다. 야, 우리 땐 진짜 열악했어. 고글은 무슨, 맨눈에 마스크도 없이 이런 거 다 했거든? 올해 신입생들은 왜 이렇게 연약해? 뭔 장갑까지 끼고 있어? 물론 모든 선배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닌데, '오빠가 말이지'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던 복학생들이 주로 그런 식이었다(거기다 술을 마시고 들르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보호장구 없이 작업했으면 후배에겐 그러지 말라고, 조심하라고 조언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 자식아...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속으로 꿀꺽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난 절대 저런 사람이 되지 않을 거야.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 학기에 한 번 꼴로 사고가 났다. 칼이나 톱에 깊이 베이고, 심지어 손가락 일부가 절단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전동 그라인더에 엄지손톱이 통째로 갈린 친구도 있다. 급히 근처 병원 응급실에 달려가 치료를 받고 하얘진 얼굴로 돌아오면, 실습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를 둘러싸고 괜찮냐며 걱정하고 위로했다. 그 와중에 술 마시러 가자고, 알코올이 소독해줄 거라는 헛소리를 하는 인간이 꼭 있는데, 위에서 말한 반면교사님과 동일 인물일 확률이 무척 높다. 우연치고는 희한하죠.

 

먼저 선, 무리 배. 선배(先輩). 안전한 작업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올바른 치료를 받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먼저 경험해본 사람이 가르쳐줘야 한다. 그게 선배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져야 한다. 우리 땐 힘들었는데 요즘 애들은 참 편하겠다고? 그래서 불만이냐? 멍청아, 지금은 2017년이라고.

 

'나도 겪어봤어'라는 말은 사용하기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나도 겪어봤어, 너만 힘든 줄 알아? 그러니까 입 다물어'라는 것과 '나도 겪어봤어. 많이 힘들지? 하지만 나아질 수 있어. 응원할게'라는 것. 2017년 오늘,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이 말을 할 것인가? 어떤 선배가 될 것인가?

 

인권을 침해당하고 정신적?육체적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분야도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많이? 이렇게 오만 군데에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거야? 인권이 과거보다 더 열악해진 거야? 얼핏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그 반대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 명의 목소리에 용기를 얻어 다른 한 명이 손을 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넓고 깊고 높게 목소리가 퍼져나간다. 왜 이제 와서 그래, 그땐 뭐했어, 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지길 원하기에 드디어 용기를 내는 것이다. 너의 용기가 나에게 힘을 주고, 나의 용기가 너에게 힘을 준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지난 20년간 프리랜서로 다양한 일을 하며 다양한 폭력을 겪었다. '폭력'이라는 표현은 거창한 의도를 지닌 거창한 상처에만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계약서 작성을 거부하며 도리어 화를 내는 것도 폭력이고, 약속한 날에 결제를 해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것도 폭력이다. 고료를 깎기 위해 내 능력을 후려치기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작물의 저작권과 사용권 등 권리를 동의 없이 남용한 후 배 째라고 나오는 것도 폭력이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자주 괴롭힌 폭력은 일 관계로 만난 남성들에 의한 것이었다. '작업실 혼자 쓰시죠? (또는 '혼자 사세요?') 놀러 갈게요'. 의도와 관계없이 식겁한다. 네 머릿속에 든 의도를 내가 굳이 좋은 쪽으로 걸러 들을 의무는 없다. 기분 전환하고 싶지 않느냐며, 호텔 방을 잡아줄 테니 노트북을 가져가서 일하라던 남성도 있었다. 저녁 때쯤 와인 사갖고서 문을 두드리시겠답니다. 네가 하는 거 봐서 일을 줄 수도 있다며 술자리 참석을 강요하던 남성도 있었다. 거절하니 다른 여성 작가와 술자리를 마련해달란다. 예산이 적어(맨날 적냐!) 고료를 많이 주지 못하니, 대신 술을 사겠다던 남성 담당자도 있었다. 한참 달게 자는 새벽에 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주정을 부리던 남성 출판인도 떠오른다.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나에게 주절주절 이야기하며, 창작자라면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하지 않느냐며 사람을 자꾸 떠보던 모 광고기획사의 남성 이사도 빼놓을 수 없다. 입버릇처럼 나는 쿨해,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그놈의 쿨... 자기 편할 때만 쓰는 쿨...).

 

오래전 일이든 바로 최근의 일이든 하나하나 모두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여전히 화가 난다. 그 순간 항의하지 못했고 그 순간 받아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감정 중 가장 무서운 건 억울하다는 감정이다. 억울하면, 문자 그대로 병이 난다. 할 말은 하고 싶은데 진상이 되는 건 두려워 머뭇거리는 것인데... 아니 잠깐만요, 진상이라니, 그건 내가 아니라 저쪽인데?

 

이젠 화가 나면 화를 내려고 노력한다. 오랫동안 꾹꾹 눌렀기에 노력이 필요하다. 꾹꾹 눌렀던 이유는 승산 없는 싸움이 될 거라고,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 거라고, 나는 혼자라고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혼자다. 과거에도 혼자였고 지금도 혼자다. 하지만 이제는, 나같이 혼자인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싸운다는 걸 안다. 그리고 이 싸움이 우리 각자를 완전히 잡아먹지 못하게 일상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것도 알고, 그러기 위해 노력한다. 화를 내는 것은, 분노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피해자에게 '네 목소리가 너무 크다'며 비난하는 일, 그게 바로 잘못이다.

 

침 한번 꿀꺽 삼키고서 정색하고, 지적하고, 화를 내니 상대방이 놀란다.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놀란다. 자신이 저지른 무례와 폭력은 싹 잊고 놀란다. 아니, 어떻게 여자가 그렇게 세게 나오냐며 놀란다. 그들은 말하고, 화내는 여성에 놀라고 겁먹는다. 그래, 겁먹고 쫄아라.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달래주고, 토닥여줄 필요가 없다. 우리의 넓고 따뜻한 가슴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나도 겪어봤어요. 소리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탓하며 속으로 삭였고, 괜히 뭐라 했다간 그게 나를 공격할 무기가 될까 봐 그저 참았다. 내가 너무 생글생글 웃었나, 만만해 보였나, 옷이 너무 파였나, 혼자 일하는 여자는 원래 이런 소리 듣는 건가. 하지만 이젠 목소리를 가다듬고 힘주어 발언한다. 나도 겪어봤어요. 달라져야 한다. 나아져야 한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오늘로 <신예희의 프리랜서 생존기> 마지막 칼럼입니다. 지난 칼럼에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여전히 그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프리랜서로서, 과연 나는 '프리' 한가 종종 생각합니다. 내 집, 내 방, 내 책상, 내 의자에 앉아 자유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러다 문득,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떠올렸습니다. 내 일에 필요한 인프라가 무엇인지 우선순위를 따져보고, 지금보다 단순하고 압축적인 형태로 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년 한 해, 그러니까 2018년. 일종의 실험을 해볼 생각입니다.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지역에서 짧거나 길게 거주하며 지속가능성을 추구해볼 계획입니다. 1월 말부터 시작입니다. 어떤 시간이 될까요, 어떤 성과를 얻게 될까요. 뭐, 당장은 모르겠습니다. 뚜껑을 뽕 따봐야 뭐가 보여도 보이겠지요.
그동안 이 칼럼을 통해 저에 대해, 제 일에 대해, 제 생각과 감정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할 창구가 있다는 건, 그리고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척 행복한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곳에서 계속 이야기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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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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