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도구 디자인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끔 한 거죠. 이렇게 계속 사람들한테 말을 걸면 사람들이 그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할 테고, 그 안에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난 5월 17일 저녁 8시, 최인아책방에서 『사람의 부엌』 북콘서트가 열렸다. 류지현 저자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다양한 시도와 작업을 하고 있는 디자이너다.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 혹은 시각적인 언어나 그래픽을 통해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어서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디자인 제품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에는 담지 못한 조사 자료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아까울 때가 많았다. 이러한 것들을 모아 책이라는 창작의 형태로 소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좋은 편집자님을 만나 5, 6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려 드디어 책이 나왔다. 먼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박나은 바이올리니스트, 고윤진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북콘서트를 연 후 류지현 저자의 강연이 이어졌다.
냉장고의 부엌, 사람의 부엌
"여러분의 부엌은 '사람의 부엌'인가요? '냉장고의 부엌'인가요? 그렇다면 '사람의 부엌'이란 뭘까요? 제가 생각한 '사람의 부엌'은 프로젝트의 본질이기도 하고, 책의 내용이기도 한데요. 20세기 후반에 기술이 굉장히 빨리 발달이 됐잖아요. 그러면서 우리가 생활하는 공간에 전자제품이 많이 들어왔고, 그것들을 사용하면서 우리의 삶은 편리해졌죠. 하지만 우리가 자연의 한 존재로서의 리듬으로 살아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전자제품의 리듬으로 삶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전자제품들 중 하나가 냉장고예요. 개인적으로 냉장고를 ‘검은 상자’라고 부르는데요. 그 ‘검은 상자’가 부엌에 들어옴으로 인해서 소비 습관부터 식생활까지 많은 영향을 받게 되죠. 저는 이렇게 기계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나’의 부엌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여기서 ‘나’라는 건 사람이죠. 그래서 제목을 ‘사람의 부엌’으로 지은 거고요. 그렇다면 ‘냉장고의 부엌’으로 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까요? 예를 들면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환경 공단에 따르면 한국에서 버려지는 쓰레기 중 28.7%가 음식물 쓰레기라고 해요. 이 중 70%가 가정 및 소형 음식점에서 발생하고, 그 음식물 쓰레기 중 약 10%는 건들지도 않은 채 보관만 하다가 버린 것들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반기를 드시는 분들이 계세요. 친환경적으로 사는 건 좋지만 내 삶이 바쁘고, 신경쓸 여력도 없고, 윤리적인 건 선택이라고 생각하신대요. 그러나 가정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20% 줄일 경우, 냉장고를 3.3개월 동안 쓸 수 있는 전기를 절약할 수 있어요. 39만 가구가 겨울을 날 수 있는 연탄만큼의 에너지를 아낄 수 있구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행동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파장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음식물 쓰레기 이상으로 문제가 되는 것 따로 있다. 각각의 채소와 과일이 우리 인간들이 하나하나 다 다른 것처럼 같을 수가 없다. 어떤 채소나 과일은 일정 온도 이하에서 상해를 입게 된다.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감기에 걸리게 되는 건데, 겉으로 봤을 때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속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토마토 같은 경우는 10도 이하로 내려가면 감기에 걸린다. 굳이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냉장고에 넣어둠으로써 에너지를 쓴 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다.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다.
"저의 책 타이틀이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인데요. 분명히 냉장고가 없는 부엌을 찾아다니긴 했어요. 하지만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냉장고를 없애자'가 아니라 ‘냉장고를 현명하게 사용하자’거든요. 냉장고에 들어가서 상해를 입게 되거나,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들은 냉장고에 넣지 말자는 거죠. 저도 냉장고가 있습니다. 2인 가족이라 큰 냉장고가 필요없기도 하고, 개인적인 실천으로 작은 냉장고를 쓰고 있는데요. 우유, 고기, 생선 등 이런 것들은 저도 냉장고에 넣고 쓰고요. 그것마저도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고, 냉장고를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본인들의 노력과 상상력, 관심이 있으면 가능한 실천 방식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지금까지 말씀 드렸던 문제점을 깨닫고,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다녔어요. 책도 보고, 자료도 찾아 보고, 인터뷰도 하고요. 그냥 둘이 앉아서 이야기하다 보면 '나 할머니랑 이런 적 있었는데' 하면서 함께 기억을 찾아가면서 두드려도 보고 그랬죠. 오늘은 특별히 책에 들어 있지 않은 한 농장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에 있는 농장인데요. 농장이면서 관광업도 같이 하는 곳이어서, 본인 농장에서 기르는 식재료를 요리해서 관광객들에게 대접을 하는 곳이었어요. 평범한 시골 농장이었는데요. 약간의 도구들만 바꾸면 한국의 시골과 별반 다를 게 없죠. 가지도 키우고, 고추도 키우고. 뿌리 채소는 물과 함께 보관을 하고 있고, 창고는 빛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지었죠. 우리나라 농장과 유럽 농장과의 차이점을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가장 큰 차이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건조법이 발달돼 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바닥에 널어놓거나 공중에 널어서 많이들 말리시잖아요. 반명 유럽은 거의 말리지 않을 뿐더러, 그냥 통에 식재료를 넣어서 말리시더라고요. 그런 게 좀 안타까워서 제가 농부 분들께 팁도 알려드리고 했죠."
저자는 이 곳만의 독특한 포도 재배 방식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보통 포도를 수평으로 키우는데, 이 곳은 수직으로 키운다. 수평으로 키우는 방식이 햇빛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서, 당도가 더 높아지긴 하지만 일을 하기엔 매우 힘이 드는 방식이다. 즉 효율성과 수확량이 함께 줄어들게 된다. 수직으로 포도를 재배했을 때는 편하게 선 채로 포도를 수확할 수 있어, 당도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수확량이 올라간다. 농부 분께서 스스로 효율적인 방식을 개발해 시도를 해봤더니 본인 방식만큼 제대로 된 포도가 나오지 않더라며 자랑하듯이 소개를 해주신 것이다. 이런 지식은 실제로 농부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는 지식이기에 저자에게는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탈리아의 또 다른 농장에서 발견한 천연냉장고가 있는데요. 제가 발견했을 때 거의 '심봤다'를 외쳤던 겁니다. 삼대가 살고 있는 커다란 농장이었는데요. 농지를 얻으셔서 그 위에 집을 지으셨고, 도랑이 땅 주변으로 돌고 있었어요.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하면 식재료를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도랑 옆에 작은 창고를 지으셨대요. 일반 땅보다 좀 훅 꺼지게 지은 다음에 물과 맞닿아 있는 곳에 구멍을 뚫어서,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며 온도가 맞춰지는 거죠. 즉 바닥이 항상 젖어 있게 되고, 습기가 증발하면서 공간의 온도도 떨어뜨리고 습도도 더 제공하는 거고요. 이게 그야말로 천연냉장고인 거죠."
냉장고로부터 식재료를 구하자
냉장고 사용 이전의 삶이 궁금해 19세기 한국 고서와 20세기 초 세계 대전 당시의 요리법을 찾아보기도 했다던 저자. 다양한 나라에 사는 할머니들의 살림 노하우와 요리 비법을 담아 놓은 책들도 그녀의 관심거리다. 무엇보다도 여러 농장과 부엌을 직접 방문해 살아 있는 지식과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이러한 지혜와 경험을 모아 부엌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을 디자인하게 됐다.
"먼저 벽에 걸어서 쓰는 나무 선반을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각각의 선반에 해당하는 음식을 보관하는 지식이 담겨 있는데요. 이건 사과와 감자를 보관할 수 있는 선반입니다. 사과에는 에틸렌 가스가 많아서 다른 재료와 함께 보관하면 다른 재료를 빨리 익게 하는데요. 감자와 함께 보관하면 화학작용이 반대로 일어나서 감자에서 흰 싹이 나는 걸 방지한다고 해요. 사과 그림을 그려 넣은 건 식재료가 눈 앞에 보이게 하는 게 제 목표였고, 장식효과도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아래 감자가 그려져 있는 건 서랍이에요. 감자는 어두운 곳에 있어야 하니까, 서랍에 감자를 넣는 거죠. 서랍 위에는 구멍을 뚫어서 사과는 반 정도 아래로, 감자는 반 정도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했고요."
또 다른 하나는 뿌리 채소를 보관할 수 있는 선반이다. 하얀 모래가 들어가 있는데, 그 이유가 뭘까? 예를 들어 당근은 재배할 때는 수직으로 키우지만, 냉장고에서는 수평인 상태로 보관한다. 하지만 원래 수직으로 살아온 채소이기 때문에 에너지를 잃어가면서까지 자신의 몸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에너지를 더 빨리 소비하게 되고, 더 빨리 늙어 버리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모래를 이용해 당근을 세로로 잡아줄 수 있다. 또, 모래는 수분을 빼앗지도 않고 제공하지도 않아서 농작물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수분 함량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선반의 앞 면을 다 나무로 할 수 있었는데 일부러 모래가 보이게 유리로 디자인했는데요. 사람들이 이 도구를 보고 '얘는 뭐지? 소금이야? 모래야?'와 같이 궁금증을 가지게 만들면서 이야기거리를 던져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육적인 효과도 얻을 수 있고요. 나아가 사람들이 말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 물건에 들어 있는 지식이 퍼져나가는 효과도 생기겠죠. 냉장고가 사실 하나의 도구잖아요. 그 도구가 우리 생활에 들어오게 되고, 아무 생각없이 쓰다 보니 생활습관이 바뀌었고요. 그것이 반복되다 보니 습관이 됐고, 그 습관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다 보니까 현대사회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죠. 제가 만드는 물건들이 냉장고처럼 실생활 속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이 학습을 하고, 습관이 되고, 결국엔 전통이 되기를 바라는 아주 원대한 꿈을 꾸며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 외에도 계란과 양배추를 신선하게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선반과 그릇, 양념을 뭉치지 않게 하기 위해 쌀을 이용한 양념통과 같은 작품들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자가 디자인한 도구들은 개인 블로그(www.savefoodfromthefridge.com)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영어로 운영해 왔지만 『사람의 부엌』을 통해 한국 독자들과도 가까워진다면, 한국어로도 블로그를 개설할 계획이다. 이어서 독자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가졌다.
프로젝트가 신선하면서 건강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아무래도 부모님의 영향도 있을 테고, 실은 제가 아토피가 있어서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결국은 죽을 테고, 다른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서 이 세상에 살아 갈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내 것이 아니고,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내가 태어났을 때만큼은 이 세상을 망치지 말고 최대한 노력을 해서 되돌려주면 좋겠다 싶었죠. 그래서 지속가능한 디자인이나 친환경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고요. 이 프로젝트를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 같은 경우는 유학을 처음 갔을 때 친구 네 명과 살았는데 냉장고를 나눠 썼어요. 칸칸마다 주인이 다 달랐죠. 하루는 제가 버섯요리를 하고 싶어서 냉장고를 열었더니 제 껀 없는데, 친구 버섯은 있었어요. 그 버섯을 보니까 오늘이 지나면 상할 것 같았지만 내 것이 아니니까 건들 수 없죠. 그래서 슈퍼에 가서 새로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친구는 다음 날 상한 버섯을 그대로 버리게 됐어요. 그 이후로 점차 우리가 식재료를 소비하는 습관이 굉장히 잘못됐다고 느꼈고, '정말 이렇게 사는 게 우리가 다일까?' 하고 의심이 든 거죠. 그 후로 사람들이 냉장고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찾아보는 정도에서 시작한 게 이렇게 프로젝트로 발전됐어요. 제가 알아본 것들을 지식으로만 남길 게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도구로 한 번 만들어보자 했던 계 계기가 됐습니다. 지금까지 유럽, 남미 쪽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편집장님이 동의를 하시면 아시아 편으로 한 번 진행해볼 생각입니다.
강연을 들으면서 참 좋은 프로젝트이긴 한데, 바쁜 내 삶에 적용하기엔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지금 남편과 함께 스튜디오 운영하고 있는데요. 제가 매일 양배추와 함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매우 바쁜데요(웃음).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저도 많은 고민을 해봤어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오늘 보여드린 많은 것들, 책에 나와 있는 많은 것들 중에 하나만 시작해 보시라는 겁니다. 뭔가를 해결해야 할 때, 문제를 너무 큰 범주로 보고 모든 걸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면 답이 안 나와요. 아주 커 보이는 것들도 아주 작은 한 지점에서 시작하면, 찾아가는 과정에서 내 방식이 보이는 거죠. 제가 냉장고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내가 어느 정도 선까지 이 아이디어를 실천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하나씩 하나씩 확장해가는 과정을 추천드립니다.
음식저장 같은 경우는 학문적으로 이미 확립된 분야인데, 연구하시는 분들 입장에서는 겉핥기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선, 저는 '음식 저장'이라기보다 '음식 보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저는 음식저장학을 공부하시는 분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들인데 세련되게 포장한 건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항상 존재해 왔지만 하찮아 보이는 것들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어요. 일반적인 저장법은 이미 책에 많이 적혀 있고, 연구도 많이 해왔고, 사람들이 관심 있게 많이 보고 하잖아요. 그런데 집에서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었거든요. 예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달이 많이 됐는데, 냉장고가 등장하면서 그러한 지식 전달이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 대안으로 저는 도구 디자인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끔 한 거죠. 이렇게 계속 사람들한테 말을 걸면 사람들이 그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할 테고, 그 안에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양미지
책 읽는 사람들이 반짝거리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iuiu22
2017.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