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가 앞선다기보다, 시간이 지나도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선택한다. 남이 볼 때는 비장한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선택을 그르치게 되면 그만큼 값을 치른다. 자기 스스로를 존경할 수 없기 때문에 무엇으로도 보상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럭저럭 쪽팔리지 않게 살아간다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적인 선택, 즉 두고두고 값을 치르게 되는 선택을 하면 결국 마음이 괴롭다. 즐겁지 않다는 거다. 창피하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이런 건 사회적 명성과는 관계가 없다. 원거리에서 보면 삶의 양식이 있어 보이는데, 옆에서 보면 없는 사람들도 많고,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데 근사한 삶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 『김규항의 좌판』 김규항 인터뷰에서
‘선택과 집중’. 이제 너무 많이 듣고 너무 많이 말해, 지겨운 말이다. 어쨌든 모든 건 선택과 집중이다.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으니, 선택했으면 그것에 집중하는 태도가 현명하다. 양손에 갖고 싶은 것을 다 쥐고, 하나라도 놓칠까 전전긍긍하는 사람을 볼 때, 나는 그의 미래가 몹시 불안하다. ‘저러다 언젠가 다 녹지, 썩어버리거나.’
“인생에 있어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잖아요. 선택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인터뷰하며, 종종 물었던 질문이다. 상대가 어떤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이자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 김규항은 “어떤 의미가 앞선다기보다, 시간이 지나도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선택한다”고 말했다. 순간 나는 ‘시간이 지나도’에 방점을 찍었다. 즉흥적인 선택을 너무 안 해서 문제인 나지만, ‘후회할 일은 안 하는 게 낫다. 안 할 수만 있다면’이 내 신조다. 내 입이 간지럽고 속에서 울분이 차오를지언정, 내일 후회할 것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다. 물론 감정이 앞선 적도 있지만.
며칠 전, 띠동갑 선배를 만났다. 평소 인간관계 좋기로 유명한 선배에게 “이제야 조금 사람을 알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선배는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야, 나도 마흔 넘으니까 이제 좀 알겠어. 요즘 옛날 후배가 막 생각나는 거야. 내가 그 후배가 프리랜서로 일할 때, 일을 줬거든? 그런데 전임자가 복귀해서 일을 다시 가져왔지. 몇 주 전 후배를 한 모임에서 만났는데 내 눈을 잘 안 마주치더라. 그 때 서운했던 모양이야. 나로서는 사정이 있었는데 내가 말을 못했거든. 말을 했어야 했나 후회되더라.”
이야기를 듣던 중, 나는 대뜸 선배에게 말했다. “선배, 기회가 되면 그 일 미안했다고 꼭 말하세요.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요. 이게 작은 일 같아도 오해잖아요.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마음이 불편한 일이면 말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며칠 전에 책을 한 권 봤는데요. 한 할아버지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가 돼서 17년을 복역하셨어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형기를 마치셨는데 감옥에서 내내 사과해야 할 사람을 잊지 못했대요. 교수 시절, 사정이 있어 성적을 올려 달라고 했던 학생인데 17년간 그 학생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았대요. 감옥에서 나가면 꼭 그때 일을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셨고 결국 하셨다고 해요.”
예화가 조금 빗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가 잊히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사소하게 넘길 수 있는 일, 왜 할아버지는 끝내 사과를 하려고 했을까. 지금까지 살며 마음에 걸리는 일이 나에게도 있지 않을까 곱씹었다.
“창피하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이 말을 요즘 뉴스를 보며, 다시 떠올린다. “내가 자격이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못난 선배 챙겨줘서 고마우이.” (유재경 주미얀마 대사가 2016년 3월, 하나은행 이상화 본부장에게 보낸 문자) 자격이 없는 걸 알면 자리를 탐해서는 안 되고, 못났다고 생각하면 제안도 거절해야 하거늘. 유 대사는 문자를 보내기 한 해 전, 경제경영서를 펴내기도 했다. 저자 프로필 소개에는 “’늘 긍정적인 삶’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고 썼다. 그리하여 자신의 능력까지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일까. “두고두고 값을 치르게 되는 선택을 하면 결국 마음이 괴롭다. 즐겁지 않다”는 김규항의 말이 또 한 번 연상됐다.
인터뷰를 하며, 삶의 깊이가 없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종종 있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아는 사람. 그들에게는 양식이 있다. 상식을 너머 선 양식. 배우고 또 배운다. 오늘도 내게 주어질 선택의 순간, ‘시간이 지나도’ 내 마음이 편한 쪽을 떠올린다.
엄지혜
eumji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