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아이들, 단 한 개의 진실
무대 위로 음악이 흐르면 흰 장막 뒤로 그림자가 나타난다. 어린 아이 네 명과 그 아이들을 보호해주는 여성의 그림자. 다섯 사람은 노래에 맞춰 함께 춤을 추기도, 이야기를 나누기도, 뛰놀기도 한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이긴 해도 그들의 행동과 몸짓은 의심할 여지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은 잠시일 뿐, 음악이 반전되며 그림자의 모습도 달라진다. 네 아이들을 감싸주는 듯 했던 여성은 어느새 위압적인 모습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압박한다. 한 끗 차이로 보호와 감시가 순식간에 달라진다. 작아진 아이들의 그림자가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는 관객에게도 오롯이 전달된다. 오직 그림자를 통한 감정전달, <블랙 메리 포핀스>는 이렇듯 강렬하게 문을 연다.
<블랙 메리 포핀스>는 연출가 서윤미가 고전 동화 <메리 포핀스>에 독특한 상상력을 덧대어 완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탈바꿈시킨 창작 뮤지컬이다. 서윤미는 극작, 연출뿐 아니라 작사와 작곡까지 도맡는 뛰어난 감각을 선보이며, 완성도 높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 동안 백설공주를 다르게 해석한 흑설 공주이야기나, 오즈의 마법사를 새로 해석한 <위키드> 같은 작품이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재탄생 한 것처럼, <블랙 메리 포핀스> 역시 기존의 동화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다. 특히 '블랙'이라는 단어가 주는 반전과 어둠의 이미지를 작품 안에 그대로 녹여냈다.
작품은 1926년 독일 심리학자 그라첸 박사의 대저택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사건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건의 생존자인 보모 메리 포핀스와 그라첸에게 입양된 네 명의 아이들, 한스 헤르만, 안나, 요나스는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마주한다. 오랜 세월 후에 마주한 네 사람이지만 그들 사이엔 불안과 경계의 기류만 흐를 뿐이다. 네 남매는 서로가 서로를 용의자로 의심하며, 때론 자신마저 의심하는 극한의 심리전 속에서 지난 기억의 조각을 맞춰간다.
<블랙 메리 포핀스>는 2012년 초연된 이후 관객들의 사랑을 받으며 재연, 삼연에 걸쳐 2년 만에 사연으로 돌아왔다. 지난 시즌 극의 시점이 첫째 한스에게 맞추어져 한스의 내레이터로 흐름이 이어진 것과 다르게 이번 시즌에서는 둘째 헤르만의 시점에서 전개가 이어진다. 유명한 화가이지만 내면은 불안과 상처로 뒤덮인 헤르만은 쉽게 중심을 잃고 방황한다.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하는 두려움 많은 인물이다. 이번 시즌 <블랙 메리 포핀스>는 왜 헤르만이 그런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살게 된 건지, 왜 헤르만은 알 수 없는 공포심을 느끼는지를 추적하면서 자연스레 나머지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극이 전개될수록 퍼즐의 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지듯, 관계없이 떠돌던 네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 시작한다. 잔혹할 만큼 슬프고 고통스러운 그들의 지난 기억이 완전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면서, 마침내 가려져 있던 진실이 드러나게 되고 네 사람은 상처의 고통에 몸부림친다.
<블랙 메리 포핀스>는 100여분의 시간 동안 잠시도 쉴 틈이 없을 만큼 촘촘하게 잘 짜여 있다. 각 인물의 심리를 따라 그들이 지니고 있던 아픔을 음악과 함께 무대 위에 자연스럽게 펼쳐낸다. 투박하면서도 심플하고 간결한 무대 디자인 역시 극의 분위기를 잡아주고, 몰입도를 높여준다. 후반부에 들어서며 메리의 존재가 부각되는 부분이나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불행과 함께 하겠습니다"와 같은 동화 같은 딱딱하고 교훈적인 마무리가 조금은 아쉽게 다가오지만, 흠잡을 데 없이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온 몸으로 작품의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열연 또한 돋보인다.
극과 극을 오가며 휘몰아치는 스토리를 밀도 있게 그려낸 <블랙 메리 포핀스>는 내년 1월 1일까지 대학로TOM에서 만날 수 있다.
임수빈
현실과 몽상 그 중간즈음
iuiu22
2016.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