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차가 제법 나는 두 남자 배우와 피아노 한 대, 그리고 슈만의 음악. 공연을 봤던 분들이라면 바로 음악극 <올드위키드송>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절망을 웃음으로 포장한 괴짜 교수 마슈칸과 자기만의 세계에 절망마저 숨진 피아니스트 스티븐이 음악을 통해 소통하며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이야기죠. 지난해 초연에 이어 지난 한 달간의 재연까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공연된 <올드위키드송>이 극장을 옮겨 다시 두 달여 간의 무대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는 신선하지만 설익지 않은 배우 이현욱 씨의 모습을 계속해서 볼 수 있을 텐데요. 동숭홀 무대가 막을 내리기 전, 이현욱 씨를 객석에서 직접 만나봤습니다.
“곧 막공이라는 게 아쉬워요.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고, 그만큼 작품에 빠져있었던 것도 같고요.”
그런데 기자는 이번 무대를 통해 이현욱 씨의 연기를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안정된 연기와 달리 솔직히 얼굴은 낯선데요.
“제가 신인이죠. 연기 자체는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단편영화 등에 꾸준히 참여했는데, 이른바 상업적인 작품으로는 2010년 연극 <이>로 데뷔했다고 할 수 있어요. 좀 과장되게 말하면 무대는 신성한 곳이라고 생각해서 준비를 더 하려고 했는데, 오만석 형이 학교(한예종) 선배신데 작년에 연극 <트루웨스트>를 함께 하자고 하셔서 생각보다 일찍 무대에 서게 됐어요.”
올해 <트루웨스트 리턴즈>에도 참여했으니 <올드위키드송>까지 연달아 밀도 높은 작품이네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올드위키드송>은 (박)정복이 형이 저랑 어울린다고 나중에 꼭 해보라고 얘기했는데, 정말 일주일 뒤에 대본이 온 거예요. 소름 돋았죠. 꼭 하고 싶었어요. 많은 후보들이 있었을 텐데 어떻게 제 손에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무대에 올랐고 제 작품이 된 거잖아요. 잘 맞아 떨어져서, 참여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요.”
스티븐이라는 인물이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다가가기는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저로 출발했어요. 비슷한 지점들이 많아서 다가가기 편했고요. 저는 좀 외롭고 고독한 분위기를 좋아해요. 그런 분위기가 우울함을 줬다기보다는 스스로를 많이 들여다보면서 성숙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배우로서 스티븐이 느꼈던 외로움이나 고독을 실제로 겪어봤고요. 예를 들어 스티븐이 스스로 원해서 또는 즐거워서 피아노를 연주했다기보다는 타인의 기대 속에, 그 기대가 주는 외로움에 갇혀 있는 인물인데, 저도 연기를 하면서 주위의 기대와 빨리 잘 돼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연기가 싫어지고 재미없어졌어요. 그만두려고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 들어가기 전에 영상으로 공연을 보고 많이 울었어요.”
어떤 지점에서 눈물이 났나요?
“두 인물의 외로움, 비탄이라는 주제가 제 정서에 많이 와 닿았어요. 그래서 그들이 숨기고 쌓아왔던 게 터졌을 때 저도 같이 터졌던 것 같아요. 그 외로움, 315호의 그 공기를 무대 위에서 꼭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언뜻 보면 지금까지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이미지와 맞는데, 무대 위에서는 의외로 귀엽고, 애교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연기가 아니라 몸에 배여 있는 애교였거든요(웃음).
“제가 예고 진학하느라 16살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는데, 부모님께 부릴 애교를 주위 사람들에게 부리고 있나 봐요(웃음). 평소에는 정말 웃기지 않으면 잘 안 웃어요. 무표정해서 차갑다는 소리도 듣는데, 아마 평소보다 무대에서 많이 웃을 거예요. 흔히 무대에서 푼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선생님들과 밖에서도 편하니까 무대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2인극이라 상대배우와의 호흡에 따라 스티븐도 많이 달라질 텐데요.
“그렇죠, 처음에는 두 개의 버전을 준비하기도 했어요(웃음). 두 선생님이 부모님 같아요. 안석환 선생님이 엄마, 그래서 보호해드리고 싶고, 이호성 선생님은 아빠, 기대고 싶기도 하고 안아드리고 싶기도 해요. 주시는 게 다르니까 무대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석환 선생님과는 좀 더 아기자기하고, 호성 선생님과는 우정 같은 느낌이 있죠. 사실 대사량도 많고, 두 분 고생이 많으시거든요. 그래서 커튼콜 때 땀이 맺혀 있는 선생님 보면 안아드리고 싶어요. 선생님이 ‘고생했다’ 말씀해주시는 것도 좋고. 그렇게 커튼콜을 향해 달려가는 게 무척 좋답니다.”
외적으로는 차가운데 안에 정이 많은 모습도 스티븐과 비슷하네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마음을 많이 여는 편이에요. 적당히 여는 게 아니라 활짝. 그래서 상처도 받지만, 오히려 더 대담해지더라고요. 내가 주고 싶으면 상처 따위 생각하지 말자!”
<올드위키드송>은 연기 외에도 독일어, 피아노 연주, 노래 등 준비할 게 많잖아요.
“네, 노래나 독일어는 선생님이 따로 계셨고, 피아노 연주는 맞춰야 할 부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제 생각보다 저를 더 음치로 보시더라고요. <트루웨스트>에서 오스틴이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취해서 음정이나 박자가 정확하면 오히려 웃기잖아요. 제가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컴퍼니 쪽에서 ‘정말 음치인줄 알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올드위키드송> 한다고 했을 때도 ‘노래 괜찮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래서 오기가 생겼어요. 내가 음치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리라(웃음)!”
그럼 앞으로 뮤지컬도 하시겠네요(웃음). 참여하고 싶은 작품도 있겠죠?
“뮤지컬은 제가 준비를 정말 많이 해야겠더라고요. 이건 혼자만의 생각인데, 나중에 지저스를 해보고 싶어요. 누군가 이 기사를 보고 비웃을 수도 있는데, 헤드윅도 해보고 싶고요.”
여장하면 예쁠 것 같아요. 그리고 연기는 걱정을 안 합니다. 다만 노래를 무척 잘 하시는데 저희가 몰라보는 건가요(웃음)?
“막상 여장하면 기분 나쁘게 생겼어요(웃음). 그리고 사실 제가 하이 테너예요. 이 작품에서는 가곡이고 연기의 감정이 더 중요해서... 스티븐이 노래를 잘 하면 감정이 깨지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노래를 잘 불렀으면 하더라고요. 제 입으로 잘 부른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못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거든요. 다들 저더러 노래 못하게 생겼다고 하시는데, 일단 그렇게 기대가 낮으면 오히려 맘은 편하죠(웃음).”
무대는 영화와 달리 관객들의 반응이 바로 느껴지잖아요. 어떤가요?
“저는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에요. <트루웨스트> 공연 초반에 관객들이 웃어야 할 타이밍인데 안 웃으시니까 제가 무너지더라고요. 그래서 ‘반응에 흔들려서는 안 되겠다, 본질을 더 생각해야겠다’ 훈련을 많이 했어요. 반응이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름을 타고, 반응이 잠잠하면 더 극에 집중해요. 이번 작품에서도 선생님과의 교감이 더 중요해요. 관객들의 반응이 아무리 좋아도 선생님과 호흡이 잘 맞지 않으면 무대 내려와서도 계속 아쉽거든요.”
페이스트리를 무척 맛있게, 예쁘게 드시던데요(웃음). 앞으로 두 달 넘게 더 드셔야 하는데 물리지 않을까요? 공연도 마찬가지고요.
“회당 4개 정도 먹나... 맛있어요. 연기할 때 목이 좀 메는 어려움은 있죠. 커피를 마셔도 되는데, 커피를 마시는 장면도 의미가 있으니까 함부로 못 마시고. 대사할 때 입에서 나오거나 어디 묻으면 안 되니까 최대한 입 안에서 해결하려고 해요(웃음). 작품은 앞으로도 계속 찾고 풀어야 할 것들이 많죠. 지금 극장이 클래식한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더 좋을 것 같은데, 옮기는 극장은 더 작아서 관객들도 정말 315호에 함께 있는 듯, 정서적으로 더 가깝게 느끼지 않을까. 극 자체의 변화는 거의 없지만, 두 사람의 감정이나 느낌이 더 잘 느껴지실 거예요.”
극장을 옮겨 다시 무대에 오르기까지 일주일 정도 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낼 계획인가요?
“한 이틀 정도는 극을 놔보려고요. 친구들을 만나도 항상 신경이 쓰였는데, 놔보면 다른 게 보이지 않을까. 아무것도 안 하고 일상으로 잠깐 돌아가 보는 거죠. 게으르게 늦잠도 자보고.”
연기를 그만 둘 생각까지 하셨다고 했는데, 이현욱 씨가 계속 무대에 서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즐거움인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사람들이 박수 쳐주고... 제가 극을 진득하게 끌고 가는 게 재밌지 않으면 서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잘 돼야 한다가 1순위였다면 즐거움은 저 멀리 있었거든요. 그런데 <트루웨스트>를 하면서 연기가 좋아지고, 좋아하는 일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물론 돈이나 명예도 중요하지만, 이제 순위가 바뀐 거죠. 저처럼 차가운 사람은 억지로 잘 못 웃거든요. 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정말 행복해서 웃는 거예요. 언제까지 연기를 할지 모르지만 즐겁지 않으면 떠날 거예요(웃음).”
인터뷰 중반 이후 계속 웃고 있었는데 인터뷰도 즐거웠나보다고 묻자 이현욱 씨는 ‘재밌잖아요!’라며 또 한번 웃었습니다. 얘기를 나눌수록 스티븐과 참 닮은 배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고 스스로 자꾸 차가운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겉으로 웃지 않는다고 마음까지 차가운 게 아니라는 건 관객들도 아마 다 알고 있을 겁니다. 무대 안팎에서 스티븐만큼이나 따뜻한 정이 느껴지거든요. 이호성, 안석환, 이현욱, 강영석 씨는 물론 송영창, 김재범, 박정복 씨 등 초연 멤버까지 가세한 음악극 <올드위키드송>은 오는 11월 8일부터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으로 무대를 옮겨 연장 공연에 들어갑니다. 슬픔과 환희의 향연이 있는 315호로 함께 입장해 보시죠. 참, 연장 공연에서는 이현욱 씨를 위해 커튼콜 때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면 어떨까요(웃음)!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