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머리에서의 여행
어느 독자든 이미 갖고 있었을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반사하여 인식시키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글ㆍ사진 출판사 제공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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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에세이집을 펴낸 지 15년도 더 지난 지금, 나는 단서들을 찾고 증거를 저울질하면서 ‘누가, 어떻게, 왜’와 더불어 ‘그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추론하는 안락의자 탐정의 꼴로 이렇게 책상머리에 앉아 이 시대의 현장을 기웃거리고 있다. 바로 앞에는 이 정경의 일부임에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아파트 건물이 서 있는데 나 또한 그들에게는 〈이창Rear Window〉(히치콕 감독의 영화. 건너편 아파트에서 일어난 범죄를 우연히 엿보고 해결해나가는 내용이다 - 옮긴이)과 같은 우연한 존재일 것이다. 1층 구석에 있는 ‘윌리엄스 소노마’ 매장에서는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구리냄비며 무거운 르크루제 소스 팬을 비롯하여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갖가지 신기한 도구들을 판매 중이다. 나는 요리에는 문외한이지만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이따금 이곳에 들러 둘러본다. 노동으로 유인하는 이 방대한 규모의 전시 그 자체만으로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히말라야산 크리스털 소금과 프랑스에서 수입한 각설탕을 집어 들거나 거품기와 칼과 채칼을 들여다보며 나는 요리와 제빵 기술의 숙련에 투입되는 모든 것을 생각해본다. 종종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글을 쓰는 행위에 모니터와 키보드, 노트와 펜, 연필과 지우개 따위로 구성된 제한되고 간소한 설비를 뛰어넘는 교묘한 도구들이 훨씬 많이 제공된다면 지금보다 덜 힘들지 않을까, 자아와 자아 간의 외로운 대화라는 느낌이 덜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더욱 많은 장비가 제공된다 해도, 다시 말해서 그에 부착된 물리적 장치들이 더 많다고 해도, 글쓰기란 여전히 사치인 반면 음식 만들기는 필수이다. 먹지 않으면 결국 죽게 되지만 쓰지 않아도(또는 읽지 않아도) 삶은 그런대로 지속된다. 여기서 일부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뿐 출판업계 전반에 걸쳐 찬밥 신세인 독특한 장르, 에세이로 화제를 좁혀보자. 적어도 몽테뉴 이후에 에세이가 환대받던 시기는 없었으므로 지금이라고 딱히 더 나쁠 것도 없지 않느냐고(물론 더 좋을 것도 없지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온갖 배출구가 즐비한 인스턴트 시대에 긴 호흡으로 사색적인 글을 ‘쓰지 않을’ 이유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글을 써야 할 사명(그렇게 불러도 좋다면)이 더더욱 귀중한 것이라고, 열정에 찬 글쟁이들이 더더욱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집을 묶으면서, 어떤 형식을 취하건 나는 주로 정서적인 필요성에 따라 글을 쓴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시를 쓰기 시작한 소녀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말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내 최초의 작품은 단어깨나 주워섬기는 열 살배기의 표현에 따르면 “방치되고, 무시되었으며, 그렇다, 심지어 경멸받기까지 한” 빅토리아풍 인형의 불행한 삶에 관한 시였다. 훗날 그 시는 다른 종이뭉치와 함께 버려졌지만, 나 자신이라 믿었던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의 집요한 탄식만은 긴 세월 동안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글을 쓰려고 할 때 사물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토록 중대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지극히 혼돈에 가까우며 허무의 망령마저 빌붙은 구제불능으로 조직되지 않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나는 질서정연한 삶을 살아보고 싶었지만, 성년 이후의 삶 대부분을 규칙과 규정을 멋대로 파기하며 살아왔다. 정통파 유대교도로서 받은 교육의 영향이기도 하고 나를 길러낸 부모님과 기타 인물들의 영향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언제나 세상이 내게 던진 마구잡이의 원자재에서 표면상의 부조화를 풀어내고 그 아래 존재하는 패턴을 찾아냄으로써 모양 좋은 이야기를 뽑아내려는 노력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전체를 창조하기”위해 글을 쓴다. 충분히 오래 들여다보고 충분히 깊이 생각하면, 얼핏 이해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도 결국은 이해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하다.


임신에 대한 공포, 엉덩이 때리기의 관능(평생 내가 떨쳐내지 못할 것이 분명한 20년 묵은 에세이에 나온다), 정신병동에서의 여러 차례 체류를 비롯하여 나 자신을 대담하다 못해 경솔할 만큼 숨김없이 드러내는 글로 알려지게 됐지만, 나는 항상 조심스럽고 때로는 겁도 많으며 이를테면 집을 나서기조차 어려워하는 종류의 사람이다(이쯤에서 내가 한 번도 운전을 배운 일이 없고 아직도 출생지 1마일 반경에서 살고 있음을 털어놔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또한 생각이 많아 인피니티 스카프(양끝이 없는 고리 형태의 목도리 - 옮긴이)처럼 머릿속을 맴돌며 자신의 불안과 강박을 하나의 풀리지 않는 고리로 짜내는 사람이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전적으로 지적인 행위이지만 한편으로는 내 한계를 넘어가보고 천성적 무력증에 도전해볼 수 있는 방편이 된다. 글쓰기는 나를 내 머리 바깥으로 끌어내 지구 반대편이 됐건 바로 책상 앞이 됐건 예측할 수 없는 만남들로 이끌어주며 그럼으로써 이혼의 파괴성, 거들의 전 세계적 소멸, 브론테 자매의 삶,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고집스럽고 한없이 오지랖 넓은 호기심을 가라앉혀준다.

 

이 모음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애초부터 나는 중대한 문화적 의미를 띠는 것들과 외면상 피상적인 것들의 양극단에 모두 흥미를 느껴왔다. 40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발표한 작품들과 문예비평 중에서 골라 묶은 이 책은 인물단평과 서평, 그리고 단상이라 불리던 유형의 글들을 아우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성격의 글들을 묶으며 나는 플로베르가 “사물을 바라보는 절대적인 방식”이라고 부른 바 있는 어떤 문체상의 인상에 가까운 것을 창조하고 싶었고 그래서 배후의 감수성, 정신의 모든 의도적인 습관과 무의식적인 맹점들에 따라 글을 분류했다.


나는 언제나 내 나름의 자유로운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해왔으니, 그것은 이를테면 돈에 대한 우리의 애증관계일 수도 있고 비만의 악마화나 독신생활의 잔혹한 현실일 수도 있다. 이처럼 삐뚜름한 각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덕분에 내가 지적 정직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윌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그리고 영원히 빼놓을 수 없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 작가들이며, 나는 특히 그들의 목소리가 글을 쓰는 자아의 정중앙에서 쩌렁쩌렁 울리기보다도 그 언저리에서 새어나오는 느낌에 찬탄한다. 내 글 또한 그렇게 비밀을 속삭여주듯 친밀한 음조를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고 믿고 싶다.

 

제목에 대해 한 마디 해야 할 것 같다. 에세이 한 편을 쓰다 불현듯 떠오른 표현인데, 이 책을 묶으면서 생각해보니 모음집 제목으로도 적절할 듯 싶었다. 유명한 사람들과 정말로 점심을 먹는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기보다는 형이상학적 묘사, 다시 말해서 유명인들에 대한 우리의 강박과 유명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그 광휘 안팎의 주변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평이라고 해야 옳겠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사적인 삶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뭔가 매혹적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여기곤 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환원적인 주장일 수 있지만, 명성에 대한 의식이 우리 인생을 측정하고 우리 행동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척도를 변화시켰음은 분명 사실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에세이들이 어느 독자든 이미 갖고 있었을 내면의 생각과 감정을 반사하여 인식시키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이 이 책에서 뭔가 정신의 양분이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글들을 쓰는 것 - 다가오는 마감의 압박에다 반쯤 형체를 갖춘 생각과 어슴푸레한 인상을 어느 정도의 품위와 명료함을 갖춘 글로 포착하는 것, 그리하여 “전체를 창조”하는 것 -이 항상 즐거웠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의 종착지에서, 쓰기와 고쳐 쓰기, 단락들의 배치와 재배치가 모두 끝나고 비로소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로 탄생하는 지점에서 변함없이 찾아와주는 해방감의 순간이 있다. 그 지점에 이르러서는 그저 세상으로 내보내어 뭇사람들에게 발견되도록, 혹은 그 옛날 빅토리아풍 인형의 운명처럼 방치되도록 하는 것 말고는 더 할 일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작가들이 모든 난제에도 불구하고 희망 반, 의지 반의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아 암흑 속으로 써내려가며 시험해보는 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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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들과의 점심 대프니 머킨 저/김재성 역 | 뮤진트리
독특한 시각과 독특한 표현으로 외로운 우상들의 초상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오랫동안 〈뉴요커〉 기자로 일하며 수많은 유명인들을 인터뷰했던 대프니 머킨의 에세이집이다. 여러 매체에 발표한 다양한 글들을 추려 모은 이 책은 서평과 인물단평, 그리고 단상이라 불릴 수 있는 다양한 글들을 아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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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들과의 점심 #에세이 #모음집 #문화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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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jiopop

2016.09.07

제목이 신선하군요 ......... 궁금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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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