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교수에게서 들은 얘기다. 입학 30주년을 맞아 법대 동기 모임이 열렸다고 한다. 그가 주목한 건 권력의 변화였다. 검사 친구들의 어깨에서 힘이 빠진 가운데 새롭게 모임의 중심으로 떠오른 세력이 있었다. 바로 자녀들을 서울대에 보낸 친구들이었다.
40대 후반 워킹맘의 이야기도 비슷하다. “자식이 좋은 대학 가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다들 부러운 표정 감추지 못하고요. 요즘 친구들 만나면 아들딸이 어느 대학 갔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져요. 자식이 다니는 대학 서열이 자기 서열인 거죠.”
영화 <4등>에 등장하는 엄마가 수영선수인 아들의 등수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엄마는 대회 나가면 4등만 하는 아들 준호가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서 준호 등수를 올려줄 코치를 구하기 위해 종교까지 바꾼다. 엄마는 “(코치 때문에)상처를 입을 것”이란 경고에 “그 상처, 메달로 가릴 거예요”라고 응수한다.
국가대표 출신 코치에게서 맹훈련을 받은 준호는 다음 대회에서 ‘거의 1등’인 2등을 한다. 갈등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엄마 아빠와 함께 즐거운 축하 파티를 하고 있는데 동생 기호가 준호에게 묻는다. “예전엔 안 맞아서 맨날 4등 했던 거야, 형?”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4등>의 엄마는 답한다. “난 솔직히 준호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 코치는 답한다. “집중을 안 하니까, 열심히 안 하니까 때리는 거야. 열심히 하면 내가 왜 때리겠어?”
‘4등’은 상징적이다. 잘하긴 하지만 메달권 밖의 조바심 나는 등수다. ‘1등만 기억하는 잔인한 세상’(영화 카피)에서 앞에 있는 3명만 제치면 1등으로 기억될 수 있다. 엄마는 ‘아이가 열심히 하면 1등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준호가 코치의 물리적 폭력에 노출되기 전부터 엄마의 정신적 폭력에 노출돼 있었던 것은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작은 머뭇거림조차 없는 폭력의 밑바닥엔 ‘이 모든 게 너를 위한 것’이란 전제가 깔려 있다. “4등? 너 때문에 죽겠다! 진짜 너 뭐가 되려고 그래? 너 꾸리꾸리하게 살 거야? 인생을?”(엄마) “잡아주고,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다. 내가 겪어보니 그렇더라.”(코치) 엄마는 ‘너를 위해’ 짜증내고, 코치는 ‘너를 위해’ 체벌한다. 이러한 ‘너를 위한 폭력’은 스포츠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주변엔 영화 속 코치처럼 “선생님이, 부모님이 나를 때려서라도 가르쳤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라고 되뇌는 이들을 적지 않다. 40~50대만 해도 ‘사랑의 매’는 정서로 살아 숨 쉰다. 나 역시 학교 복도와 훈련소에서 급우, 전우들과 엎드려 ‘줄 빠따’를 맞은 경험이 있다. 늘 “너희들 잘 되라는 것”이란 가르침이 이어졌다. 직장에서도 막말 좀 하더라도 부하 직원들을 제대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승진 명단에 오르곤 한다.
등수나 점수만이 아니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 대식가인 여성과 그 가족의 사연이 나왔다. 어머니와 자매들은 식탁에서, 옷가게에서 여성에게 “네 허벅지 만져봐. 평생 이렇게 살래?” “그 몸 안 창피하냐?”는 물음을 던진다. 상처받고 속상해하는 여성에게 가족들은 “다이어트를 하도록 충격요법을 쓴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공부든, 일이든, 다이어트든 ‘충격요법’은 만병통치약처럼 쓰인다. “너를 위한 것”이란 말 한마디면 면책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진정으로 ‘너를 위한’ 것이냐? 이다. 현실의 엄마, 아빠, 부장님, 이사님도 ‘다 너를 위해 목소리 높여 충고하는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우리는 이 “너를 위한다”는 속삭임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혹시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엄마 자신의 비교 우위를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은 아닐까. 후배 직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장이나 이사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닐까. 처음엔 “너를 위해”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나를 위해”로 바뀌어버렸고, 자신들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건 아닐까.
‘너를 위한 폭력’ 속에 살아온 이들은 설사 목표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도 행복하기 어렵다.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너 하나만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는 부모 밑에 자란 자식들은 커서도 정신적 탯줄을 끊지 못한 채 마마보이, 파파걸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성인이 돼서는 자신이 전수받았던 삶의 비결을 전수하기 위해 서슴없이 꼰대 짓을 할 것이다.
‘너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진심으로 ‘너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너에게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자식 사랑이 집착으로, 연애감정이 스토킹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너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얼마든지 무례해질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관계든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할 수 있는 적정 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4등>에서 가장 뭉클했던 건 영화가 끝나갈 무렵 수영복 차림의 소년(준호)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장면이었다. 거울 속엔 오롯이 아이만 있다. 엄마도, 코치도 없다. “너를 위한다”는 주문에서 자유로워진 순간이다.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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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중앙일보 논설위원)
1990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200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법조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앞에 놓인 길을 쉬지 않고 걷다 보니 25년을 기자로 살았다. 2015년에 <정의를 부탁해>를 출간했다. 이번 생에는 글 쓰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다.
iuiu22
2016.04.28
스윗라벤더
2016.04.28
좋은 글 잘 담아갑니다